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조선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선생

정종배 2021. 6. 27. 13:16

이나마 위 글들을 참고하여 선생의 약력을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906년 광주 출생

1924년경(18)부터 도쿄대 식물학 강사로 연구하던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선생에게 사사

? - ?동경원예학교 연구과 입학(졸업)

? - ?이리농림학교 졸업

1928(22)동경원예학교 고등조원학과 3년 졸업

? - ?조선일보 문화부, 숭실전문학교, 경성약전 식물학교실(도봉섭),동경제대 연구실(이시도야)등에서 연구

1933(27) 거금 2만원을 들여10여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점의 식물석엽표본을 연희전문학교

에 기증 (1년만에 정리)

"이만원(二萬圓)의 거비(巨費)와 십개년의 적공(積功)"

식물표본 칠천여조

<광주장씨로부터 연전에 기부>

동양일(東洋一)의 표본실 창설

[광주] 곡성의 정씨 문중에서 만권의 한서적을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다는 사실은 세상의 긔억에 아즉도

새로운 바이려니와 광주읍 대정정(光州邑 大正町) 사는 장형두(張亨斗)씨는 2만여원의 거대한 자금을 들여가면서

10개년이란 긴 세월을 전심력을 기울여 수집연구하야 오던 식물표본 7천여종을 또한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

다고 한다.

그런데 표본으로 말하면 우리 조선에서는 물론이오 전동양에서 별로 어더보기 어려운 진귀한 조선의 보물이라

는바 이것을 완성하기까지에 장형두씨는 그 가정에 반역자가 되엇슴은 물론 전 가산을 탕진하얏슬뿐외라 험한

산과 거치러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길 번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물은 벌서 장형두씨의 손에서 연희전문학교 수리과장(數理科長) 리춘호(李春昊)씨를 통하야 완전히

접수되엇다는데 장형두씨는 그것을 정리하야 주기 위하야 불일간에 상경하리라는바 그것을 정리하뉴면 장씨

자신이 그 방면에 상당한 소양이 잇는 사람 5, 6명을 데리고 불철주야로 3개월 동안은 걸리리라고 한다.

장형두씨 경력

그런데 장형두씨는 방금 27세의 청년인바 일즉이 어렷슬때부터 이 방면에 뜻을 가지고 18세 되던 해에 동경에

건너가서 동경제대 강사로 전일본식물학계의 태두인 목야부태랑(牧野富太郞) 선생에게서 분수학(分數學) 연구

의 지휘를 바더가지고 동경원예학교 연구과(東京園藝學校 硏究科)를 마치고는 다시 동경고등조원(東京高等

造園)을 소화 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얏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 건너와서 경성제대(京城帝大) 강사 석호곡(石戶谷) 선생의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잇섯는바 지금

에는 연구비의 조달이 극히 곤난하야서 고향인 광주에 도라와 있는 터다.

장형두씨담(張亨斗氏談)

저는 원래 누구에게 치하를 밧고 십거나 자아를 선전하기 위하야 긔부한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알으시고

차저주신데 대하야 사실을 숨기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아프로 일이 내 뜻과 가티 되기만 한다고 하면 연전(延專)

에다가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만드러 볼가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조선에서는

아즉까지도 이 방면에 리해를 가지고 잇는 이가 별로 만치 못한 것이 큰 유감인 동시에 외국 사람에 대하야서는

퍽 부끄러운 노릇이나 아프로는 점점 이 방면의 사람이 생겨날 줄 밋습니다. 저는 평생을 여긔에 마칠 작정입니

. 운운.

1933년 연전식물표본 정리 완료

"연전식물표본 정리완료"

청년식물학자 장형두씨로부터 기증된 식물표본 수천점은 일개성상을 걸려 학리에 근거를 둔 분류적 정리가 일단락을

찾어 교내 명물의 하나가 되엇다하며 체경중(滯京中)이던 장형두씨는 신포부를 가지고 근일중 채집차로 남조선을

향하여 떠나리라 한다.

19335'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

19342'경성식물회' 창립(조선향토식물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도와 애호가들이 참여)

장형두와 박만규(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

시험을 통과)가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이 열렬히 활동.

19353월 경성식물회는 '조선식물연구회'로 개칭

1935년 조선식물연구회 <조선향토식물> 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평양식물지(平壤植物誌), p.25-42', 조선식물소보(朝鮮植物小報), p.43-54'

<조선향토식물>1937년 제2호까지 발간한 것으로 보임(서지 사항만 존재).

이미지 출처: 서효원 박사 칼럼에서 재인용

1936(86)사학자 유홍렬, 동물학자 조복성, 조류학자 원홍구, 나비학자 석주명 등등 각계의 권위자들로 구성된

백두산대탐사에 참여

1938년 전남산림회 기관지 '청구(靑邱)''전라남도 수목의 종류와 분포지' 논문 기고

1940년 조선산림회보에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1)' (186, 9월호)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2)'(188,

11월호)연재(전의식 선생님이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한글로번역한 자료가 선생님 블로그에 담겨 있다.)

http://blog.daum.net/kplant1/7903500

1940년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 연구.출판 직전에 의견차이로 탈퇴.

? - ? 성대강사, 서울중학교 교유(敎諭)

1948(단기4281) 91일자로 국립 서울대학교 부교수에 임명(사범대학)

1949년 학생 조선식물도보(朝鮮植物圖譜) 발간(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

3판까지는 '학생 조선식물도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고, 4판에서는 '학생 식물도보"로 발간한 것으로 추정.

식물을 완전 한글로 '묻사리'로 표현한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19491023일 좌익 연루로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사

 

1906년 광주 출생

1924년경(18)부터 도쿄대 식물학 강사로 연구하던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선생에게 사사

? - ?동경원예학교 연구과 입학(졸업)

? - ?이리농림학교 졸업

1928(22)동경원예학교 고등조원학과 3년 졸업

? - ?조선일보 문화부, 숭실전문학교, 경성약전 식물학교실(도봉섭),동경제대 연구실(이시도야)등에서 연구

1933(27) 거금 2만원을 들여10여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점의 식물석엽표본을 연희전문학교

에 기증 (1년만에 정리)

"이만원(二萬圓)의 거비(巨費)와 십개년의 적공(積功)"

식물표본 칠천여조

<광주장씨로부터 연전에 기부>

동양일(東洋一)의 표본실 창설

[광주] 곡성의 정씨 문중에서 만권의 한서적을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다는 사실은 세상의 긔억에 아즉도

새로운 바이려니와 광주읍 대정정(光州邑 大正町) 사는 장형두(張亨斗)씨는 2만여원의 거대한 자금을 들여가면서

10개년이란 긴 세월을 전심력을 기울여 수집연구하야 오던 식물표본 7천여종을 또한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

다고 한다.

그런데 표본으로 말하면 우리 조선에서는 물론이오 전동양에서 별로 어더보기 어려운 진귀한 조선의 보물이라

는바 이것을 완성하기까지에 장형두씨는 그 가정에 반역자가 되엇슴은 물론 전 가산을 탕진하얏슬뿐외라 험한

산과 거치러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길 번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물은 벌서 장형두씨의 손에서 연희전문학교 수리과장(數理科長) 리춘호(李春昊)씨를 통하야 완전히

접수되엇다는데 장형두씨는 그것을 정리하야 주기 위하야 불일간에 상경하리라는바 그것을 정리하뉴면 장씨

자신이 그 방면에 상당한 소양이 잇는 사람 5, 6명을 데리고 불철주야로 3개월 동안은 걸리리라고 한다.

장형두씨 경력

그런데 장형두씨는 방금 27세의 청년인바 일즉이 어렷슬때부터 이 방면에 뜻을 가지고 18세 되던 해에 동경에

건너가서 동경제대 강사로 전일본식물학계의 태두인 목야부태랑(牧野富太郞) 선생에게서 분수학(分數學) 연구

의 지휘를 바더가지고 동경원예학교 연구과(東京園藝學校 硏究科)를 마치고는 다시 동경고등조원(東京高等

造園)을 소화 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얏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 건너와서 경성제대(京城帝大) 강사 석호곡(石戶谷) 선생의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잇섯는바 지금

에는 연구비의 조달이 극히 곤난하야서 고향인 광주에 도라와 있는 터다.

장형두씨담(張亨斗氏談)

저는 원래 누구에게 치하를 밧고 십거나 자아를 선전하기 위하야 긔부한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알으시고

차저주신데 대하야 사실을 숨기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아프로 일이 내 뜻과 가티 되기만 한다고 하면 연전(延專)

에다가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만드러 볼가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조선에서는

아즉까지도 이 방면에 리해를 가지고 잇는 이가 별로 만치 못한 것이 큰 유감인 동시에 외국 사람에 대하야서는

퍽 부끄러운 노릇이나 아프로는 점점 이 방면의 사람이 생겨날 줄 밋습니다. 저는 평생을 여긔에 마칠 작정입니

. 운운.

1933년 연전식물표본 정리 완료

"연전식물표본 정리완료"

청년식물학자 장형두씨로부터 기증된 식물표본 수천점은 일개성상을 걸려 학리에 근거를 둔 분류적 정리가 일단락을

찾어 교내 명물의 하나가 되엇다하며 체경중(滯京中)이던 장형두씨는 신포부를 가지고 근일중 채집차로 남조선을

향하여 떠나리라 한다.

19335'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

19342'경성식물회' 창립(조선향토식물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도와 애호가들이 참여)

장형두와 박만규(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

시험을 통과)가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이 열렬히 활동.

19353월 경성식물회는 '조선식물연구회'로 개칭

1935년 조선식물연구회 <조선향토식물> 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평양식물지(平壤植物誌), p.25-42', 조선식물소보(朝鮮植物小報), p.43-54'

<조선향토식물>1937년 제2호까지 발간한 것으로 보임(서지 사항만 존재).

이미지 출처: 서효원 박사 칼럼에서 재인용

1936(86)사학자 유홍렬, 동물학자 조복성, 조류학자 원홍구, 나비학자 석주명 등등 각계의 권위자들로 구성된

백두산대탐사에 참여

1938년 전남산림회 기관지 '청구(靑邱)''전라남도 수목의 종류와 분포지' 논문 기고

1940년 조선산림회보에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1)' (186, 9월호)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2)'(188,

11월호)연재(전의식 선생님이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한글로번역한 자료가 선생님 블로그에 담겨 있다.)

http://blog.daum.net/kplant1/7903500

1940년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 연구.출판 직전에 의견차이로 탈퇴.

? - ? 성대강사, 서울중학교 교유(敎諭)

1948(단기4281) 91일자로 국립 서울대학교 부교수에 임명(사범대학)

1949년 학생 조선식물도보(朝鮮植物圖譜) 발간(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

3판까지는 '학생 조선식물도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고, 4판에서는 '학생 식물도보"로 발간한 것으로 추정.

식물을 완전 한글로 '묻사리'로 표현한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19491023일 좌익 연루로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