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102주년 및 2월 1일 기일인 송촌 지석영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정종배 2021. 1. 31. 17:24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102주년 및 2월 1일 기일인 송촌 지석영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정종배


대한독립선언 민족대표 39인 중 도산 안창호 남파 박찬익 두 분이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유택을 마련했었다. 현재 비석만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와 남파 박찬익 두 분이 민족대표 39인으로 참여한 일제에 강탈당한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 ㆍ 무오독립선언서 선포 102주년 기념식과 학술강연회가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코로라19 펜데믹으로 2021.2.1. 오전 11시 서울시청 뒤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회의실로 옮겨 진행한다.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 - 1918년 음력 11월 또는 1919년 2월 1일 만주·노령(露領)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 최초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작성자는 소앙(素昻)조용은(趙鏞殷)이다.

이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私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000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먼저 우리 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 무력적 대항을 선포하고 그 선언서의 대표자로는 해외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점 등도 들 수 있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조용은(趙鏞殷)·신규식(申圭植)·정재관(鄭在寬)·여준(呂準)·이범윤(李範允)·박은식(朴殷植)·박찬익(朴贊翼)·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윤세복(尹世復)·문창범(文昌範)·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허혁(許爀)·이세영(李世永)·유동열(柳東說)·이광(李光)·안정근(安定根)·김좌진(金佐鎭)·김학만(金學滿)·이대위(李大爲)·손일민(孫一民)·최병학(崔炳學)·박용만(朴容萬)·임방(林빙)·김규식(金奎植)·이승만(李承晩)·조욱(曺煜)·김약연(金躍淵)·이종탁(李鍾倬)·이동휘(李東輝)·한흥(韓興)·이탁(李沰)·황상규(黃尙奎)·이봉우(李奉雨)·박성태(朴性泰)·안창호(安昌浩) 등이 서명하였다.


도산 안창호(1878.11.09 ~ 1938.03.10.)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서거했다. 일제강점기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이다.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에 있는 이유필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고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가출옥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서거했다. 평양 선산에 가지 않고 비서였던 경성의전 의사였던 망우리 태허 유상규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조카 사위 김봉성 독립지사가 아버지를 모시려던 곳에 도산 선생 유택을 마련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73년 강남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2016년 3.1절 날 옛 묘비를 묘지터에 다시 세웠다.


남파 박찬익(1884.01.02. ~ 1949.03.09)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경기도 파주시 주내면 출생이다. 호는 남파(南坡), 아명은 박창익(朴昌益)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쓰던 가명은 박남파라서, 흔히 그를 박남파로도 부른다. 대종교인다. 상해임시정부 외사국장,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다. 김구의 측근이며 한인애국단과과 한국독립당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김구와 이승만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 국립서울현충원 이장했다. 망우리공원 묘지 안장 비석 석물 봉분은 남아 있다.


망우리공원 안창호 박찬익 두 분이 포함된 대한독립선언 39인 중 이탁(李沰) 독립운동가 행적을 찾다가 이탁(李鐸) 이름과 같은 두 분과 관련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명재(命齋) 이탁(李鐸, 1898~1967)과 중국 상해 공동묘지에서 1969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동우(東愚) 이탁(李鐸, 1889~1930)의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공적조서, 인명사전 등을 뒤졌다. 두 분 다 대한독립선언 39인과는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발견은 동우(東愚) 이탁(李鐸, 1889~1930) 독립운동가 활약 중에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에 행렬이 통과하는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27결사대(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7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 일부대원들과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매국노들이 융희황제의 어가(御駕)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였다.

망우리 고개 '13도창의군탑'과 나란히 '27결사대탑'도 건립하여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기리고 이어가길 빌어본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조소앙을 포함하여 해외로 망명했던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들이 모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39인 중 30여 분이 대종교인이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사에서 10여만명이 순국하였다. 그 분들의 순국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다만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이탁(李沰,본명 이용화)이라는 인물은 훗날 1930년대에 친일로 변절했으며, 이탁을 제외하면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 친일로 전향한 인물은 없었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로 변절한 인물은 박희도, 최린, 정춘수 등 3인이다. 이중에 박희도는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일방통행을 거슬러 왼쪽으로 오르면 첫 번째 만나는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둘러싸인 송촌 지석영의 연보비에 새긴 글을 읽어본다.

松村 지석영 선생(1855. ㅡ 1933) 의학자, 국어학자.

우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교육자, 한글 전용을 제창한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1880년 가족에게 우두를 접종하면서」

묘비 松村居士地公錫永之墓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살구꽃 흐드러진 유택에 봄볕이 한참을 머물면 상춘객들 도시락 펴놓고 지난겨울 이야기 나눈다. 왼쪽은 송촌의 맏이인 춘우거사 지성주 묘이다.

지석영은 1855년 철종 6년 5월 15일 출생하여 1935년 2월 1일 80세로 별세하여 망우리에 묻혔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한의사였던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양의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지석영도 어렸을 때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지석영의 증손자를 포함 5대 의사 집안이다. 그는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의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 즉 천연두 예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송촌은 일본 수신사 일행인 스승 박영선이 입수한 '종두귀감' 접하고, 1879년 10월 한양에서 부산까지 20여일 걸어, 필담 열성에 일본 해군 소속 서양식 의사 감동받아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의술을 배웠다.

1879년 12월 6일 충주군 덕산면 노블리스 오블리제 두살배기 처남부터 왼쪽 어깨 불주사로 천연두 마마손님을 해결한 우리나라 종두법 접종 효시이다.
배움의 대가로 '조일朝日사전' 편찬 작업 국문법의 태두이고,

5대 의사 집안으로, 부친 지익용 양반 신분 개업 않았으나 한의학 정통, 장남 지성주 경성의전 내과 전공 장안의 명의, 장손 지홍창 서울의대 군의관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 현손 지무영 가톨릭의대 송파구에 지내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송촌 지석영 종두법은 봄날 고향 뒷동산 살구꽃과 오뉴월 살구맛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귀감으로 잣나무 노간주나무 한 그루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동쪽 하늘을 지키고 있다.

2019년 서울교원문학회 하계 연수가 성북동 일원에서 실시되었다. 그 가운데 송촌 지석영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8.15 해방 후 시내로 나가려면 혜화동 쪽으로 가는 언덕을 넘어가거나 걸어서 삼선교까지 간 뒤 역마차나 전차와 같은 교통편을 이용했다. 도보의 지름길은 서울국제고등학교 남동쪽 담장 근처 서울성곽 암문을 이용하여 와룡동 성균관 쪽을 이용하여 시내를 오가는 길에 접한 조선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경저(京邸) 집터 우암구거(尤庵舊基)를 찾아갔다. 그 곳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늘 네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옛날 “증자 주자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벽과 같이 서 있겠다.”는 우암의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송동 또는 송자동이라 불렀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완전히 무당에 기대어 살았다. 임오군란 때 망우리고개를 넘어 장호원에 피신했을 때 입궐할 날을 맞춰 민비 눈에 든 장호원 무녀 박창렬이다. 조선시대 미증유 신령군,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받고 창덕궁에 함께 살던 이 무당을 노론의 거두 우암의 집터에 사당을 짓고 기거했다. 사당 이름은 북묘(北廟)다. 진령군은 내연남이라는 말도 있는 수양아들 이유인과 함께 살며 국정을 농단했다. 고종 부부는 진령군이 시키는 대로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봉봉이 쌀 한 섬씩 바치며 국태민안을 빌었다. 밤에 무당이 왕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명으로 내려오곤 했다.

망우리공원에 유택을 마련한 종두법과 국어연구 등 구한말 선각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1894년 8월에 “요사스런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사람들이 씹어 먹으려 한다.”고 상소했다. 송촌 지석영 선생의 삶에서 가장 과격한 발언을 할 정도로 혼탁했다.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 당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에 촛불혁명과 겹쳐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깨닫는 장소였다.


민선7기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2021년 01년 4일 오전 7시30분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송촌 지석영 선생 유택을 참배하고 2021년 신축년 새해를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위창 오세창으로 이어지는 이번 참배는 종두법을 국내에 보급해 천연두 퇴치를 위해 헌신한 지석영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코로나19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걷기였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2021년 새해 첫 시작을 애국지사 등 격동의 근현대사 인물 60여 분이 잠들어 있는 중랑의 자랑이자 보물인 망우리공원 참배로 시작해 참으로 뜻깊다”며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두를 보급해 천연두 퇴치에 앞장선 지석영 선생의 뚝심과 지혜를 이어받아 2021년에도 중랑구는 철저한 방역과 신속한 선별검사 등을 통해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모든 행정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