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영화 1인자 영화는 흥행했으나 제작자와 갈등 자살
노필(盧泌, 1928~1966)
노필은 192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노필은 한국전쟁 이전 1949년 약관의 나이로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하였다. 데뷔작 <안창남비행사>(1949)는 비행사 안창남의 전기를 다룬 영화로 일제강점기 천재 비행사였던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 안창남은 암울한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날며 독립의 의지를 굳혔던 조선 청년으로 독립군의 숨은 조력자였다. 공군 항공대의 제작 후원을 받아 제작된 영화는 안창남이 고난 끝에 일본인을 누르고 비행사가 되어 민족의 울분을 달래고, 해방 후에는 항공개발에 앞장선다는 내용의 전기 영화였다.
1930년 4월 중국의 산시 항공학교에서 안창남이 타고 있던 비행기는 이륙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추락해서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노필은 공군 항공대의 제작 후원을 받아 갑작스러운 비행기 추락사로 일생을 마감한 안창남 비행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해방 조국의 민중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노필은 일찍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했으나 10여 년이 넘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 1950년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노필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이민, 이빈화, 김신재 주연의 <그 밤이 다시 오면>(1958)이었다. 노필의 세 번째 영화는 <꿈은 사라지고>(1959)였다. 그는 계속해서 1964년부터는 멜로드라마를 일 년에 한 편씩 연출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빗나간 청춘>(1964), <검은 상처의 부르스>(1964), <애수의 밤>(1965), <밤하늘의 부르스>(1966)와 같은 작품들이 있다. 노필은 <밤하늘의 부루스>(1966)를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그만두었다.
노필은 1949년 데뷔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충무로에서 활동하면서 영화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음악영화의 1인자였다. 더욱이 그가 만들었던 멜로드라마는 관객들을 위로해주기 충분했고, 우리는 아직도 그런 그를 기억하고 있다.
영화감독 노필이 묘지는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우측 오르막길 장덕수 연보비를 지나 오르막 끝나는 곳 좌측 동락정 정자를 돌아 사잇길이 나온다. 그 길을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길을 선택해 가면 곧바로 오른쪽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영화감독 노필의 유택이다. 향은 남서향이다. 묘비는 자연석이 아닌 시멘트로 빚은 위가 둥근 선에 가운데가 둥글게 봉긋 솟은 모양이다. 묘비 앞면에 한자로 映畵監督(영화감독) 交河盧公泌之墓(교하노공필지묘) 뒷면에는 자식들의 이름, 옆면 좌측에 한국영화인 일동, 우측 서기 1966년 7월 29일이라 새겨져 있다. 봉분과 묘역은 크지 않고 조그맣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기에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하고 수풀이 우거져 안타깝다.
노필은 서울 화동에서 부잣집 4대 독자로 태어나 경기중학교 졸업하고 연세대 국문과를 재학 중에 <안창남 비행사>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음악영화의 1인자로 <밤하늘의 부르스>가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제작자와의 갈등을 빚었다. 1966년 7월 29일 새벽 삼청공원에서 목을 매, 집 한 채라도 남기겠다는 가장의 쓰라린 주검은 영화 연출하듯 흉하지 않게 발견됐다. 다음날 오후 흐린 하늘에서 내리는 부슬비 속에 망우리공동묘지(묘지번호 204942)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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