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열사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全漢昇, 1948~1960)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는 2020년 4월 19일 오전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식 후 기념탑 뒤편으로 이동해 4·19혁명 희생자 중 무연고인 고(故) 전한승군과 고(故) 진영숙양의 묘역을 참배했다.
고 전한승군은 서울 수송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0년 4월19일 수업을 마치고 귀가 중에 얼굴과 머리에 직격탄을 맞고 쓰러져 바로 수도의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을 거두었다. 당시 초등학생 의거의 시발점이 됐다.
고 진영숙양은 한성여중 2학년이던 1960년 4월19일 시위에 참가해 미아리 파출소를 거쳐 시내로 가다가 미아리고개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세브란스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문 대통령 내외는 묘역에 꽃바구니를 헌화하고 묵념하며 희생자의 헌신과 뜻을 기렸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4시 시위에 나가며 남긴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의 유서가 되어 버린 어머니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렀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가 쓴 4.19혁명 추모시 「나는 알아요」
아.....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놀은/ 오빠와 언니들의 피로 물들었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 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수송국민학교 6학년 1반 학생인 전한승군이 4월 19일 오후 4시 20분경 같은 반 두 명의 엄마 뒤를 좇아 담임 이봉구 선생님께 “선생님 그럼 가보겠습니다”라고 꾸벅 절하고 마포구 공덕동 집으로 향했다. 세종로 사거리를 건너 마포행 전차 정류장에 이르러 학우들과 그 어머니를 놓치고 말았다. 이때 콩 볶듯 터져 나오는 칼빈 총탄에 거리한복판 가득했던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아카데미극장 옆에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박수를 치며 구경하던 전군만이 아스팔트 위에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이때가 4시 30분경이었다. 소란이 잠시 가라앉은 뒤 서울의대 학생들이 머리와 얼굴에 총탄을 맞은 전군을 싣고 수도의대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문안의 소동도 모른 채 한적한 공덕동에서 여느 때보다 늦은 아들을 기다리는 집에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 7시경 찾아든 손님은 뜻밖의 3대독자 아들의 처참한 죽을 알리는 담임 이 선생님이었다.
20년간 서울시청 공무원 생활을 하고 5년 전에 정년퇴직한 아버지 전중현(60세) 씨는 칠남매 가운데 오직 하나인 아들을 잃고 “큰집의 기둥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학생을 죽이라는 총은 아닐 텐데 내 아들 죽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라고 얼빠진 채 한숨만 지었다. 오직 하나인 아들을 좀 더 나은 학교로 보내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무리가 될 줄 알면서도 수송국민학교에 입학시켜 아침 7시 20분에는 틀림없이 등교시키기를 5년간 학교에서도 드물게 보는 5년 개근으로 공부도 썩 잘하는 모범학생이었다. 보이스카우트 대원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인 전군은 집안에서도 늘 웃음보를 터트려 셋방살이 어려운 살림 가운데에서도 즐거웠노라고 어머니 유정길(46세) 씨는 “죽은 놈에게 새 양복 한 벌 해 입히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고 통곡하였다.
심술궂은 꽃샘바람에 꽃잎처럼 쓰러진 전한승군의 넋만은 세종로네거리에서 잠들지 못한 채 엄마아빠 그리고 여섯 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0일 하오 3시경 6녀 1남 중 다섯째인 3대독자 전한승은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4~6 고학년 학생들이 1~3 저학년은 학교에 있게 하고 4월 26일 시위에 참여 악을 발악발악 외쳐 주위 어른들이 이제 그만 진정하라해도 계속 이어가 그 시위대 주변을 피했을 정도로 씩씩했다
1961년 3월 6일 수송국민학교 833명 어린이와 함께 전한승 군 영령에 스승과 교우들의 눈물 속에 명예졸업식을 치렀다. 같은 해 5월 8일 열 한돌 어머니날에 4.19의 꽃다운 용사를 길러낸 어머니 41명을 표창했다. 모범 어머니를 대표하여 전군의 어머니 유정길(47세) 여사가 “저희들의 힘이 약하였기에 더 좋은 어머니로서의 힘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우며 앞으로 어질고 인자한 어머니로서 겨레를 위해 이바지 하겠다”고 답사를 하였다.
어머니 꿈에 외아들인 한승이는 나는 절대 죽지 않았다고 몇 번 나타났다 마포구 공덕동 65번지에 사는 아버지 61세 전중현과 어머니 47세 유정길은 이듬해 3월 25일 남동생이 태어났다. 당시 김상돈 서울시장이 전군의 집을 방문하여 ‘4월의 경사’라고 축하하며 금일봉을 전하고 아버지와 두 딸의 취직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1962년 4월 4.19혁명 두 돌을 맞아 희생자 186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63년 9월 20일 전한승 군은 4.19혁명유공자로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 195배위로 이장했다
1968년 4월 19일 동생 전우정 군이 중앙대학부속국민학교 1학년 1반에 입학하여 형의 무덤에 분향하였다. 동생은 형을 닮아 ‘산수를 잘하고 달걀만 잘 먹으며 개구쟁이 점잖이’라고 불렀다. 세 살 때부터 부모님 따라 수유리 4.19묘지에 형 묘지에 참배하며 의젓이 분향하고 꽃을 바쳤다. 전군의 가족은 남영동에 살다 이웃가구점에 불이나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시가야리에 단간 셋방을 얻어 내외가 하루벌이로 살아가지만 우정 군의 자람에 보람을 느끼며 나날을 살고 있다.
전한승 군 외에도 국민학교 학생 4명이 희생됐다. 임동성(50년 9월 17일생~60년 4.19일 사망) 종암국민학교학생. 시위대열에서 총상사망) 임충수(부) 최복순(모), 안병채(50년 2월 12일생~60년 4.19 사망) 동신국민학교 학생. 신설동국민학교에서 사망, 박동일(50년 7월 13일생~60년 4.19 사망) 부산서면경찰서 앞에서 총상 사망, 정대성(46년 5월 1일생~60년 4.19 사망) 금호국민하교 동대문 경찰서 앞 시위도중 사망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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