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수암 최백근 선생 60주기

정종배 2021. 12. 21. 14:43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5.16 군사쿠데타 사형 집행 미복권
수암 최백근(崔百根, 1914~1961) 선생 60주기

망우리는 논어의 술이편에 “발분망식 낙이망우(發憤忘食 樂而忘憂), 배움에 열중하여 밥 먹는 것도 잃을 정도로 즐거워 근심 걱정을 잊고 사는 동네”라 일컬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망우리에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신후지지 자리를 정하고 건원릉 조성하며 동래 정씨 집성촌 ‘능말’이 들어섰다. 태조가 망우리고개를 넘어 마신 샘물이 양원샘이다. 600년 넘은 집성촌이 기와집 한 채도 남지 않고 행복주택 아파트로 우뚝 솟아 버렸다. 주민들의 생명을 이어간 양원샘은 주택 담장 아래 숨어 있다, 건너편 아파트 공사로 땅을 파내 이제는 샘물마저 말라 버렸다.

1760년(영조 36)에 한성 동부 망우리의 역사와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지리서인 망우동지(忘憂洞誌)가 발간되었다. 이제 겨우 중앙선 전철역 양원역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인물 중에 이념에 갇혀 복권되지 않은 분은 수암 최백근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지사였다. 남과 북 이념 대립에 월북하여 남파 간첩 검거되어 형을 살았다. 통일 운동 앞머리에 온몸을 던져 힘을 쏟다,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사형을 당하였다. 미복권으로 망우리 북향 그늘진 자리를 지키다, 마석민주열사 묘역에 동지들이 이장했다. 묘비를 어느 누가 쳐버려 이름만 겨우 읽을 수 있다. 아직도 이념에 앞에 종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시 중랑구에서 망우리고개 너머 구리시 교문동 딸기원 마을 오른쪽 상덕마을 구리시장애인복지센터 건물 뒤 산자락에 북향으로, 독립지사 및 통일운동가 최백근 선생의 유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장애인복지센터 자리는 옛 간이화장터였다.

묘비 앞면, 최백근 선생의 묘 1961.12.21. 졸 1962.12.20. 가장 1963.4.14. 옮김
묘비 뒷면,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이 사람을 수탈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분단된 나라가 자주 민주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선생의 높고 참된 뜻은 이룩되고야 말 것입니다.

최백근 선생의 어록을 새긴 비문은 조국분단과 남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눈보라를 이기고 굳건하게 서 있었다.
평화세상·평등세상·통일조국을 원하던 서릿발 같은 민족 투사는 5.16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유린하며 들어선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이날엔 당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의 사형 집행에 의해 모두 5명의 인사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백근 선생의 유골은 조계사에 봉안되었다 망우리에 묻혔다.

이승만 정권에서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곽영주 전 경무대 경무관,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 ‘정치 깡패’ 임화수, 그리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과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 등이 그들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이 집형된 최백근 선생의 매년 추모행사는 민중들의 한을 담은 눈발이 날리고 꽁꽁 언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억압과 착취, 수탈, 전쟁, 분단, 사대, 매국, 배족, 부정, 부패, 군사독재를 거부하는 하는 것이 죄가 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최백근 선생의 그 넋은 아직도 사면받지 못한 채 구리시 공동묘지 한적한 곳에 씁쓸하게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백근 선생의 추모식에 참여한 인사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구호에 민족자주성과 반외세가 빠졌다면서 최백근 선생이 그 구호 앞에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를 넣었다고 한다.

2018년 12월 21일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최백근 57주기 묘역 참배 행사가 열렸다. 2018 4월 11일 망우리 묘역에서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으로 이장한 후 처음으로 추모행사가 열렸다. 민족의 하나 됨을 바라셨던 선생의 그 절절한 염원 풀지 못하고 분단 72년의 세월을 이어가야 하는 오늘의 분통한 현실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픈 오한을 느꼈다.
올해는 12월 18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최백근 선생과 함께 활동한 생존 사회당 김영옥, 황금수 선생과 사월혁명회 범민련 남측본부 양심수후원회 4.9통일평화재단 중심으로 약식 추모식을 치렸다.
오는 12월 22일 오후 6시 수암 최백근 선생의 고향인 광양시 광양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광양의 항일·통일운동가 최백근 선생 기일 추모제”를 ‘최백근선생 명예회복위원회 광양시민들’ 주최로 치를 예정이다.
수암 최백근 선생은 1914 전남 광양군 골약면 태인리(태안도)에서 태어나 1930년 하동 보통학교 졸업했다. 1932년 4월 27일 출판법 위반혐의로 부산지법, 진주지원에서 금고 6월 선고(항일운동 관련)받고 투옥되었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대표단으로 참가했다.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 개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 9월 초 돌아왔다. 1949년 4월 북으로 가 재북 근로인민당 당무부장 역임하고. 6.25전쟁 시기 남으로 내려와 충북 청원, 충남 청양 등지에서 활동하다 9.28 이후 북으로 갔다. 1952년 9월 자주통일운동을 위해 남으로 내려와 강화도, 인천,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다 1952년 12월 경찰에 체포되어 1953년 9월 14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2년형 선고받고 대구, 춘천형무소 등에서 복역하고 1955년 9월 14일 만기 출소 후 1960년 5월 혁신동지총연맹에 가입 후 중앙조직부장 맡았다.

1960년 7월 29일 민·참의원선거 때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전남 광양에서 출마. 1960년 11월 최근우·유병묵·유한종·문희중·김영옥·진병호·이석준 등 동지들과 함께 사회당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1년 2월 16일 서울시청 앞 광장 한미경제협정반대 성토대회·가두지휘 등 조직했다. 1961년 2월 25일 종로 천도교 대강당에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결성대회(중앙상무위원) 주도했다.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광장 2대 악법(반공임시특별법, 데모규제법안) 제정성토대회 조직사업(30,000여 군중)과 이어서 1961년 5월 10일 남산예식장에서 민자통 서울시협의회 결성대회 조직사업을 이루었다. 19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추진궐기대회 조직사업(45,000여 군중. 행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혁신정당, 사회단체 대탄압으로 6월 5일 쿠데타 집단에 체포되어 9월 14일 쿠데타 세력의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적용(국가보안법 1조 규정 등, 현행 국보법 3조 4조 등) 사형 언도하여 1961월 12월 21일 박정희 집단에 의해 사법살인 당했다.

통일열사 최백근 선생의 묘에는 석영 안석주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읊조리며 열사 앞에 선 가슴에는 민족통일 의지가 다져진다. 북녘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최백근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북한은 최백근을 남조선혁명 조직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최백근은 북한에서 공화국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전직 대남공작요원들의 전언에 의하면 김일성이 말년에 회고록을 쓰면서 과거에 자신과 특별한 연고를 맺고 있었던 인물이나 유가족들을 찾아 만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대남공작과 관련된 유가족은 성시백, 박정호, 이현상, 그리고 최백근 등 네 가족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최백근이 평범한 공작원이 아니라 대남공작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 성시백과 박정호, 그리고 지리산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당히 비중 있는 남파공작원, 거물간첩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수암 최백근 묘지를 찾아 참배하며 남과 북 관계에서 아까운 인물들이 이념 대립의 희생물로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현실이 안타까웠다. 간간이 들려오는 추모식 그것도 공개적인 행사가 아닌 비공식이었다. 몇몇 옛 동지들은 이제 세상을 등지고 제2,3세대들의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신문을 통해 수암 최백근 묘지가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자는 안타까워 이장 전 묘역을 다시 찾았다. 묘비를 세워두고 갔는데, 묘비를 누가 가격하여 거의 반 이상 산산조각이나 최백근 이름만 그래도 읽을 수 있게 남았다.

이념을 떠나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묘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후학들이 이곳을 성역화 하여 새 이념의 못자리가 된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저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이제는 제발 그 이념과 계층 지역 그리고 분노와 무지 막무가내 떼쓰는 일은 그만두길 바란다. 망우리공원은 의병과 관군, 친일과 독립운동, 이념 대립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선 정치인과 예술인, 독재정권, 산업화 과정에서의 희생자 등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150여 년의 파노라마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늦기 전에 전수조사와 현장 보존 그리고 자료 모으기 등 유족들과 연락하여 없애기 전에 귀한 흔적들을 ‘중랑망우역사관’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앞당겨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