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1920년대 빈궁문학으로 남한 북한 중국 소련 등 교과서에 수록된 작가 서해 최학송

정종배 2021. 9. 10. 02:34

1920년대 빈궁문학으로 남한 북한 중국 소련 등 교과서에 수록된 작가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7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외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 회장(해사 2)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과 택()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토혈」 「고국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1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7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고국(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2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1일부터 9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11일 장남 백()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5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8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기자로 근무했다. 1929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5월 창작집 홍염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54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9일 오전 4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결성. 9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다음 달에 이어짐

창조문예 2021년 9월호 제 296호에 수록

서해 최학송 추모제 현수막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사진 자전거에 앉은 어린이는 서해의 큰 아들 최백

전남 영광 출신 시조 시인 조운과 서해 최학송(서해의 아내 조분녀는 조운의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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