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일제강점기 학병 출신 학병동맹사건의 삼학병 76주기
김명근(金命根, 1920~1946.1.19.) 별명 이달(삼)
박진동(朴晋東, 1921~1946.1.19.)
김성익(金星翼, 1922~1946.1.19.)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주차장에서 사무실을 거쳐 100여 미터 오르면 사색의 길 삼거리가 나온다. 일방통행 길 반대인 오르막길로 1Km 정도 오르면 사색의 길 왼쪽 형제약수터 이정표 아래 월파 김상용 시인의 유택이 자리하고 있다. 김상용 시인의 묘지를 오른쪽에 두고 50여 미터 산길을 내려가 형제약수터 쪽 길을 버리고, 철조망 울타리 왼쪽 오솔길을 따라가면 향나무 4그루가 자라는 삼학병 유택이다.
왼쪽부터 ‘학병(學兵) 김명근(金命根)·박진동(朴晉東)·김성익(金星翼) 義士之墓’ 라고 새긴 묘비와 상석이 각각 봉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묘비 뒷면에 ‘1946년 1월 19일 祖國을 爲하여 죽다’라고 똑같이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묘역 양 옆에 서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궁지에 몰리자 1944년 1월 20일 한국인 학병 강제 징집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일제는 1943년 10월 20일 육군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학도병 지원병제'로 조선의 대학생 및 졸업생에게 군대 지원을 명령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지원 상황은 극히 부진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학생들의 고향까지 찾아다니며 부모를 협박하는 방식으로 지원을 강요하였다. 그래도 지원하지 않는 학생들은 휴학 처분을 시켜 공장, 광산 등의 노동자로 징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아울러 친일 부역자들에게 학도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시키는 등 갖가지 지원을 독려하였다. 윤치호를 필두로 이광수, 김활란, 최남선, 모윤숙 등 조선의 지도자들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황군에 복무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영예’라며 출정을 권유했다.
대학 전공 의학, 사범, 농수산, 이공학계열 학생들은 학병에서 제외됐다. 시인 박인환도 평양의전에 입학했다.
1943년 최남선이 동경제국대학 대강당에서 조선 학생을 대상으로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법학부 학생 한 명이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당신들 자식부터 내보내라.”고 일갈하였다. 당시 최남선의 아들 최한검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학생이었는데, 학병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을 곤혹스럽게 한 이 학생의 이름은 신상초다. 이렇게 물불 가리지 않은 일제의 공작으로 전국에서 수천 명이 억지로 입대하였다. 이날 입대하는 학병들을 위하여 해당 지역의 군수, 서장, 지방의 유지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축사가 아니라 조사(弔辭)였다.
학병에 대한 학생들의 입장은 두 가지였다. 학병을 거부하거나, 징집에 응하거나. 학병 거부의 대표적 인물은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 빨치산 지도자 일명 남도부인 하준수였다. 경남 함양의 부호이자 면장을 지낸 하종택의 아들인 하준수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해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공산당 간부 이현상을 만나 보광당을 결성해 해방 때까지 항일활동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보성전문대학의 이철승과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등이 주동하여 한달 동안 학병 거부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철승과 이혁기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강제 징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직후 이철승은 반탁학생총연맹을 결성해 우익의 행동대장이 되고, 이혁기는 조선국군준비대를 결성해 좌익의 행동대장이 된다. 하준수는 잠시 이승만 박사의 경호대장을 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의 실제모델이기도 하다.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 약 4,300명의 조선 학생들이 초보적인 군사훈련만 받은 채 중국과 동남아전선에 배치되었다. 대다수 학생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학병에 응했다.
학병세대 중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참여한 이들로는 고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포천 약사봉 등반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재야인사 장준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돈(큰아들 김홍일의 장인)으로 광복회 회장을 지낸 윤경빈, 독재정권 시절 조작간첩 사건의 변호를 도맡았던 강골 변호사 태윤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었고, 광복군의 미군과의 합동작전 계획에 따라 미국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 특수훈련을 받고 한반도 침투작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나의 독립군 시절-장정』(김준엽), 『돌베개』(장준하), 『회상의 황하-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태윤기)와 같은 체험 수기를 남겼다.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뒤 가까운 곳에 있었던 중국 팔로군으로 넘어가 결국 연안의 조선의용군에 참여했던 신상초는 『탈출-어느 자유주의자의 수기』, 엄영식은 『탈출-죽어서야 찾은 자유』의 기록을 남겼다. 이 두 사람은 해방 후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하기 않기 위해 조선의용군을 탈출해 북한으로 갔다가 다시 월남했다.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한 학병출신으로는 해방 후 중국에 남은 정철수도 있다. 그는 중국 제남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투신,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해방을 맞았으며, 연길현 정부 교육과장, 길림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연변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수기 『나의 청춘-학도병이 걸어온 길』을 남겼다.
장준하·김준엽이 중국대륙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갔을 때 버마전선에서도 일본군을 탈출한 3명의 조선인 학병이 있었다. 박순동·박정무·이종실은 버마에서 인도-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OSS의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정병준의 『지방사와 지방문화』 속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모멸의 시대』 수기를 남긴 박순동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사실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범우의 실제모델이라고 한다. 또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장하림의 모델이기도 하다. 김범우와 장하림은 두 작품에서 다소 다르게 묘사되고 있지만, 같은 한 인물을 모델로 하여 “소설적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범우와 장하림의 모델이 된 박순동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동원된 후 버마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뒤 미 첩보기관 OSS의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했다가 실행되지 못하는 바람에 전쟁포로로 귀국해 순천 미군정청의 통역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박순동이 조정래의 외삼촌이었으며, 김성종 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된 자전적 기록 「모멸의 시대」의 필자였다는 점이다. 박순동은 귀국 직후 순천주둔 미군정청 통역관을 거쳐, 제지회사 사원, 순천공업중학교·벌교중학교·문태중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1965년 《신동아》에 ‘냅코프로젝트’ 참여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모멸의 시대」가 당선된 이후 논픽션 작가로도 활동했다.
학병에 동원된 이들은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조선인 중에서 극소수에 속했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환(천주교 추기경), 민병권(육군중장, 국회의원), 민충식(호주대사), 박동운(한국일보 논설위원), 신상초(중앙일보 논설위원, 4선 국회의원), 이병주(작가), 임원택(서울대 법대 교수), 장도영(육군참모총장),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재야 지도자), 김준엽(고려대 총장), 한운사(작가), 현승종(고대 교수, 국무총리), 황용주(MBC 사장), 강영훈(국무총리), 이철승(국회의원), 윤천주(문교부장관), 이일규(대법원장), 박동진(외무부장관), 이동찬(코오롱 회장), 최영희·장도영·김종오·민기식·김용배·김계원(육군참모총장), 한신(육군대장), 박병권(합참의장), 김형일(참모차장), 김익렬·박경원(육군중장), 김웅수(육군소장)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준수, 윤재현, 김이현,전상엽,박순동, 이가형, 유재영, 김문택,최홍희, 손종영, 장도영 등이 수기를 남겼고, 이병주, 이가형, 한운사 등은 소설을 남겼다. 학병을 피하기 위해 만주로 도망간 김수영, 학병대상자였지만 학병에 가지 않은 손창섭, 학병대상이었지만 사범대생 예외조항 때문에 합법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극소수의 행운아 중 한명인 선우휘 등의 글에도 학병세대의 경험이 녹아 있다.
수기나 소설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하준수의 「신판임거정-학병거부자의 수기」(《신천지》, 1946.4~6. 3회 연재), 윤재현의 『사선을 헤매이며』(국제문화협회, 1948), 김이현·최정식의 『학병탈출기』(영웅사, 1948) → 김이현의 『멀고 먼 귀로』(베드로서원, 1991), 전상엽의『살아있는 한』(1966),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신동아, 1965년 9월호. 『암태도 소작쟁의』, 2003, 수록),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신동아, 1964년 11월호), 유재영의『7인의 탈출』(1993), 김문택의『탈출기』/『광복군』(1995, 독립기념관), 최홍희의 『태권도와 나』(전3권, 다움, 1998~2003), 장도영의 『망향』(2001, 송이당), 손종영의 『학병』(2008, 북코리아),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중앙일보사, 1987)과 『지리산』(한길사, 2006), 이가형의 『분노의 강』(경운출판사, 1993), 한운사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정음사, 1961) 등이다.
‘학병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 강제로 징집됐다 곳곳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학병 출신들이 만든 사설군사단체이다. 왕익권과 이춘영 등이 주도하고, 초기에는 이념의 구분 없이 학병 출신들을 대상으로 조직되어 8·15 직후 경찰서를 접수하거나 치안유지 등을 전개하고, 향후 국가 수립 이후 군대창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활동했다. 조선학병동맹은 일제치하에서 학병에 끌려나가던 굴욕의 날인 1월 20일을 학병기념일로 정하고, 전국학병대회의 개최와 희생당한 학병들의 추도제와 같은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각 도별로 학병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1946년 1월 19일 무슨 일이 있었던가? 최초의 학생운동이라 할 수 있는 ‘학병동맹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당시 일제강점기 징병 징용 정신대 등을 당한 젊은이들이 희생은 지금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1992년부터 일본군으로부터 성폭행당했던 정신대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 정의기억연대 소속 할머니들의 주도로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집회 ‘수요시위’ 또는 ‘위안부 할머니 집회’라고도 한다. 동일한 주제로 열린 최장기간의 시위로 평화비 동상이 전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학병으로 나가 돌아온 젊은 지식인들은 불합리한 시대 상황에서 좌파 세력에 가담했다. 학병동맹도 좌파 정치세력으로 간주 되어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힌 존재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미국 영국 소련 등 3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남한 사회는 반탁의 우파와 찬탁의 좌파로 갈려 격렬한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반탁과 찬탁 서로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매일 격한 토론과 심하면 몸싸움까지 빈번히 일어났다. 하루가 멀다고 싸움이 지속됐던 해방정국 혼란 중 1946년 1월 19일 마침내 사건이 터졌다. 1월 18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반탁 전국학생총연맹 주최의 반탁대회가 끝난 후 시가행진에 들어갔던 고려대 정외과 이철승 학생이 위원장인 반탁전국학생연맹과 학병동맹 군사부장 박진동이 이끄는 찬탁파인 좌익 학병동맹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양쪽에서 40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날 밤 종로경찰서 인사동 파출소에서는 수상한 청년을 불심 검문하여 조사한 결과 학병동맹(위원장 왕익권)이 총기를 소지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은 직접 병력을 지휘하여 다음날인 19일 새벽 3시경 서울 삼청동 한청빌딩 학병동맹본부를 포위했고, 학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 경찰의 총격으로 학병동맹원 3명이 피살됐다. 그 3명의 희생자가 바로 이곳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힌 삼학병이다.
학병동맹 사건이 수습된 날 김두한이 이끄는 우익인 대한민청은 가장 규모가 큰 좌익 군사단체인 조선국군준비대(총사령관 이혁기)를 습격하여 무장해제 시켰다. 당시 30여개 단체 이합집산 사설 군사단체 간의 충돌 중 대표적인 두 사건은 미군정 당국을 경악케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사라진 학병동맹사건은 그 피해자의 본명조차 잘못 알려져 있다. 2004년 박용찬의 저서 『광복기 시의 현실인식과 논리』는 『사회과학대사전』에 의거해 삼학병의 이름을 박진동, 김성익, 이달이라고 써 놓았지만, 실제 무덤 비석에는 이달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대신 김명근이 씌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1946년 1월 29일자 조선일보는 그에 대한 답이다. 본명이 김명근의 별명이 ‘이달’이었다. 삼학병 중 김성익은 학병동맹의 부위원장이었고, 박진동은 경남 남해 출신이며 진주고보 11회 졸업생으로 학병동맹의 군사부장이였다.
LG그룹 일가를 취재한 2005년 5월 16일 《서울신문》은 ‘박진동은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의 아들로 LG그룹 창립자인 구인회 회장의 장녀 15세 양세와 결혼하였으나, 광복 후 좌우익 투쟁 중 학병동맹본부 피습 사건으로 사망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그의 동기 백석주는 후일 증언을 통해 박진동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19일 아침 7시 학병동맹회관에 이르니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경찰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고 박진동은 마루에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 눈을 감겨주었다.”
3학병의 장례식은 1946년 1월 30일 오전 11시 학병동맹회관 앞에서 500여명이 참석하여 거행되고 망우리에 오후 2시 도착 3시에 안장됐다. 그 다음 날인 1월 31일 《조선일보》는 ‘천일(天日)조차 무색(無色)하다 3학병연합장의성대’라는 제목으로 장례식을 상세히 보도하며 애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2월 1일 신문 1면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좌우익은 회개하라 난국에 비분 비정치인사궐연’ 1946년 1월 22일 시인 임화는 삼학병 영령에게 「초혼」을 바쳤다. 「초혼」에서는 “1946년 1월 19일 새벽 서울 삼청동 조선학병동맹회관 전투에서 사몰(死沒)한 세 용사의 영령 앞에 드리노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학병동맹사건에 희생된 세 청년을 애도했다. 그와 같은 조시는 “1946년 5월 6일 망우리 묘지에 가장(假葬)한 전몰 3용사의 묘제를 위하여 조선학병동맹의 위촉으로 일문(一文)을 초(草)했노라”라는 부제를 단 「제사」도 있다.
필자는 관동대지진 세계 유일 다큐 제작하는 오충공 감독을 후원하는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 LG그룹과 GS그룹 관련 있는 인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홀로 다큐 제작의 힘을 보태주고 싶으나, 한일관계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을 고려하여 어렵다는 답이 왔다. 망우리공원 박진동 의사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명근 김성익 두 분이 함남 출신으로 연고자가 없어 박진동의 집안에서 개인적인 묘지 관리는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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