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관동대지진 기록 한승인 흥사단

정종배 2021. 4. 20. 00:39

한승인 (韓昇寅)

단우번호 (260) 서훈

 

* 생존기간 : 1903.5.23~1990. 10.12 (87세 일기)

* 출생 :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230)

* 흥사단 입단일 : 1930.5.25 (서약일 12.25) 시카고

* 호 (용암) 미국이름(Warren Hahn)

* 종교 : 기독교 재림교회, 예수교 장로

* 학업 : 상업학, 영어, 일본어, 콜럼비아대학 마케팅전공 석사

* 취미 : 수영, 독서,

* 특기 사항 : 동우회 사건, 관동대지진 조난기, 민주화운동, 저술활동 등

* 단체 : YMCA. 한미협회

 

 

▢ 출생, 성장과 학업

한승인은 1903년 5월23일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아버지 한명식은 한학자였다. 그리고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7남매를 낳았다. 낳자마자 죽은 동생들도 있었지만, 한승인이 아홉 살 되던 해 장티푸스로 인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들이 사망했다. 1930년 흥사단입단 기록부에는 당시 형 한승오와 누이동생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승인은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재림교회(안식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굶어가면서 한승인을 진명소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다니던 중 수업료 10전이 없어서 애를 끓이다가 학교장을 찾아가 교장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 덕분에 한승인은 남은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아 소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안재림교회 선교사 하워드 리가 한승인의 가난한 처지를 알고 재림교회에서 운영하던 의명중학교에 입학시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승인은 그 보답으로 선교사의 집 가사일과 어린아이들의 글동무가 되어 돌보아 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15세의 한승인이 이렇게 중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1921년 한승인이 18세가 되던 해 4월, 남달리 성실하고 부지런한 한승인은 실력을 인정받아 하워드 리의 도움으로 일본메이지(明治)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한승인은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한승인은 지진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피난을 떠났다. 피난길에서 한승인은 이 지진의 여파로 재일조선인 7천여 명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승인은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을 1923년 9월 7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마침 이 기사를 읽었던 인촌 김성수는 한승인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한승인은 1925년 4월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 준비를 마친 후 1926년 10월 초에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1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한승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한승인은 호놀룰루 YMCA 한국 부총무인 이태성의 환대와 안내를 받았다. 하와이에서 동포들을 만나 일본의 만행을 고변하고 그들과 함께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한승인은 다시 하와이를 떠나 5일 만에 낯선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항구로 『신한민보』사장이며 흥사단 단우인 백일규가 마중을 나왔다. 그 날 저녁 흥사단 단우 양주은의 식당에서 환영 만찬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를 만났다. 이 무렵 도산 안창호가 1924년 11월에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가 1926년 5월에 상해로 떠난 후여서 한승인은 도산 안창호를 6개월 차이로 만나지는 못했다.

한승인은 이혜련 여사가 알선해 준 미국인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하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27년 9월에 미주리주립대학 상학부에 학사 편입하여 1년간 모든 과정을 마치고 1928년 8월 B.S.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시카고대학에 연구과정으로 들어갔다. 한승인은 이때 시카고대학 북미유학생총회의 오락분과위원장으로 봉사를 하기도 했다. 시카고대학을 다니면서 1930년 5월 25일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1930년 8월에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는 100여명의 한인동포들이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 유학생회 등 각종 애국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27세 청년 한승인은 뉴욕대학을 다니고 있던 김마리아와 정일형, 콜롬비아대학을 다니고 있던 오천석 등 흥사단 단우들을 만났다. 그리고 윤병구가 담임 목사로 있는 뉴욕한인교회에서 동포 30여명과 함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뉴욕한인교회에서 3.1운동 기념식, 8.29국치 참회일, 성탄절, 각종 친목 및 강연회가 열렸다. 한승인은 유학생회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1932년 8월, 한승인은 콜롬비아대학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M.S.(석사)학위를 받았다.

 

▢ 귀국, 수양동우회 사건

1933년, 30세가 된 한승인은 어렵게 공부한 학문을 고국에서 봉사하겠다는 일념에서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해서 1934년에 화신산업에 들어가 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1937년 6월 6일, 일본에 의해 동우회사건(일명 흥사단사건)이 날조되어 흥사단 단우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다. 일제는 장차 아시아 전체를 위성국화 할 야망으로 우선 조선을 먼저 완전 동화시키고자 하여 중국침략 1달 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흥사단 단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용설, 주요한 등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내 6월 28일에는 가석방 요양 중인 도산안창호를 재수감하고 수많은 단우들을 2차로 체포하였다. 그리고 8월 6일에 흥사단 해산명령을 내렸다. 화신산업에 중역으로 근무하던 한승인도 예외 없이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동우회 사건은 무려 4년간이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최종 전원 무죄판결이 났다. 이 사건의 과정에서 도산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순국하였다. 한승인은 이 사건으로 3개월 옥고를 치렀다.

한승인은 1941년에 다시 화신산업으로 복귀하여 근무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한승인은 미군정 당국에 발탁되어 상공부 상영국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공직을 그만두었으나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로 다시 재기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한승인은 1947년 흥사단 국내위원부 위원이었고 1948년에 흥사단 이사원으로 활동했다.

한승인은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수립이후 경제협력기구(ECA)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1950년 4월부터 한국무역사절단의 부의장 자격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동남아지역들을 방문하면서 무역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이 때 한승인은 뉴질랜드 오크랜드에서 영국민들이 주일에 한번 꼴로 버터를 절약해서 모국인 영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애국심에 깊이 공감하였다. 한승인은 홍콩으로 가서 한 달간 체류하는 중에 6.25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다. 한승인은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했다. 그리고 11월에 귀국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삼흥산업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연세대학에서 강사를 겸했다. 1953년 1월, 한승인은 매디슨 인터내셔널 회사의 한국지부 대표로 1959년 8월까지 일을 했다. 흥사단에서는 1958년부터 1961년 주불공사로 프랑스에 가기 이전까지 이사원이었다.

 

▢ 5.16이후 도미, 가발사업성공과 민주화운동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고 제2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한승인은 1961년 3월 14일 제2공화국으로부터 주불공사로 임명받고 근무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현지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도미했다. 한승인은 뉴욕 맨하탄 108번가에서 아파트를 구하고 새롭게 워렌한인터네셔날 회사를 차리고 가발사업을 시작했다. 워렌 한은 한승인의 미국이름이다. 한국에서 가발을 수입해 미국에 판매하는 사업은 인기 사업이었다. 한승인의 마케팅 전문실력이 사업의 번창을 가져왔다. 한승인은 그의 나이 60대는 사업 번창과 흥사단 활동 그리고 신앙생활로 바쁘게 흘러갔다. 1971년 12월 26일 한승인은 뉴욕한인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

1972년 10월 한국에서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고 종신제 대통령을 선포하자 미국 한인 사회는 이에 반대하는 적극적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때마침 1971년 제7대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은 지병 치료차 일본에 거주하다가 10월 유신으로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 유신 운동을 펼쳤다. 김대중이 뉴욕으로 왔을 때 가발사업을 같이 하던 박지원과 함께 환영준비와 환송준비 위원장으로 일했다. 김대중은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했을 때 한시대는 이에 호응하여 한민통국민연합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김대중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하던 중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소위 ‘김대중 납치사건'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4년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민주인사들을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국내에서는 7월 18일 한국기독교협의회(KNCC)를 중심으로 민주화를 위한 목요기도회가 실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한승인도 1975년 6월에 뉴욕에서 같은 성격의 목교기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한승인의 나이 72세로 이미 고령이었다. 이 때 뉴욕한인교회 지하실에서 목요기도회 발기에 참여한 인사들은 한승인을 비롯하여 임순만, 김윤철, 김홍준, 임병규, 유태영, 안중식, 서형석 등 10인이었다. 그 후 김정순, 박성모, 손명걸, 함성규, 임병규, 구춘회, 장한량, 김윤국, 이윤구, 김영철, 김마태, 김영묵, 박승증, 김찬국, 한완상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지방 목요기도회와 연합 수련회도 개최하였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삭발까지 감행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한승인은 1977년 4월 17일 뉴욕한인교회 장로 은퇴식을 갖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 저술활동

활동 일선에서 물러난 한승인은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사실 이전에도 한승인은 수많은 논문과 에세이를 써왔다. 1932년 월간지 『동광東光』7월~8월호에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에 ‘세계의 협동조합운동’에 관한 논문을 기고한 바 있으며, 『동광』9월~10월호에는 “영국의 협동조합”을,『동광』11월호에는 “독일협동조합운동”을 기고하였다. 이때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였다. 1956년에는 『새벽』5월호에 “정부와 산업”을 주제로 논문을 기고하였다. 이때는 메디슨인터내셔날 한국지부 대표로 있으면서 버크레이무역회사 사장으로 일할 때였다. 1973년에는 『기러기』10월~11호에 “일본관동 대지진조난기”를 그 때 일을 회고하면서 연속 기고하였고 후일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밖에도 한승인은 많은 글을 썼다. 특히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저술활동으로 바쁘고 건강한 나날을 보냈다. 그 첫 작품은 1978년 도산 안창호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저술한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였다. 한승인은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존경해 오던 도산의 교훈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열심히 살아왔다. 한승인은 동우회 사건 이전인 1935년 2월에 대전 감옥에서 가석방된 도산 안창호가 전국을 순례하고 9월에 서울 삼각동 중앙호텔에서 동지들에게 “지도자”론을 연설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당시 화신산업 중역으로 근무하던 한승인은 처음으로 도산을 직접 만났다. 도산을 회고하면서 쓴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는 비매품으로 흥사단 단우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리고 1979년 2월에 이 책을 정식 출판하고 뉴욕한인교회에서 출판 기념 예배를 드렸다.

본격적 저술활동은 이때 부터였다. 1980년에 268페이지에 달하는 『미국 유학 시절의 회고』를 발간하였고, 1983년에는 그가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끔직한 사건을 회고하여 181페이지에 달하는 『동경지진 한인대학살』을 출판했다.

1983년 7월 7일, 뉴욕 스토니 포인트에 있는 미국장로교 수양관에서 한승인의 80회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이 때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200여명이 이 잔치에 모였다. 한승인은 1984년에 213페이지에 달하는 『독재자 이승만』을 출판했고, 같은 해에 262페이지에 달하는 『황혼에 새벽을 기리다』를 출판했다. 1986년에는 236쪽에 해당하는 분량의 저서 『민주주의의 봄』을 출판했고, 1988년에는 332쪽에 해당하는 분량의 저서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출판하였다. 한승인은 이렇게 80대를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87년 한국에서 독재정권 제5공화국을 타도하는 6월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때 뉴욕에서 고령을 이끌고 민주화추진 뉴욕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승인의 이 같은 불꽃같은 삶의 배경에는 기독교 정신과 흥사단의 정신이 기초가 되었다. 한승인은 생애 말년에 고국의 분단을 한탄하며 “조국의 통일을 하루속히 이루어 고향땅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늘 기도하였다. 한승인은 1990년 10월 12일에 노환으로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뉴욕시 자택에서 이뤄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방인도여사와 4남매가 있다. 1930년 흥사단 입단 시 자필 기록에 의하면, 부인 방인도는 36세(1894~)이며, 장녀 효선이 13세(1917~), 차녀 효진이 12세(1918~) 그리고 장남 효건이 6세(1924~)로 기록되어 있다. “끝”

 

 

참고자료 :

 

- 흥사단 단우 기록부

-『동광』7,8,9,10,11월호 1932년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 한승인

-『새벽』5월호, 1956 “정부와 산업” 한승인

-『기러기』10,11 1973 “일본관동 대지진조난기” 한승인

- 『기러기』1988.1 “도산과 백범과 매헌의 민족혼” 한승인

- 『도산안창호 전집』11권 전기편,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 검색사이트> 한국장로신문 > “미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한승인 장로” 2010.11.20 김수진 목사

- 검색사이트> 수도원교회>『산학산책』“한승인” 재미 윤사무엘 교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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