망우리공원(인문학)

낙엽따라 가버린 가수 차중락

정종배 2020. 12. 10. 02:55







가수 배호와 원조 오빠부대. 27세 급성뇌막염으로 요절/정종배

차중락(車重樂, 1942~1968)


차중락은 1942년 3월 2일 서울시 중구 신당동 304번지 603호에서 부친 차준달과 모친 안소순의 8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차중락의 부친은 보성전문학교 마라톤 선수로 해방 전에는 서울시청 공무과장이었다. 해방 후 (주)신흥인쇄소를 경영했다. 중구로 변경되기 전 성동구갑부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집안은 매우 부유했다. 모친은 경성여자고등상업학교 시절 단거리 선수였다. 시인 김수영은 차중락 큰이모의 아들로 이종사촌 형이고, 문학평론가 안막은 외당숙으로 그의 부인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이며, 엄마야 누나야 부용산 등을 작곡한 안성현 작고가는 외가 6촌 형이다.

유년기에는 화종이었다 1953년말 중락으로 개명했다. 서울장충국민학교, 서울경복중학교, 서울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예능과 체육에 남다른 특기를 보여주었고 특히 그림 삽화와 유화를 잘 그렸다. 한양공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1학년 시절이던 1961년에는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첫째형 중경은 역도선수 출신으로 파독광부였고, 둘째형 중덕은 연세대학교 4번 타자를 치던 야구부 주장이었던 형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하였다. 차중락은 장래 희망이 영화감독이었으며 회화적 감성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차중락은 초등학생 시절 포스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거리마다 붙어 있을 정도로 그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기도 했다.

그는 한양공대 연극영화학과를 다닐 때, 그의 어머니 친구 아들 프랭키 손이 일본에서 활약하다 귀국을 하여 차중락이 부르는 노래를 우연히 듣고 "차중락이 너는 일본에 가면, 필경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차중락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는 21세 때 대학교를 중퇴하고 밀항선도 탔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부산 바닷가였다. 그곳에서 그는 밀항 사기에 걸려들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사촌형 차도균(키 보이스 구성원 중 일원)의 권유로 1963년 키 보이스에 합류했다. 그는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민회관 공연 때는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는데 이 모습까지 비슷하다하여 '한국의 엘비스'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차중락의 애인은 에바 가드너와 비교될 만한 미인이었으며 이름은 옥주였다. KAL 대한항공스튜어디스로 취업했다. 키 보이스 멤버인 윤항기의 1980년대에 발간한 수필에서는 이화여자대학교 메이퀸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녀와 차중락의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66년 가을 어느 날, 차중락의 애인은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 해 11월 10일,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및 편곡한 차중락의 이 전국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제2회 MBC 10대 가수상 신인부분에 정훈희와 함께 수상자가 되었으며 동년 년말 동양방송(TBC)신인가수상에는 이봉조 작곡 이란 노래가 대히트 하였는데 차중락 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취입곡은 바로 방송금지곡 이었던 와 란 노래였다.

1961년도 미스터 코리아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2등 준우승을 할 정도로 몸짱이었다. 당시 1등한 사람이 바로 2002년 간암으로 별세한 [수사반장]의 유명탤런트 조경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후배였다.

대한민국의 가요사에 라이벌구도가 1970년대 팬들사이에 남진팬 라훈아팬 두 그룹이 양산됐지만 기정사실은 이미 배호 VS 차중락이란 사전 라이벌 구도판이 실제했고 키보이스 중심 보컬로 美 8軍 부대에서 국내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시기 부산극장무대에 섰을 적에 극장입구는 물론 부근의 건물의 유리창이 부셔지고 담벼락이 무너졌을 정도로 인산인해의 인파들이 붐볐다고 베이스기타를 치며 노래했던 차도균 가수는 증언을 하였다. 오빠부대 원조는 바로 한국의 비틀즈란 닉네임을 얻었던 KEY BOYS(키 보이스)그룹사운드였고 지금으로 치면 BTS(방탄소년단)의 할아버지격으로 봐야 된다. 차중락이란 가수가 지닌 진짜 특기인 춤과 팝 뮤직에 관한 천부적소질 엘비스플레슬리 창법을 완벽히 소화해 내는 굵직한 저음의 매력적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춤 동작, 미8군 무대에서 갈고 닦은 장끼를 다 토해내지 못하고 요절한 차중락의 죽음은 가을만 다가오고 찬바람만 불어오고 낙엽이 떨어지면 그리워지며 생각나는 것이다. 배호, 차중락 이런 보이스컬러를 지닌 목소리의 가수는 다시는 나오질 않는 불세출의 명가수들인 것이다. 1968년 가을 월남 파병 위문 공연을 다녀온 후, 1968년 10월 중순 청량리 동일극장무대에서 살인적인 스케줄로 누적된 피로에 고열을 동반한 뇌수막염으로 쓰러진 차중락은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미8군 무대에서 엘비스플레슬리 노래에 감동 받아서 줄기차게 쫓아다녔던 적극적 팬인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하다 돌아갔던 미국에서 급거 입국한 "알렌"이란 여성과 모친의 정성스런 간호도 아랑곳없이 혼수상태로 전신 마비로 11월 10일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민주공화당 성동지부 여성위원장에 어머니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던 모친은 사랑하는 아들이 유명을 달리하자 큰 충격을 진정하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묘는 망우리공원에 있다. 그 다음해 2월 폭설로 뒤덮인 망우리묘지에서 차중락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묘비의 글인 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쓴 묘비이다. 묘비의 아랫부분에는 차중락기념사업회 최희준, 위키李, 박형준, 유주용, 배호, 이미자, 김상희, 정훈희, 남진, 이상열, 문주란, 한명숙, 이금희, 현미, 태원, 윤항기 등 당시의 유명 가수들과, 허장강, 신성일, 문희, 김희갑, 전우 이봉조, 신대성 김기덕 등 60여 분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묘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낙서가 보인다. 못이나 날카로운 칼끝으로 새긴 글자가 보인다. 극성 펜인지 아니면 동네 아이들의 행위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묘비에서 볼 수 없는 낙서가 차중락 묘비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이 상을 줬다.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 1972년 제4회 때는 김세환, 이수미가 수상했다.

당시 나훈아와 라이벌이었던 남진이 수학한 학교 경복중,고등학교 선배이자 동시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선배인 차중락이 진찌로 오빠부대의 원조였던 것이다. 차중락은 배호와 더불어 우리나라 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원조라 할 수 있다. 열성 팬들은 무덤에서 밤샘을 하고, 사인북을 만들고 언 땅을 파 보관 장소인 움 안에 올 때마다 편지글을 넣어 두었다. 이화여고 3학년 정숙(가명)은 오랫동안 펜클럽 회장을 맡았다. 1969년 대중잡지 《로맨스》에 열성 팬과 그 팬들이 남긴 편지와 일기장을 소개했다. 이름 모를 팬이 눈물로 쓴 팬레터와 정기적 행사처럼 꽂바구니는 장장 20년간 지속되었고, 극성스런 팬들의 절절한 성원은 시대적 애잔한 슬픔을 전래해주는 전설의 가수로 남았다. 차중락을 사랑한 이방인 가족들과 병상의 마지막 임종을 한 ‘알린’의 편지가 유족들이 보관했다. 김영식 작가의 『그와 나 사이를 걷다』책에 공개했다.

'망우리공원(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랑구 양원샘  (0) 2020.12.16
조영래  (0) 2020.12.12
박인환  (0) 2020.12.09
망우리공원  (0) 2020.12.06
망우리공원에 대한 단상 및 제안  (0) 20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