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독립운동가 박원희(朴元熙, 1898~1928.1.5.) 94주기
우리나라 초창기 여성 권익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호적에는 박연희(朴延熙)로 망우리공원 묘적부에도 박연희로 기재되었다.
보훈처 국가유공자 인적 사항에는 서거일 1월 15일로 기록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1928.1.7.자 2면과 김사국 박원희 두 분의 따님 인석 김사건 여사 고희기념문집 170쪽 독립유공자포상신청서에도 1월 5일로 기록되었다.
보훈처 박원희 공훈록 정정 사항에 바로잡아달라고 정정 신청을 하였다. 1월 5일에 맞춰 페이스북에 올리려다 보훈처 공훈록 기록을 보고 1월 15일로 알고 주요 인물 기록표에 15일로 고치며 15일에 맞춰 발표하기로 작성하여 뒤로 미뤘다. 1월 15일 전 군수 홍재설과 겹쳐 1월 8일 오전 다시 검토 정리하면서 또다시 바로잡았다. 보훈처 공훈록 오류신고란에 1월 11일 바로잡았다고 기록되었다.
독립운동가 박원희 여사의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年 간도 용정에서 항일선전문과 폭탄으로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동양학원 교원들의 활동에 연루 체포되어 기소유예된 바 있으며 1924. 5. 4 서울 재동에서 여성동우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다가 1925. 1월 경성여자청녀회를 조직,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후 1927. 4. 16. 서울 낙원동에서 열린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교양부에서 활약하다가 동년 26일에는 근우회槿友會 발기총회의 창립준비위원으로서 회원모집에 주력하고 동월 29일 동회의 집해행위원회 교양부를 맡아 활동하던 중 1927.5.27.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근우회 창립총회를 갖고 활약하였고 강연회를 통해 여성의식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는 등 1928. 1. 5 사망 때까지 4여 년간 여성운동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1년 7월 동지 김사국과 결혼하여,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여 경성여자청년회 대표로 뽑혔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박원희 선생님은 영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 5월 이 학교 학생회의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은 세 학생이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강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았다. 1923년 7월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였다가 체포되어 2개월 옥고를 치렀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도, 미국의 여성 사회운동가였던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4인 발기인 중 1인이며 창립 집행위원 3인(조선희 『세 여자』에 허정숙·주세죽) 중 1인이었다. 긴 머리를 단발로 잘라 자신이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주변에 인식시켰다. 이 신여성들은 당대에는 각종 조롱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현대의 한국 여성운동사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고 단체이다. 이어 1925년 1월에는 경성여자청년회 조직 발기하고 2월 21일 여자청년회 창립총회 사회를 맡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회위원으로 선출되어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강연 제목은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경홀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 운동과 조선 부인 운동’ 등이었다. 《동아일보》 논설 등을 발표하며 여성의 사회의식 향상을 꾀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분규 해결에도 힘쓰는 등 쉼 없이 활동했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어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남편인 김사국은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여성권익 사회운동의 독립운동가 박원희 외손자인 김영열 선생과 전화로, 외조부모님의 삶과 그 따님인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외조부모님 기개를 닮아 맵고 짠 삶을 극복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두 분에 대한 서훈 추서를 위한 노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 분의 초장지는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였다. 해방 이전 망우리공동묘지 어머니 안국당 묘지 입구 왼쪽 위로 이장했다. 2002년 10월 28일 대전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2-1012)으로 이장하여 안장됐다. 서훈받기 전 사회주의운동 전력으로 숨죽이는 연좌제 그늘에 수많은 나날을 고뇌와 아픔을 겪었다.
또한, 망우리공원 안국당 묘지 앞에 며느리 박원희 묘비는 서 있고, 아들 김사국 묘비는 그 아내 묘비 앞에 묻히게 된 사연을 알게 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날 포그레인 작업하며 김사국 선생의 묘비는 손상을 입어 땅에 묻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아들과 며느리 나라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 안국당 묘지 왼쪽에 세우고 묻었다.
김사국 박원희 외조부모님에 대한 ‘학술 논문’을 포함된 어머니 인전 김사건 여사 회혼기념 문집 『노을에 기대어 건져올린 세월』을 우편택배로 보내줬다. 중랑구청에서 후손들의 모임이나 자료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씀을 나눴다.
망우리공원에는 박원희, 김활란, 이정애, 박은혜, 이옥경, 이경숙, 주룰루, 차숙경 등 여권신장 및 여성운동 선구자들이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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