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상해임시정부 보안책임자이며 아들 나성돈과 2대 독립운동가
별산(鱉山) 나우(羅愚, 1885~1960.12.24) 61주기
2021년 5월 22일 토요일 중랑구청 발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마무리 보충 답사를 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과 둘이서 산삼 찾는 심마니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망우산 능선을 2시간 넘게 헤매다 오후 3시 솔밭약수터 아래 북서쪽 100여미터 지점 좁고 그늘진 독립운동가 나우 유택을 확인하여 참배했다.
우선 먼저 묘지번호 203918를 확인하였다. 묘비는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빗돌이 하얗고 글씨가 희미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鱉山羅州羅公愚之墓(별산나주나공우지묘)를 확인하였다.
독립지사 나우 선생의 묘지가 망우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난 4월 19일 국립4.19민주묘지를 장훈고 제자 강남욱 군과 함께 참배하며 알았다. 망우리에 묻혔다 이장한 4.19혁명 열사인 진영숙, 이종량, 전한승, 박동훈 등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특히 박동훈 열사 가족들을 만나 망우리공원 박동훈 열사 묘비 옆에 세웠다 사라진 박동성 비석과 유족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박동훈 열사는 물론 어느 한 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으나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흥사단 단우로 국립4.19민주묘지에 잠든 분들을 참배하는 흥사단 이사장 일행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망우리공원 관련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단우인 문명훤 유상규 김봉성 이영학 허연 조종완 등을 이야기하였다. 원로 단우 한 분이 나우, 김기만 두 분도 현재 망우리에 계신다고 말씀하였다. 묘지 위치를 물었으나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1970년대까지 참배를 다녔다고 말씀하였다.
독립운동가 나우는 아버지 나의진과 어머니 송씨 사이 평남 용강 출생이다. 용강예수교사범학교수업 후 예수교진명소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특기는 도화로 흥사단 단우 번호222이며 본명은 나순응이다.
대한민국 최초 독립선언인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39인 외 나우·정안립·정신·서상용·서일·신팔균 등 6명은 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정으로 선언서에 누락되었거나 가명으로 연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10만여 명의 대종교인이 순국하였다. 독립운동사에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최초 독립선언인 대한(무오)독립선언 39인 중 30여명이 대종교인이다.
망우리와 관련된 대종교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한 남파 박찬익, 종두법의 지석영, 고종황제 인산일 망우리고개 27인 결사대를 주도한 동우 이탁, 한글학자 주산 신명균, 나우 등이다.
임시정부에서 국장급 이하의 직위를 가지고 근무한 흥사단 단우 현황을 부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무부에서 특별단우인 김구(경무국장)와 나우(참사, 1920.6.25~ )·문명훤(서기) 외에 전재순·차균상(경호원), 외무부에서는 동우 이탁(동삼성 외교위원부위원장)·오덕연(외교위원)·김붕준(주월대표)·한시대(주미외교위원)·양우조(외교연구위원) 등이다. 도산이 떠난 후 명칭을 원동지방위원회(1935), 원동위원부(1944)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는 홍재형, 조원창, 나우, 유진동, 김립, 허상련 등이 서무·재무·심사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의 활동은 주로 항일특무에 집중되었다. 중일전쟁 직후에는 본부를 난징에 설치해 조사·행동·특무·교통·연락부로 조직을 재정비하였고, 상하이 프랑스조계 호산로에 지부를 설치해 조상섭과 나우를 책임자로 파견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흥사단본부를 서울로 이전한 후 국내 단우 중심으로 지도부를 재편하여, 5개지방회에 책임간부를 두었는데 나우 단우는 시흥 지역을 맡았다. 또한 1957년 심사부장(심사회장)을 맡았다. 지금까지 나우 독립지사가 국가보훈처 서훈을 받지 못한 까닭을 찾지 못했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임시정부 해체 관련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눠 논쟁이 일었다. 광복군단 나우는 개조파 일원으로 57인 연서한 ‘국호를 정하여 새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였다.(동아일보, 1923.6.25. 조선일보, 1923.6.26)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며 흥사단 단우가 되었다. 1924년 단우인 나우는 아들 김경근은 딸을 얻은 사실이 편지 내용에 들어 있다.
독립지사 나우 선생 관련 기사는 수해를 입어 어려운 고국을 돕기 위한 상해동포일동(상해임시수재구제회) 수재의연금 모금 69원 안에 나우 이름으로 1원 기부자에 들어 있다.(동아일보, 1925.9.25.)
1931년 상하이 흥사단 단우와 교포들이 경제합작운동 단체로 공평사를 조직하였다.
1939년 강직한 성격 소유자 선배 나우 씨로 신문에 소개되었다. 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선배 나 우 씨
씨는 용강 출생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의지가 견고하야 매사에 철두철미한 우리의 선구자이다. 26년 전에 향토를 떠나 서북간도, 아령, 해삼 등지를 경하야 래호 20년인 씨는 남매의 양육이 유일한 낙이라 한다. 영인전차회사 10년 간을 하로같이 근무하야 57세의 연령으로 청년 이상의 능률을 내는 열과 성을 합한 공명정대한 씨의 성격에는 “호랑이”이란 별명이 붙치어 잇다. 반도인으로써 신임을 총집중한 모범적인 선배이다.(동아일보, 1939.11.08.)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도산 안창호를 선두로 주요 인사 500여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 등 주요 인물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동우회는 해산되고 조직은 무너졌다. 전향 성명서가 발표된다. 이광수 주요한 등이 친일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놓고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광수 주요한 등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하여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문인보국회 등 각종 단체에 참여하였다. 내선일체를 외치고 지원병 참여를 독려했다. 주요한은 수양동우회를 대표하여 국방헌금을 이광수는 조선 병탄과 식민 지배의 일등공신 도쿠토미 소호의 양자가 되었다.
나우도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 성명서에 위원으로 서명하였다.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 일부를 소개한다.
(전략) 소화12년(1937년) 추에 조선에서 본단의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또한 흥사단 원동지부를 자진 해소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그릇된 사상을 일소 자각하고 대일본제국 신민인 것을 재 인식하며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여 오던 중 자금에 우단원 사상의 갱신과 그 단체가 명실이 완전 해소 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하는 바이다. 소화 15년(1940년) 7월 16일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 장덕로 위원 나우, 홍재형 반장 선우혁, 박규혁, 유정우 외 단우회일동
독립지사 장덕로 1990년 애국장, 선우혁 1962년 독립장, 유정우(유진동) 2007년 애국장 등 세 분 모두 임시정부 활동 계열로 추서하였다. 독립지사 나우 선생도 임시정부 활동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야 마땅하다.
나우의 둘째 아들 나성돈 독립운동가는 1924년 7월 4일 상해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나우는 임시정부 보안책임자였다. 나성돈은 20대에 부친에 이어 중국의 농촌인 ‘푸앙’에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제3지대 특수부대 일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의 해방을 위해 미국정부와 전략을 짜며 현 중앙정보부(CIA)의 원형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y Service)에서 파견된 직원에게 무전통신을 전수받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 주한미대사관 경제부문에서 근무하며 미국에서 해외원조로 곡식을 보내오면 수급 조절하는 책임지는 일을 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1960년대 초 미국에 이민하여, LA와 라스베이거스 등에서 사업을 했고 1974년에는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사했다. 부인 나주석과의 만남도 독립운동가 집안이 연결해준 특별한 결혼이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부인의 부친 김기만씨도 당시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과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을 했었고, 두 부친의 소개로 만남이 이뤄졌다. 평안남도 출신인 김기만씨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이웃집의 신고로 체포됐다. 나성돈의 2남 2녀 중 첫딸 나인숙씨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정현숙·박미라 등과 함께 금메달을 거머쥔 유명 스포츠 선수였다. 나성돈 독립지사는 2020년 6월 27일 미국 롱아일랜드 딕스힐에서 별세했다.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6묘역에 안장됐다.
흥사단 및 중랑구청에서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계신 사돈인 나우와 김기만 두 분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국가보훈처에 신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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