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김사국 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

정종배 2021. 3. 1. 20:23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박원희 김사국 부부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지어미는 여성권익향상 운동에 앞장 지아비는 사회주의 운동가 독립운동가/정종배

박원희(朴元熙, 1898 ~ 1928) 해광(解光) 김사국(金思國, 1895 ~ 1926)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1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귀국 후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여성권익 사회운동의 독립운동가 박원희 외손자인 김영열 선생(중등교장 역임)과 전화로, 외조부모님의 삶과 그 따님인 김사건 여사의 외조부모님 기개를 닮아 맵고 짠 삶을 극복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두 분에 대한 서훈 추서를 위한 노력에 대해, 그 노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씀했다.

두 분의 초장지는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였다. 해방이전 망우리공동묘지 어머니 안국당 묘지 입구 좌측 위로 이장했다. 2002년 10월 28일 대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여 안장됐다. 서훈 받기 전 사회주의 운동 전력으로 숨죽이는 연좌제 그늘아래 수많은 나날을 고뇌와 아픔을 겪었다. 첫 외손자가 연좌제로 육사에 입학 못한 뒤로 동생들도 대부분 교사로 삶의 방향을 돌렸다.

또한 망우리공원 안국당 묘지 앞에 며느리 박원희 묘비는 서 있고, 아들 김사국 묘비는 그 아내 묘비 앞에 묻히게 된 사연을 알게 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날 포그레인 작업하며 김사국 선생의 묘비는 손상을 입어 땅에 묻히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아들과 며느리 나라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 안국당 묘지 왼쪽에 세우고 묻었다.

김사국 박원희 외조부모님에 대한 ‘학술 논문’을 포함된 어머니 인전 김사건여사 회혼기념 문집 『노을에 기대어 건져올린 세월』을 우편택배로 보내줬다. 중랑구청에서 후손들의 모임이나 자료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씀을 나눴다.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은 1892년 11월 9일 충남 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명 해광이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같은 주의자인 아우 김사민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도와 한학을 공부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생활고로 중퇴하고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다.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나중에 망명 중 폐결핵에 걸려 귀국 끝에 1926년 5월 8일 숨졌다.

1921년 1월에 창립된 이영·김명식·장덕수 등과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 7월 박원희와 결혼한 뒤 11월 비밀리에 초청 받아 도쿄로 건너가 박열·김약수·조봉암 등과 함께 흑도회를 결성했다.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조선고학생동우회에도 참여해 1922년 2월 동우회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도했으나, 자유노동조합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22년 봄 일본에서 귀국하자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그 해 3월에 열린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 관련자인 장덕수·김명식·박이규 등의 제명을 제안하고, 이영 등과 18개 단체로 이루어진 연합회에서의 서울청년회 탈퇴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좌우세력의 불분명한 관계가 명확해지는 하나의 계기였다.

또한, 4월에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대회 때 차금봉과 손잡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 10월 25일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 개최 등을 지도하였다. 11월에 일어난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우 김사민은 투옥되었고 김사국은 만주로 건너갔다.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은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 창립을 위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김사국·김영만·이영·임봉순·장채극·김유인·강택진 등 17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김사국을 대표(책임비서)로 선임하여 블라디보스톡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하였다. 처음 때 공산주의운동 사나운 장수였다.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었다가 1923년 3월 용정에 동양학원, 영고탑에 대동학원을 설립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재차 러시아로 망명하였지만 폐병이 악화, 귀국하여 1924년 5월 통일적 당 건설을 위해 ‘13인회’를 주도하였다.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다. 서울파의 지도자로서 화요회(맑스가 태어난 1818년 5월 5일이 화요일이기에 명명, 홍명희·홍증식·조봉암·윤덕병·김재봉·박일병·조동호·김찬·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와 대립했다. 이후 1924년 12월 6일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고려공산동맹 대회가 개최되었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등 선두에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는 파벌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그때 신문기사 내용: 김재봉 · 김두전(약수)·유진희·권오설·김상두·진병기·주종건·윤덕병·송봉우·독고전·홍덕유·조봉암·김찬·조동우(호) 등은 재작년 사월 십칠일 오후 한시 경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이란 중국요리점에 모여 조선을 일본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란 비밀 결사를 조직하야.......)이 탄생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김사국은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동경을 오가며 조선공산주의운동 일통을 위하여 애썼던 피 끓는 주의자였다.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40여 단체가 연합하여 사회단체합동연합장례식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 만장이 동대문까지 이어졌다. 1,000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가운데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사국 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인석(仁石) 김사건(金史建, 1925~2010) 여사 『인석 김사건 여사 고희기념문집』을 우체국택배로 소중하게 받았다. 김사건 여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조카 김영훈 소설가 본인의 작품집 『익명의 섬에 서다』·『장군님의 말씀』 두 권과 함께 정성담긴 택배로 보내주었다. 김사건 여사의 고희기념문집을 읽고 김사국 · 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리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고희문집의 첫 장 ‘나의 인생 나의 시련’ 중 ‘나의 출생’ 내용과 생애 활동을 소개한다.

“나의 아버지 金 思자 國자와 어머니 朴 元원 熙희자의 딸로 서울 종로구 계동 225의 1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친가가 아닌 외가댁이었다. 그러나 2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역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후, 나는 외조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외할머님이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독립운동 하시다 부모님도 돌아가셨다는 것도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어서였다. 내가 지금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 기억으로는 어느 겨울 날 이종 사촌 오빠에게 업혀서 어딘가를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앞에 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빠 등에 업혀 돌아올 때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던 생각이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내가 갔던 곳은 교동에 있는 천도교 강당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1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던 것이었다.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1년 후인 4살 나던 해 12월 13일이다. 이것이 나의 출생 이력이다.“

이후 김사건 여사는 외할머님의 사랑으로 공부도 잘하면서 씩씩하게 대자유치원 재동보통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육영수 여사와 배화여고 동기였다. 농촌계몽운동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한글 해독을 하게했다. 새마을운동 및 학교 자모회장 일을 맡으며 청와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받아 학교 앞 다리 건설 및 학교 신관 건립과 도서 구입 교회 봉사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 했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집 문제였다. 김사건 여사는 친할머니 안국당 여사가 집에 오는 것이 싫었다. 배화여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 집계계에 취직했다. 정신대 문제로 은행 다니는 김상태 씨와 1944년 결혼하여 종로구 원서동에서 신혼생활하다 1945년 대동아전쟁으로 서울 소개령을 겪으며, 남편의 고향인 청양군에 정착했다. 농촌계몽과 학교 및 교회 봉사활동으로 칭송을 많이 받았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 장한 어머니와 모범적인 지성인이었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 신문을 뒤져가며 발품과 정성을 다하였다. 하나하나 찾아서 기어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는 기틀을 다지고 국립대전 현충원으로 안장했다

사진 박원희, 김사국과 김사국 장례식, 두 분의 따님 김사건 여사 고희 기념 문집, 망우리공원 어머니 안국당 묘소 앞으로 옮겨 세운 박원희 묘비와 누워 있는 김사국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