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4.19혁명 기폭제 3.15부정선거 부통령 당선 만송 이기붕

정종배 2021. 4. 19. 03:10

4.19혁명기폭제 3.15부정선거 부통령 당선

만송(晩松). 이기붕(李起鵬, 1896~1960)

 

이기붕은 18961220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 299번지에서 부친 이낙의와 모친 송정현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18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종로구 사직동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이보의 17대손으로, 그의 가계는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오른 명문가였다. 이기붕의 증조부 이회정은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상사를 발표하였던 일로, 명성황후의 민씨 정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1883년 처형되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어렵게 지냈다. 이기붕은 10세 때 부친이 작고해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거르며 가난하게 성장했다. 모친의 교육열로 상경해 보성중학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보성중학 시절엔 종로 YMCA회관에 나가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보성중학 교장선생님인 최린과 주시경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동기로는 허정, 김도연, 염상섭, 최승만 등이 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농장 일, 호텔 일, 접시 닦기 등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워싱턴에서 허정, 장덕수, 윤치영 등과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와 ‘3·1신문을 발간했고, 1934년 귀국 후에는 잡화상, 광산업 등에 실패한 후 종로의 대형 요릿집 국일관의 지배인을 지냈다. 부인 박마리아와는 미국 유학 중 만나 약혼한 뒤 1935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이기붕의 출셋길은 광복 후인 194510월 이승만의 귀국으로 열렸다. 윤치영 비서실장의 비서를 지내다, 비서실장으로 승진했고, 윤보선에 이어 서울시장 19496월부터 19514월에 걸쳐 재임하던 중 6·25한국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유공자인 장택상, 이범석을 밀어내고 1953년 원내외 통합자유당의 2인자인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자신의 충복인 이기붕을 내세웠다. 1954년 이기붕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 뒤 이승만에게 초대 대통령의 영구 출마를 보장한 사사오입 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켜 보답했다. 같은 해에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장면에게 패했고, 19603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4.19혁명 이후 26일 오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했다.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42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이기붕 일가는 두 차례에 걸쳐 피신했다. 1차 피신은 19일 오후 2시경. 2차 피신은 25일 오후였다. 장소는 육군 제6군단이었다. 이기붕 일가는 27일 저녁 7시경 경무대에 도착, 그다음 날인 28일 새벽 집단자살로 세상을 등졌다.

이기붕 일가족 장례식은 30일 상오 950분 수도육군병원 강당에서 조객들이 찬미가를 부르는 가운데 간소히 거행됐다. 망우리에 1115분에 도착했다. 지금의 면목고 후문 500m 위 오거리 쉼터 정자 아래 그곳에는 어머니 송씨와 장모 고씨와 11년 전 심장병으로 요절한 딸 강희양의 묘지가 있었다. 강희양의 묘지 뒤에는 이기붕씨와 박마리아씨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그 앞에는 강석군과 강욱군이 자리를 각각 잡았다. 그 뒤로 종종 강석이를 사랑한 젊은 여성이 망우리 그 무덤가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기붕의 비석을 소개하면 앞면 상단에 國會議長 晩松李起鵬先生墓 夫人朴瑪利亞女史祔左

하단에 여기 거칠고 험한 일생을 슬프고 애처롭게 걸어 예신 내외분이 잠드셨으니 三一五선거의 잘못을 책임지시고 온가족이 함께 애절한 최후를 마치신 리기붕 선생과 부인 박마리아 여사이십니다 세상에는 그 잘못의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은 너무도 드뭅니다 만송선생은 손수 이끌어가시던 정당이 저지른 잘못을 확인하시자 아랫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부인과 두 아드님을 데리고 미련 없이 담담하게 가신 것입니다 칠십 평생 만송선생의 걸음걸음이 깨끗하였듯이 선생의 최후도 또한 깨끗하였습니다. 모시던 저희로서 영광스러운 고종명을 누리시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송구하게 여기오며 높고 밝으신 덕을 추모하면서 작은 정성을 모아서 삼가 영복을 비옵니다 10주기를 맞아서 만만클럽 회원일동

첫째 딸 이강희의 묘비 앞면: +李康姬之墓. 뒷면: 강희야 귀한강희야 어두운밤 무서워말고 눈보라 빗바람에 떨지 말고 천사 너를 직히리니 여기 고히고히 잘 쉬여라 요단강 건너가 다시 만나자 一九四九年十一月二十二日 애닮은 아빠 李起鵬 엄마 마리아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로 입적하여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부모와 동생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 비극의 가족사 장본인인 이강석의 묘비 앞면: 리강석의 무덤. 뒷면: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부모님 모시고 동생 데리고 기꺼이 웃으며 자진해서 간 것을 우리는 아노라 李康石君 一九六0年 四月 二十八日 二十四歲散花

연세대 재학생으로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떨어지면 집안이 망한다며 4.19혁명 당시 데모대열에 합류한 둘째 아들 리강욱의 묘비 앞면: 리강욱의 무덤. 뒷면 한창 피어오르던 어린 싹 너에게 때 아닌 찬서리를 맞혀 피기도 전에 지게 하다니 진정 애처롭구나 李康旭君 一九六0年 四月 二十八日 二十歲散花

망우리공동묘지 이기붕 일가의 묘지는 이기붕 관련 친목모임인 만만클럽에 의해 1976417일 고양시 사설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당시 군 실세 사단장의 힘으로 가족의 유해와 비석을 헬기로 옮겼다.

필자는 2020330일 이기붕 가족묘지를 찾았고 이어 428일 이기붕 60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고양시 소재 사설 공원묘원 이기붕 일가 묘지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문중 중심으로 코로나19 여파로 예년에 비해 간소하게 열렸다. 이기붕씨와 가장 가까운 7촌 조카와 문중회장 등의 말을 종합하여 이기붕씨 일가의 가족묘지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년까지 강욱이 친구들과 삼사년 전까지도 강석이 여자 친구라는 분이 참석하였다. 강석의 여자 친구는 망우리공원에 자주 찾아온 젊은 여인이었다. 지금의 묘역도 그 여자분이 시집가는 대신 장성 출신인 아버지한테 결혼 비용으로 받아내 13년 전에 조성하였다. 묘역은 500여 평 정도였다. 지금의 서대문 4.19도서관인 이기붕씨의 집 안을 데모 군중들이 들어와 파괴하고 집기와 물건을 가져 갈 때, 현장에 있던 집안 분의 말은 냉장고 안에서 수박이 나왔고, 열대 과일 등과 선물로 받은 모직물 두루마리가 많이 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기붕씨의 몸이 아파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몇 번 기회가 있었으나 박마리아 여사의 과욕으로 비극의 가정으로 전락했다고 전했다. 4.19혁명 당시 두 번에 걸쳐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담화를 박마리아 여사의 힘으로 모든 것을 ~고려해 보겠다.’는 것으로 변하여 발표하였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어 이렇게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