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 사회운동가 4.19혁명에 기름을 부은 과욕 친일인명사전 수록
박마리아(朴瑪利亞, 1906~1960)
박마리아는 1906년 4월 19일(음력 3월 26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박마리아의 어머니 고의대는 감리교 목사 정춘수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개신교에 입문, 전도사가 된 인물이다. 일찍 고아가 된 그는 대관령을 넘어 경성으로 와 경성의 한 교회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박마리아는 남의 집 어린아이를 봐주고 때로는 채소밭에 나가 일을 해주면서 받은 품삯을 생활비에 보탰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여자이면서도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강한 집념이 이때 다져진 것 아닌가 싶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마리아는 정춘수목사의 주선으로 개성에 있는 감리교가 세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이때는 생활이 매우 어려울 때라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학업에 대한 욕심으로 힘들게 호수돈여고보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윤치호의 딸로서 개성에 살고 있던 윤봉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학교를 마쳤다.
1923년 3월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수돈여고보 동창의 도움을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 1929년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고등보통학교의 교사 및 학감을 지냈다. 그는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번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매사추세츠주 마운티홀리대학에서 수학했다. 1930년대초 테네시주 스칼렛대학 학사 학위와 1932년 피바디사범대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 무렵 그는 원용덕(元容德, 1908~1968)과 사귀었다. 원용덕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의사였고, 같은 미션계인 이화여전에 있던 박마리아와는 연인 사이였다. 그러나 미국 유학 생활 중 원용덕과 헤어지고 이기붕을 만나 그와 결혼하게 된다.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 1934년 12월 15일 토요일에 이기붕과 결혼하였다.
귀국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미국 유학 중 만난 열 살 연상의 이기붕과 결혼한 뒤로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에서 근무했다. 조선YWCA연합회는 1938년 내선일체의 원칙하에 일본YWCA 산하로 흡수되는데, 이때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서 지식인들을 동원한 친일 강연에 적극 참가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1942년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각종 간담회에 등장하여 징병제에 호응할 것을 요구했다. 박마리아는 이때의 활동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교육 분야에 수록되었다.
이승만과 가깝던 남편 이기붕은 광복 후 이승만의 집권과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특히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영어가 유창한 박마리아를 가까이 두기 시작하면서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1946년 박마리아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임용되고 대한부인회의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이기붕은 1948년 대통령 비서실장 1949년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다. 프란체스카 도너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남편 이기붕을 자유당의 2인자로 만든 뒤에도 그는 궂은일을 도맡아하여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유지했다. 승진을 바라고 찾아오는 영관 장교와 장군들이 그의 집에 들어섰다. 또한 박마리아의 연인은 군 내부의 실세의 한 사람인 원용덕이었다. 박마리아는 남편을 자유당 정권의 2인자로 만든 것과 프란체스카의 각별한 신임, 한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원용덕 등의 배경을 통해 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기붕이 이범석을 몰아내고 제1공화국의 2인자로 부상하는 시점에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과대학 학장,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다. 문리대 학장과 YWCA 회장에는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이화여대 부총장에는 이기붕이 제3대 정ㆍ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1956년에 취임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박마리아의 권력의 힘으로 망우리공원에 묻힌 초허 김동명 시인의 날카로운 정치평론에도 탄압을 받지 않은 이유는 강릉이라는 동향 출신으로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조봉암 사형 선고 이후 이화여고 교복을 입고 박마리아 집을 찾아가 아버지의 사형을 면해달라는 조봉암의 딸 조호정 학생의 애원은 힘이 닿지 않았다.
박마리아는 이화여대 동문회의 회장이었고 이대 출신 친목단체인 ‘이수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군의 장군과 고위 관료들,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성공한 배경 없는 개천에서 난 용들과 이대 출신 여성들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승진을 바라는 군의 장군들은 박마리아에게 접근하려고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이수회’의 젊은 여성과 재혼을 급히 서두르는 일이 나타났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전면적인 관권 부정선거로 치러졌는데, 이때 박마리아가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이 동원되었다.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4·19 혁명을 불러와 곧 부정선거로 인한 부통령직을 박탈당하고 재선이 치뤄져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고 말았다.
4.19혁명 당시 서울에서 혁명에 참가하지 않던 몇 안 되는 예외의 하나가 이화여자대학교였다. 일부 이대의 여성주의 운동가들만이 시위대에 참여했다. 이를 두고 지난 2월 마지막 망명객으로 숨을 거둔 정경모는 ‘그것은 당시 박마리아가 이화여자대학에서 행사하고 있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거처인 서대문 경무대에 노호하는 군중이 몰려든 4월 25일 자정, 박마리아는 입은 옷 그대로 병약한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허둥지둥 뒷문으로 도망쳐 평소에 돌봐주면서 승진에 힘을 빌려주고 있던 육군 제6군단장(강영훈 중장)의 관사로 지프를 타고 달려가 보호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4월 26일 6군단장은 박마리아 일가에게 당장 물러가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도망쳐 달아날 곳도 없었다.
1960년 4월 28일, 결국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했다. 박마리아가 살던 집은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그가 쓴 책은 대부분 단종, 회수되어 소각되었다.
대단히 인색하고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부터 6.25 직후까지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던 박용만에 의하면 "굉장한 이기주의로, 퍽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다, 퍽 인색했었고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박용만에 의하면 박마리아는 남에게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주는 법이 없으면서도, 남이 주는 것은 주는 대로 받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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