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열사 서울법대 신입생
박동훈(朴東薰, 1941~1960)
망우리공원에서 4.19혁명에 참여한 열사들의 묘비를 찾아보면 필자가 현재까지 세 분으로 파악하고 있다. 1963년 9월 20일 국립 4.19민주묘로 이장한 박동훈 열사로 비문이 남아 있다. 만해 한용운 연보비 아래 숲 속에 세워져 있다. 두 분은 당시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군과 송촌 지석영 선생의 묘역 뒤 구리둘레길 제1길 길섶의 석축으로 쓰인 깨어버린 비석 조각으로 남아 있다.
망우리공원 (묘지번호 109617)
묘비 앞면: 朴東薰 墓 그는 正義와 情熱이 불타는 靑年으로 不正과 腐敗에 抗拒 우리나라 民主主義의 蘇生을 爲하여 一九六0. 四. 一九 그 先頭에 서다 享年 二0으로 이 곳에 자다 一九六0. 五. 八 立
묘비 뒷면: 여기 先人의 때묻은 역사일래 피 빛 가슴으로 해 따른 별 하나이 잠드노니 우리 그 앞에 民主의 힘친 기틀 세우리 薰의 영전에
국립 4.19민주묘지 1묘역 202배위
묘비 앞면: 서울大學校 朴東薰 墓
묘비 뒷면: 일구사일년 십이월 삼일 서울 출생(남) 서울대학법대 일년 재학 일구육0년 사월 십구일 경무대앞 시위 중 총상 같은날 국립의료원에서 사망 부 박찬희 모 김수정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학생들의 힘으로 이뤄낸 혁명이었다. 3.15 선거를 앞두고 있던 자유당 정권은 야당세가 강하던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이 지지세력을 모으지 못하도록 민주당 유세당일인 2월 28일(일요일), 학교 일선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도록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대구 각 지역의 고등학생 수백여 명은 가두시위에 나서는 등 자유당의 횡포에 저항했다. 경북고등학교의 선언문에는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라는 내용이 담겼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마산의거의 주역 역시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야당 참관인들을 퇴장시킨 채 공개적인 부정투표를 자행했고, 민주당 간부 30여 명은 마산 시내에서 의거를 감행했다.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고 오후 7시 경에는 만여 명이 모여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라고 외치며 시청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의거행렬에 총격을 가했고, 최루탄까지 발사했다. 그 결과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행방불명된 김주열의 시체가 4월 11일 중앙동 해안에서 발견되며 마산은 들끓어 올랐고, 제2차 마산의거에서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마산의거의 배후로 공산당을 지목하고 부정선거와 시민들의 사상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이승만의 행태는 결국 대학생들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대 학생들은 문리대 학생들의 주도 아래 4월 21일을 시위일자로 정하고, 15일부터 의견을 모아 선언문과 격문, 구호 등을 작성하는 등 준비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이 18일 오후 1시에 시위를 감행했고, 이에 맞춰 전체 시위 날짜도 19일로 앞당겨졌다. 19일 아침부터 자유당 정권에 분노해 쏟아져 나온 인파가 거리에 가득 한 상황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대오를 갖춰 국회의사당까지 평화행진을 한다는 계획은 무의미했다. 문리대를 비롯해 공대와 미대 등 각 단과대의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드높았고 분노로 들끓었던 4월 19일의 서울 거리는 결국 수백 명의 피로 뒤덮였고, 그 피는 자유당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박동훈 열사의 동생 박동수 씨는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을 등진 형님을 강직하고 속 깊은 ‘어른’으로 기억했다. 교사의 박봉으로 힘겹게 7남매를 키우던 집안에서 혼자 힘으로 법대에 진학한 박동훈 열사는 가족 전체의 자랑이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불의에 민감했던 열사는 경복고 3학년 재학시절 학생들을 불성실하게 지도하던 담임을 교체해달라고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경복고 교감으로 재직하던 열사의 아버지는 교장실에 불려가 “(박동훈 열사가) 빨갱이니까 집에 데려가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강단 있던 박동훈 열사는 1960년 4월에 입학한 후, 보름 남짓 대학생으로 살다가 영원히 잠들었다.
박동수 씨는 4월 19일 자정이 넘어 들린 어머니의 울음소리로 형의 죽음을 알았다. 열사의 아버지가 오후 4시경 서북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을 때까지, 가족 누구도 열사가 18일 고대생 시위에 동참했고 19일에도 광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전염병 전문병원이던 서북시립병원은 적당한 처치를 하지 못했고, 수도의과병원(현 고려대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나 수도의과병원에서는 수술 능력이 없다며 집도를 거부했다. 결국 8시가 넘어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박동훈 열사는 숨을 거뒀다.
열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애주가이던 열사의 아버지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 7남매 걱정에 금주를 결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이 남긴 공허함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4·19 혁명 1주기가 되던 날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통곡을 하고 돌아온 저녁부터 다시 술을 마셨다. 4·19 당시 15살이던 박동수 씨는 때때로 밥상에서 형의 밥그릇 하나가 없는 걸 볼 때 허전함을 느꼈다. 박 씨는 그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유신통치와 80년대 군사정권을 겪으며 ‘형은 바보야. 왜 죽었어. 뭐가 달라지냔 말이지’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뉴스 프리존, 2019-03-14, 유병수 기자)
박동훈 열사 옆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묘비와 관련해 이야기가 궁금해 찾아보고 있다.
앞면: 陸軍中尉朴東星之墓
뒷면: 女息 眞珠 西紀 一九六四年 三月 日 謹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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