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독립지사 명산 김기만 65주기

정종배 2021. 12. 27. 08:54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상해임시정부 독립단 단원 및 흥사단 단우 142번
명산(明山) 김기만(金基萬, 1892~1956.12.27) 65주기

김기만의 본적은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한학리이다. 1902년까지 출생지에서 살았다가 1905년까지 인근의 진남포에서 거주한다. 그러다가 1907년이 되자 또다시 출생지인 한학리에서 거주한다. 이 무렵까지 주변에 있는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사숙에서의 수학기간은 약 10년(1897~1907)으로, 현재로 따지면 유아기(6세)에서부터 중학생(16세)까지로 볼 수 있다.​ 김기만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학업을 위해 경성에서 거주한다. 경성에 있는 협성학교에서 교육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만의 이력서에 따르면, 학업성취도는 보통 수준이라고 하였다.​

협성학교에서 수학한 김기만은 고향으로 돌아가 수렵활동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력서에 따르면, 김기만의 특기는 수렵이라고 한다. 총포를 잘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김기만은 3.1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18년부터 독립운동에 종사한다. ​

김기만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 등 독립지사와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하였다. 김기만의 종교는 예수교 장로회였기 때문에, 안창호 등 기독교 인사들과 더욱 어울릴 수 있었다. 이 인연은 훗날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활동까지 이어진다. 김기만은 상해에 있을 때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흥사단 단우번호 142번이다. 서약일은 1921년. 중국 원동위원부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19년 7월 경(7월 26일 기록)에 평안남도 지역에 연통제 특파원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 있다. 1922년 2월 16일 《동아일보》 기사에 상해 임시정부 독립단 단원으로 국내 잠입 숨겨준 사실이 발각된 용강군 사건에 김기만 단원도 국내에 잠입한 그의 이름도 보인다.

일본이 수사한 “안창호의 동정에 관한 건(제1188호, 1938. 3. 31.)”에 따르면, 일본은 김기만이 안창호에게 금전을 제공하였다는 의심을 하였다. 실제로 김기만은 독립자금을 꾸준히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우회 공함 제3회(1931.9.1.)” 자료에 따르면 김기만은 15원을 보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김기만의 활동이 “동우회 공함”에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1931년 무렵 김기만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된다. ​

봉화중학 정문 지나 평산 신씨 전첨공파 신립 장군 문중 묘역과 선산 울타리를 올라서 사색의 길 목천마씨 묘지 오르기 100미터 전 큰 바위 지난 뒤 왼쪽으로 들어가 50미터 지점에 김기만 묘지를 찾을 수 있다. 역으로 사색의 길에서 내려가면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묘지번호 104327이다.

묘비는 한자로 새겨져 있다. 한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묘비 앞면, 청주김공기만지묘. 묘비 뒷면, 공의 호는 명산(明山)이며, 아버지는 원성(元性),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두 분의 장남으로 임진년(1892) 3월 2일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풍천 임씨, 4남 3녀 자녀를 두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우국 애족의 마음이 특별하였다. 중국 상해에 유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나라를 세우는 일을 늘 도모하였으며, 이어서 광복이 되자 고국에 돌아와서 애국 국채 채권을 판매하였다. 흥사단 운동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예수교 독실한 신자였다. 하늘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 병신년(1956) 12월 27일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아! 슬프다. 동생 기영이가 삼가 기록한다. 단기 4290년(1957) 정유년 3월

안창호는 그의 일기(1920년 5월 15일)에서 김기만 군에게 손정도 목사 등을 비롯 목사 3인이 외국 선교사 초대한 비용과 여비에 대해 공채 발행 문제를 협의한 기록을 남겼다. 도산과 아내인 이혜련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도 김기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제1회 동우회 사진에 도산 안창호, 유상규, 이영학, 김기만, 이광수와 함께 있었다. 사건 명단에도 이름이 보인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을지로 2가에서 출판업과 사무용품 사업을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구익균 옹의 중국 임시정부(1929~1945)와 해방 전후사(1945 ~61)의 생애 국사 편에 김기만도 포함되었다. LA중앙일보 2019년 8월 15일 미주판 4면에 뉴욕 일원에 생존에 있는, 망우리공원에 유택이 남아 있고 대한(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며 흥사단 단우이자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보안책임자였던 독립운동가 나우 본명이 나순응의 둘째 아들인 ‘마지막 광복군’인 나성돈(95)의 회고담에서 그는 “부인 나주석(90)씨와의 만남도 독립운동가 집안이 연결해준 특별한 사연이라고 설명했다. 부인의 부친 김기만씨도 당시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과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을 했었고 두 부친의 소개로 만남이 이뤄졌다는 것. 평안남도 출신인 김기만씨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이웃집의 신고로 체포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도산이 평양 선산에 가지 않고 망우리 “유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하여, 김봉성이 부친을 모시려던 망우리의 묫자리에 도산을 모셨다(오기영의 증언). 도산 안창호 선생 묘지를 중심으로 뒤에는 이영학 그리고 도산이 세운 평남 강서군 최초의 교회인 탄포리교회 초창기 신도인 박남신 권사와 그 둘째 딸인 3.1혁명 전날 밤 유관순 열사 등과 결의한 6인 결사대 일원인 김분옥 여사, 왼쪽에는 형님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과 결혼한 김봉성 독립운동가, 오른쪽에는 상해임시정부 비서였던 유상규 흥사단 단우 및 독립지사 묘역이 자리 잡았다. 남동쪽에 “도산의 발치에 묻어달라”는 흥사단 단우이며 서훈받지 않은 독립지사 허연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분들 외에 단우인 독립지사 조종완 문명훤 등이 망우리공원에서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애석하게도 도산과 김봉성 묘지도 이장하고 말았다. 현재는 나우, 허연, 이영학, 김기만, 유상규 단우와 박남신 김분옥 모녀의 묘지만 남았다.

보훈처와 흥사단 및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는 독립지사 김기만을 비롯하여 이영학, 나우, 허연, 이병홍, 박현식 등 이북출신으로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계시는 분들의 독립운동 및 문화운동 등 각종 자료를 찾아 그에 맞는 서훈을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