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81주기 순국선열의 날/정종배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망우리고개 동우 이탁 독립운동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 매년 11월 17일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다.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 정부 기관인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
망우리공원 망우리고개 27인 결사대 동우 이탁선생
이완용을 비롯 매국노 7적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27인 결사대
광무(고종)황제 국장일 망우리고개에서 매복하고 대기하다
융희(순종)황제 어가 가까이 매국노들이 타고 있어 실행하지 못했지만 독립문에서 태극기를 펼치고 다시 매국노들을 척살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실패하고 몇몇 동지만 체포되고 말았다.
동우(東愚) 이탁(李鐸, 1889~1930)
1889년 3월 18일 평남 성천군 영천면 노동리 석계촌에서 이용규와 김도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제용(濟鏞), 호는 동우(東愚), 자는 태연(跆然)이다. 부친 이용규는 성천군을 비롯하여 개천군과 강동군에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었다.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운 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속성사범과에 입학하여 안창호의 지도를 받았다. 재학 중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고, 남북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남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시영・이동녕・이회영・이상룡 등 선배들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신흥학교의 유지를 위해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여준과 같이 신흥학교유지회를 조직하고 각 지방으로부터 학교 유지를 위한 성금을 받아 학교의 발전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191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고 아우 이석(본명 李濬鏞)과 함께 재차 망명하여 류허현 야저구에서 토지개간사업을 벌였다.
1912년 경학사를 이은 한인 자치기관 부민단(扶民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흥학교유지회를 조직하여 운영기금을 조달했다. 1913년 류허현에 있는 일신학교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참여하다가, 1916년 퉁허현으로 이주하였다.
1917년 5월 의병장이던 이진룡이 관전현에서 일경에 체포되자 그 부하들을 재규합하여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무기구입 등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동년 6월에는 동생 이석을 만주로 불러 폭탄제조법을 배우도록 하였으며, 1919년에 이석을 국내에 파견하여 광무황제 국장일(國葬日)을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7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진입하였는데 모두 27명이 선발되어 3대로 편성되었으며, 1919년 2월 24일에 출발하였다. 이 의거는 그가 대장이 되어 27명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27결사대”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제1대대 대원 8명을 인솔하고 2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여기서 이우영・이기원)・조규수・양종환・노윤선 등을 새로 결사대원에 가입시켰다. 그는 동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에 행렬이 통과하는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대원들과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매국노들이 융희황제의 어가(御駕)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독립문에 퇴색된 태극기를 다시 칠하고, 성토문과 격문 등을 배포하면서 계속 매국노들을 암살한 기회를 엿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우영, 주병웅 등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다행히 남만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한족회(韓族會)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동년 9월에는 동생 이석과 전일(田一)이 봉천성내 중국인 경영 대성관에서 일제 요인 암살과 주요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폭탄 100개를 제조하다가 불행히도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전일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에 중국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에 김승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파견되었고,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 계획을 지도하였다. 동년 6월 임시정부 동삼성 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동년 7월에 오동진과 협의하고 3개대의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서울, 평양, 선천 등지에서 무장항일 활동을 펼쳤다. 1921년에는 신익희, 김규식, 여운형, 오산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에 선임되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상부상조와 항일투쟁의 공동보조를 모색하였다. 동년 8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후원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 준비위원회의 평남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중국 만주에서 대한독립맹진결사대를 조직하여 남북만의 각 독립단 수뇌들과 삼부통일안을 협의하고 무력항쟁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다. 1929년 12월 임시의정원 만주, 간도지방 대표 의원에 선출되어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30년 5월 17일 상하이 하비로 소재 고려물산공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4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와 대한교민단이 합동으로 사회장으로 치렀고,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는 한 몸이 도시 의(義)요, 담(膽)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儒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는 스승이자 동지인 안창호의 인물평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잘 말해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9년 국립서울현충원 이장했다.
망우리공원 안창호 박찬익 두 분이 포함된 대한독립선언 39인 중 이탁(李沰) 독립운동가 행적을 찾다 이탁(李鐸) 이름과 같은 두 분과 관련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명재(命齋) 이탁(李鐸, 1898~1967)과 중국 상해 공동묘지에서 1969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동우(東愚) 이탁(李鐸, 1889~1930)의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공적조서, 인명사전 등을 뒤졌다. 두 분 다 대한독립선언 39인과는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발견은 동우(東愚) 이탁(李鐸, 1889~1930) 독립운동가 활약 중에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에 행렬이 통과하는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27결사대(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7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 일부대원들과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매국노들이 융희황제의 어가(御駕)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였다.
망우리 고개 13도창의군탑과 나란히 27결사대탑도 건립하여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기리고 이어가길 빌어본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조소앙을 포함하여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문창범, 박찬익, 신규식, 유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김학만, 정재관, 이광, 이대위, 이범윤, 이세영 등 해외로 망명했던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들이 모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39인 중 30여 분이 대종교인이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사에서 10여만명이 순국하였다. 그 분들의 순국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다만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이탁(李沰,본명 이용화)이라는 인물은 훗날 1930년대에 친일로 변절했으며, 이탁을 제외하면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 친일로 전향한 인물은 없었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로 변절한 인물은 박희도 최린 정춘수 3인이다. 이중에 박희도는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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