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은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
장형두(張亨斗, 1906~1949)
조선일보 주최 백두산탐험대 아래 줄 왼쪽 다섯 번째 장형두
1949년 10월 26일 제헌국회 제5회 국회임시회의, 조선어학회 관련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와 성북동 길상사를 시주한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가 진향이란 기생으로 함흥 형무소에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고, 김영한 여사 일본 유학을 도왔다는 흥사단 단우인 신현모 의원이 발의한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의 속기록 일부다.
"장형두씨로 말하면 본래 전남 광주 사람으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학자입니다. 그이로 말하면 식물연구를 한 20년 동안이나 하고 자기 추수 2,000석이나 되는 재산을 다 없애고, 백두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으로 돌아당기면서 식물을 수집해서 표본을 맨들고 장차 사범대학에 식물표본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맨들겠다고 그런 포부를 가지고 지금 사범대학 부설중학 조고만 강실(講室)을 하나 빌려 가지구서 거기서 자기 부인과 어린 자제와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을 터입니다."
1949년 10월 21일 좌익으로 몰리던 동생에 대한 연루 혐의?로 서울 중부서에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3일만인 23일에 고문치사에 의해, 조선의 유일한 권위자로 천재적인 식물(분류)학자를 어이없이 잃어버렸다. 1906년 광주광역시 누문동 119번지 출생으로서, 12살 때 도쿄원예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부립원예학교에서 전학한 이리농림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1928년 졸업했다. 1920년경부터 동경제국대학 식물학 강사로서 일본 식물연구의 개척자인 마키노 도미타로오 선생에게 사사하고, 식물 공부에 정진하여, 그가 주최한 "일본전국식물명찾기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한 영재였다. 관동대지진으로 1923년에 급거 귀국하여 이리농림학교에 전학했다. 조선일보 문화부·숭실전문학교·성대 강사·서울중·서울대 사범대 등에도 근무하였다. 1933년 거금 2만원을 들여 10여 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 점의 표본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하여 1년 만에 정리했다. 애제자인 이영노 선생이 1964년 신종으로 명명한 '장억새'의 '장'은 바로 '장형두' 선생님이다.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하고, 1934년 2월 '경성식물회' 창립하여 조선향토식물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생과 애호가들이 참여했다. 장형두와 박만규는 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경성식물회를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 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 등과 열렬히 활동했다. 장형두는 1935년 3월 '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경성식물회’를 개칭하며 '조선식물학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조선향토식물> 제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수록했다. ’조선식물학연구회‘는 당시 우리나라 생물교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활동의 폭은 넓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분야의 초석이 되었던 학회로 해방 이후 ’한국생물학회‘를 거쳐 ’한국식물학회‘와 ’동물학회‘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식물향명집』과 『조선식물명집』 발간 등 향토생물에 연구에 집중하던 이 학회의 정기간행물이 없었다.
장형두는 전국의 수많은 식물표본을 수집하며 이전 일부 우리나라 식물에 대한 '나카이'의 연구결과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1940년 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연구하였으나 출판 직전에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 장형두 선생은 '일본과 맞짱 뜬 식물학자', "조선 식물상은 조선인 손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민족주의자로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48년 9월 1일 국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에 임용됐다. 1949년 학생 조선식물도보 발간(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했다. 장지는 망우리공동묘지였다. 묘지는 2019년 서거 70년만에 단장했다. 묘지번호 201271이다. 2020년 광주MBC 8.15특집다큐 ’장형두와 우리 묻사리’가 방영되었다. 둘째 아들 장득성씨와 손을 잡고 조선 천재 식물학자 장형두의 피맺힌 신원을 풀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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