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지사 라우 / 정종배
5월 22일 토요일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마무리 보충 답사
산삼 찾는 심마니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2시간 헤매다
드디어 오후 3시 솔밭약수터 50m 아래 북서쪽 100m 좁고 그늘진 유택을 참배했다
독립지사 나우(羅愚, 1884~1960.12.24.) 평남 용강 출신. 흥사단 단우 번호222 유택 확인 본명은 나순응이다
대한민국 최초 독립선언인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39인 외 나우(羅愚), 정안립(鄭安立), 정신(鄭信), 서상용(徐相庸), 서일(徐一), 신팔균(申八均) 등 6명은 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정으로 선언서에 누락되었거나 가명으로 연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6월 흥사단본부를 서울로 이전한 후 국내단우 중심으로 지도부를 재편하여, 5개지방회에 책임간부를 두었는데 나우 단우는 시흥 지역을 맡았다. 또한 1957년 심사부장(심사회장)을 맡았다.
도산이 떠난 후 명칭을 원동지방위원회(1935), 원동위원부(1944)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는 홍재형(洪在馨), 조원창, 나우(羅愚), 유진동(劉振東), 김립, 허상련 등이 서무·재무·심사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에서 국장급 이하의 직위를 가지고 근무한 단우 현황을 부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내무부에서 김구(경무국장), 나우(참사, 1920.6.25~ ), 문명훤(서기) 외에 전재순·차균상(경호원), 외무부에서는 이탁(동삼성 외교위원부위원장), 오덕연(외교위원), 김붕준(주월駐粤 대표), 한시대(주미외교위원), 양우조(외교연구위원) 등이다.
한국국민당은 『한민』·『한청』·『전선(戰線)』·『전고(戰鼓)』 등의 기관지를 통해 ‘순수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혁명적 이론’을 고취하고, 무장독립운동론, 한중연합항일전선의 결성 등을 선전하였다. 김구는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학생훈련소의 청년대원들을 청년단으로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보수적인 노장년층 중심의 한국국민당 분위기를 쇄신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청년단은 1936년 7월 10일 창립선언문에서 “과거 40여년간 일관된 정신으로서 혁명운동에 분투·노력해 온 백범 김구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손과 발이 되어 그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할” 것이라고 했고, 강령에서 “한국국민당의 핵심이 되어 전위적 임무를 충실히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전위를 자임한 것이다. 한국국민당의 활동은 주로 항일특무에 집중되었다. 창당 직후인 1935년 12월 국민당정부로부터 특수공작에 투입할 청년 20~30명의 선발을 명령받는 등 국민당정부 기관과 함께 항일공작 전개였다. 중일전쟁 직후에는 본부를 난징에 설치해 조사·행동·특무·교통·연락부로 조직을 재정비하였고, 상하이 프랑스조계 호산로에 지부를 설치해 조상섭과 나우(羅愚)를 책임자로 파견하기도 했다. 한국국민당은 국민당정부의 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연계했으며, 상하이 지부의 경우 상호연락체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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