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소아 김진성

정종배 2022. 1. 6. 11:30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국군창설 주역
소아(素我) 김진성(金振聲, 1892~1968. 1. 1.) 선생 54주기

2022년 올해는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 개설 이래 공원사무실이 새로 건립되고 관리권이 바뀌는 변화가 있다. 망우리공원 사무 및 교육 홍보 등을 맡아볼 ‘중랑망우공간’이 오는 봄에 준공될 예정이다. 또한, 작년 7월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 망우리공원과가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묘역공원 담담 부서가 개설되며 신은실 초대과장이 부임했다. 이어서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중랑구청으로 공원 녹지 관리권이 인계됐다. 올 7월에는 묘지관리권까지 이어받을 계획이다.

작년 10월 말 발간한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출판)을 경향 각지에서 부족한 글 응원해주시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출간 이후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제2탄 인물의 기일에 맞춰 편집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을 올해도 이어가렵니다.
2022년 1월호가 300호인 월간 《창조문예》에 지난 해 8월부터 시작한 ‘망우리공원 문인열전’ 연재에 원고지 60장 안팎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또랑시인 없는 글발 격려해주시길 바랍니다.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국군창설 주역인 소아 김진성 선생 기일(1968.1.1.)로 54주기이다.

김진성은 1892년 7월 15일 평남 덕천군 성양면 지양리 423번지에서 태어나 1968년 1월 1일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산3의 27번지에서 별세한 독립운동가이다. 이명으로 김필보(金弼堡)·김정만(金禎萬)이다.(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관리번호 8520)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진성의 공적개요(한글병기)는 “1918~1919.까지 만주 등지에서 유동열 조명선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1920년에는 전남북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미국 국회의원 내한시 살포할 삐라를 등사하였고, 동년 9월 전북 고산군 군자금 강제모집사건으로 피체* 10년 징역형을 받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1919년 초에 하얼빈(哈爾濱)의 노군사령관(露軍司令官) 호리왓트대장과 연락하여 해삼위(海蔘威)를 중심으로 동지 유동열(柳東說)·신영삼(申榮三) 등과 같이 한인 2세 8백여명을 모집하여 동청철도수비대(東淸鐵道守備隊)에 편입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하얼빈 러시아군의 용병으로서 오성만(吳成萬)·김창연(金昌連)·송일훈(宋一勳)·이승무(李昇武) 등과 함께 의용병(義勇兵)을 조직하여 실전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으나 유동열·양기탁(梁起鐸) 등의 석방운동으로 2개월만에 출옥하였다

그후 전남 광양(光陽)지방의 지주들로부터 군자금 7천원을 모금하여 양기탁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에는 격문 천여매를 만들어 배포하고자 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교우(金敎雨)·김한규(金漢奎) 등과 함께 고산(高山)의 부호 고갑준을 설득하여 현금 9,600원을 받아 상경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록)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 공적조서, 포상정보)

<참고문헌>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863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8면, 매일신보(1920. 9. 10),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807면

1995년 5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묘역 독립유공자(2ㅡ368) 구역에 안장됐다.

망우리공원에는 묘역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면목고 후문에서 300미터 위로 옛 이기붕 일가 가족묘지 터와 가깝다.

비문 앞면, 獨立志士金振聲之墓. 묘비 뒷면, 공의 휘는 필보요 자는 진성이며 호는 素我(소아)요 관은 광주이니 (중략) 공은 1892년 임진 7월 15일 평남 덕천에 출생하시다 1919년 기미에 재 하루빈로군사령관 호리왓트 대장과 연락 해삼위를 중심으로 유동열 신영삼 등과 같이 한인 8백여 명을 모집 동청철도 수비대에 편입시켰고 또 상해임정과 연락을 취하다가 倭憲(왜헌)에 체포 경성으로 압송되었으나 유동열 양기탁씨의 석방운동으로 삼개월여의 옥고 후 석방되어 계속 전남 광양지방의 부호들에게 군자 7천원을 모집하여 양기탁씨 등에 1만 3천원의 모금 전달과 일천여매의 전단을 만들어 미국의원단 내한시에 살포하였으며 또 전주 고산의 부호 친구인 고갑준씨 집에 야간 침입하여 군자금 9천 6백 강요하여 상경 은신 중 체포되어 징역 12년형을 받고 7년 복역 후 가출옥 석방 뒤에도 소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국내외의 항일 투쟁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왜경에 구속되기 수십 차였다. 해방 후 임정요인이 환국하자 옛 동지 유동열씨가 통위부장으로 당선됨에 그를 보좌하여 국군창설에 다대한 공을 세웠으며 6.25사변 이후 과거 고문 여독으로 행보조차 불능하여 항상 병석에서 신음하시다가 1968년 1월 1일 향년 74세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 공의 공적을 치하하고 1968년 3월 1일에 건국공로대통령포장을 추서하였고 또 동 77년 11월 20일 재심에서 다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공의 일생은 실로 건국을 위해 형극의 일로였다. 배 온양 방씨는 1897년 11월 8일생에 1928년 1월 21일 졸하시고 배 김해 김씨는 1896년 3월 27일생에 1969년 5월 27일에 졸해 동년 29일에 부군과 합장하였다. (중략) 세 분의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용화는 실업계 3남 성배는 예비역 준장 사위 감사원 사무총장 손서에 허화평 예비역 준장 (중략) 이제 자 3형제는 선고의 명복을 기원하고 거룩한 구국충정을 후손에게 전승케 하고자 통천곡지의 효성으로 이 비가 세워지노라. 西紀 一九八七年 丁卯 三月 日 鏞華 成培 經華 奉建 儒學博士 梁大淵 謹撰 國展審査委員 金濟雲 謹書

2019년 4월 중랑구 마을활동가 김완숙 선생이 이끄는 ‘중랑을 걸어요’ 답사를 함께 하여 이기붕 가족묘지 터를 확인했다. 면목고등학교 후문에서 아래로 내려오다 우측으로 망우리공원 ‘오거리쉼터’정자를 향해 300여 미터 오르면 ‘국평정’터가 나온다. 맞은편은 옛 양지말 산신제를 지낸 곳이다. 그 곳에서 100m 정도에 새로 지은 정자 ‘오거리쉼터’가 나온다. 그 정자 왼쪽 나무테크길 안팎 2천평이 4.19혁명 비극의 이기붕 부통령 가족묘지 터다.

면목동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사람들의 평안을 비는 곳이 두 군데였다. 남촌(응달말)과 양지말 마을이었다. 남촌 산신제 터는 예부터 지내온 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서울둘레길 제2코스 독립지사 김병진 묘역 내려가는 맞은편 위쪽으로 산신제터 입구 ‘산신제단’라 새긴 바위와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고 간단한 안내문도 내걸렸다.

“이곳은 면목동 남촌(응달말)의 산신제를 지내는 곳으로 신성한 장소입니다.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면목동 옛 마을 ‘양지말산신제’ 터와 ‘국평정’ 지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국평정 정자는 문헌상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공동체 의식인 동제인 산신제 터가 옮겨가자, 개인의 치성을 드리는 서낭당 흔적인 돌멩이만 높이 쌓여 있다. 수풀이 우거져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2000년 전후 어느 종교인에 의해 불이 나 다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양지말 산신제는 음력 10월 1일 지냈다고 전해진다. 면목동 사람들이 치성드리는 제물 음식 운반하기 어려워, 지금은 ‘사색의 길’ ‘동락정’ 정자 위 30m 망우산제2보루 가는 방향 ‘구리둘레길 제1길’ 길섶 능선에 새로 터를 잡고 산신제를 모셨다. 마을공동체 의식의 동제인 산신제가 1990년대 중반까지 지내다가 도시화·산업화가 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져 산신제가 사라져 현재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산신제 드리는 치성터 경계석은 ‘구리둘레길 제1길’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무너지고 말았다. 현재는 ‘면목동 양지마을 산치성터’라는 표지석만 개나리 울타리 속에 남아있다. 공교롭게 산신제 터가 서울시 밖 구리시 경계 안에 있어 남촌 응달말 사람들이 “너희들은 경기도 땅에다 제를 모시느냐?”며 놀렸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면목초등학교 언덕의 양지말과 그 남쪽 응달말(남촌마을) 간의 라이벌 의식은 지금도 살아 있다.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사라진 민속놀이에서도 마을간 경쟁의식으로 서로 간 발전과 성장의 밑거름을 엿볼 수 있었다.
면목초등학교 뒤 면목동 옛길을 걷다보면 말목장 경계인 토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경계 너머 북쪽은 양주군 망우리면 건원릉 ‘능지기’이고, 남쪽 자기들은 고양군 독도면에 속해 ‘말똥 냄새’ 나지만 능지기들과 함께하기 어렵다며 가오를 잡았다. 망우리면 사람들은 말똥냄새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목에 힘을 줬다.

‘중랑을 걸어요’ 답사팀에서 나 홀로 떨어졌다.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묘역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2018년 11월 병원 치료하고 사가정공원에서 올라오는 ‘용마산 자락길 무장애 숲길’ 오거리쉼터 오기 100여 미터 전 나무테크 아래 20여 그루 향나무가 잘 자란 묘역이 보였다. 묘역도 상당히 넓었다. 그런데 묘역을 관리하지 않아 수풀이 우거졌다. 가던 발길을 돌려 내려가 확인하였다.
독립지사 김진성 묘비였다. 비문을 읽어 내려가며 풍찬노숙 독립운동의 매진한 노고를 깊이 새겼다. 후손 중 손서 허화평 준장이 나왔다. 핸드폰으로 확인하였다. (사)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단톡에 올렸다. 위원들은 망우리공원에 독립지사 한 분 더 올렸다며,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2021년 7월 개설한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 수목관리팀에서 수풀을 제거했다. 김진성 묘역은 이장은 하였지만 봉분, 묘비, 상석, 망주석 등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묘비의 내용이 사료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비록 고양시 사설묘원으로 이장하였지만 1공화국 이승만 정부 독재의 하수인 이기붕 일가의 비극적 생을 마감한 비사와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로 자리매김한 국채표 묘역이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분들의 묘역과 거리가 가까운 서일대학교, 면목고, 중화중, 면목중, 서울면중초 등을 포함하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