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인암 홍병기 73주기
3.1혁명 이후에는 고려혁명당 이끈 천도교 중진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인암(仁菴) 홍병기(洪秉箕, 1869.11.5.~1949.1.26.)
도호 인암. 1869년 음력 11월 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 그 후 천도교 장로로 있으면서 교세 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1혁명 때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6년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망우리에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에 안장됐다.
홍병기는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1869년 고종 6년 양력 12월 10 아버지 홍익룡(洪益龍)과 어머니 한익화(韓益嬅)의 아들로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운회(運晦), 도호는 인암이다. 참봉 벼슬 양반집 서자로 태어난 그는 신분차별로 인해 청년기에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닦았으며 한학을 공부하여 고문에 능통했다. 1887년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신분적 한계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1892년 24세 때 당시 시대 상황과 개인적인 고민 등으로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어 교리를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1893년 보은군 속리면 장내리에서 개최된 동학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 소위 제2차 갑오농민전쟁 때 최시형의 명을 받고 임학선과 함께 그는 경기도 여주에서 기포하였다. 10월에 홍병기는 휘하 교인들을 이끌고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에 도착하였다. 경기도 편의장 이종훈과 편의사 이용구 등의 지휘를 받으며 그곳에서 500명의 포군 등과 대치하였고, 보은군 장내리로 향하던 중 충북 괴산에서 그곳 수령이 이끄는 관군과 충주에서 온 수백 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손병희, 이종훈 등과 최시형을 시종하며 도망을 다녔다. 1898년 최시형이 관헌에 잡혔을 때, 홍병기는 손병희, 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을 구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시형이 뜻하지 않게 처형되자, 동학교단은 도통의 전수와 노선의 설정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다. 이때 홍병기는 연원 관계에 따라 손병희를 지지하면서, 측근으로서 보필하였다. 1900년 동학의 도통이 손병희에게 전수되었을 때, 편의장이란 직책과 대정이라는 원직을 받고, 손병희로부터 인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동학의 중견 인물로 성장하였다.
1901년, 일본에 외유 중인 손병희가 박영효, 조희연 등의 개화파 인물과 접촉하며 동학의 개화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홍병기는 손병희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03년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 육군 참모부의 차장인 다무라(田村怡興造) 등과 제휴하여 친러파 내각을 붕괴시킨 후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는 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급작스런 다무라의 사망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04년에는 손병희가 일러전쟁의 혼란기에 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홍병기 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 4월경에는 동학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로 정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대동회의 기치 아래에서 시위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동학지도부가 일본과 모종의 협의 하에 1904년 10월 진보회를 설립하고 ‘흑의단발’을 내세우며 갑진개화운동을 추진하였을 때도 홍병기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4년 말 이용구가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한 후에는 일진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2월 일진회의 매국 행위에 분노한 민중들이 동학을 매국 종교라고 비난하자, 손병희는 위기감을 느끼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재탄생시켰다. 홍병기는 보문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어 교회 활동을 전념했다. 이용구계와 김연국계의 천도교인이 시천교를 분립하여 교단의 운영이 곤란해지자 천도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교회 내 위계가 1907년 고문, 1908년 경도사에 올랐고, 시무하던 직무도 1910년 현기사장 서리, 1911년 대종사장으로 상향되었다. 1910년대 전반에는 대종사장으로, 대종사장에서 물러난 1916년 이후에는 장로로서, 천도교의 중요사항을 결정하여 교세를 신장시키고 교인을 교육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의 천도교 대표들과 만나, 독립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찬성하여 27일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위의 4인 및 이종일·이종훈·임예환·권병덕·나인협·김완규·나용환·홍기조·박준승·양한묵 등 천도교 동지와 다시 만나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천도교계 민족대표 1인으로 서명과 날인 하였다.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33인 가운데는 무관 출신이 권동진 ·홍병기 두 분이지만 구한말 시위대 부교(중사)를 지낸 이필주 포함하면 3명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당시 나이)
- 천도교(15명): 손병희(59)·권동진(59)·최린(42)·오세창(56)·임예환(55)·권병덕(53)·이종일(62)·나용환(56)·나인협(49)·홍기조(60)·김완규(44)·이종훈(65)·홍병기(51)·박준승(54)·양한묵(58)
- 기독교(16명): 이승훈(56)·박희도(42)·최성모(47)·신홍식(48)·양전백(51)·이명룡(47)·길선주(51)·이갑성(31)·김창준(31)·이필주(51)·오화영(40)·박동완(35)·정춘수(45)·신석구(45)·유여대(42)·김병조(44)
- 불교(2명): 한용운(41)·백용성(56)
민족대표에 서명하지 않은 주요 인사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함태영 외에 송진우와 현상윤 등이 있다. 이들은 3.1만세운동 거사 후의 지속적인 운동과 지도를 맡기 위해 서명에서 빠졌다. 그리고 최남선은 스스로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으므로 그대로 받아줬다.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3.1혁명을 주도한 인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천도교: 박인호(66)·노헌용(53)·이경섭(45)·한병익(20)·김홍규(45)
- 기독교: 함태영(48)·김지환(29)·안세환(33)·김세환(32)
- 교육계: 송진우(31)·현상윤(28)
- 문인: 최남선(31)
- 무직: 임규(51)·김도태(29)·노정식(30)
- 학생: 강기덕(31)·김원벽(27)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에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 만세를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제 당국의 조사과정에서 일본 관헌의 가혹한 취조와 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기회만 오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답할 정도로 강한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당초 일제는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등 48명을 '내란죄'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죄목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바뀌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김완규 ·박준승·최준모와 함께 출옥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와 오지영 등과 함께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신문화운동’이란 개량적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천도교중앙총부의 집권파의 노선에 반대하여 교인의 대표인 의정원을 선출한 후 이들로 구성된 의정원의 결의로 교회의 중요사무를 처리하려고 하였다. 또 종의원·종법원·종무원의 삼원제를 실시하여 교권의 분립을 이루고, 선거로써 교주를 선출하고, 교주와 수위의 봉급을 동일하게 할 만큼 극단적인 천도교의 평등 이념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천도교 내 혁신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2년 말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개량적 문화운동을 반대하고, 혁명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2년 7월 14일 이종훈·최동희·송헌·이동락·김광희·이동구·김봉국 등과 서울에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종훈이 고문, 최동희가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송헌이 비서, 이동락이 해외조직부장, 김광희가 선전부장, 이동구가 해내조직부장, 김봉국이 해내선전부장, 박태윤이 재정부장, 김치보·강창선·지동섭·김홍종·강도희·김문벽·이동욱·강명혁·김병식·손두성이 위원에 임명된 가운데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항일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외교부장 최동희를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동휘·한명세 등과 협의한 후 소비에트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24년 4월 5일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나용환이 부위원장, 윤익선이 내무위원장, 최동희가 외무위원장, 김진팔이 재무위원장, 정계완이 선전위원장, 이종훈이 사성위원장에 임명된 가운데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최동희 등을 통하여 천도교와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제휴를 맺고,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한 후 대일항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러시아가 일소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 탓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고려혁명위원회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최동희와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등이 정의부의 정이형·양기탁, 연해주에서 만주로 온 주진수·이규풍 등과 협의하여 1926년 3월 지린성에서 정의부·천도교연합회·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무장투쟁과 자치조직을 담당할 지도정당조직인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동구·김봉국 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고려혁명당에 가입하여 당원을 모집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종락이 지린성 창춘에서 체포되어 고려혁명당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1927년 1월 29일 만주에서 신의주경찰서의 경부보에게 체포되었다. 근 60세의 노인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2년 가까이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이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 5일 가출옥하였다
종로구 소격동 119-1에 살았던 홍병기는 출옥 후 동대문 밖 손병희의 사저 상춘원에서 늦게 얻은 아들 인섭(영섭)과 함께 지냈다. 1930년 8월 29 국치일 무렵 아들 인섭이 모 사건의 범인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신문 사회면에 이름이 올랐다. 당시 22세의 인섭이 국치일 “8월 29일을 전후해 서울 시내 숭인동에 '불온한' 격문을 붙이다 붙잡혔다. 취조 과정에서 영섭이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홍병기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매일신보, 1930.9.11.)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홍병기는 3.1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백범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충칭에서 환국하자 그는 3.1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또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奉戴·공경하여 받듦)를 천명하였으며, 임정 계열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동학혁명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9년 당시 홍병기는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2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1월 17일 오후 1시 40분경, 행당교를 지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그의 왼쪽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즉시 국방부 제2육군병원으로 호송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중상인데다 워낙 고령이어서 위독한 상황이었다. 사고를 당한 지 9일 뒤인 1월 26일 오후 8시 15분, 홍병기는 만 80세로 환원(還元)하였다. 장례식은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됐다. 장지는 망우리공동묘지였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번, 박동완 독립지사 바로 곁에 안장됐다. 이때 나용환 이종일 두 분도 이장 안장됐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7분의 묘소가 망우리에 있다가 현재는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세 분만 남아 있다. 2009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청림(淸林) 홍재만(洪在萬)(우노실버웨어 대표) 은주전자 50년 만든 명장이 홍병기 손자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창신동까지 홍부자집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모두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손자 홍재만은 어린 시절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1972년 13살 초등학교 졸업 후 야간중학교 다니는 어린 시절부터 서울 종로 금속공예 공방 견습공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먹고 자야 했다.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금속공예 명장이 되었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우노공방’ 홍재만 대한민국 금속공예 명장(60)의 터전이다. 공방 안에선 홍 명장을 포함해 6명의 50~60대 남성들이 제각기 성인 주먹만한 쇠덩어리에 동그란 은판을 얹어 망치로 두드린다. 은으로 찻주전자를 만드는 중이다. 이 주전자는 판매가가 5천만 원이 넘는 명품이다.
3.1혁명 이후에는 고려혁명당 이끈 천도교 중진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인암(仁菴) 홍병기(洪秉箕, 1869.11.5.~1949.1.26.)
도호 인암. 1869년 음력 11월 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 그 후 천도교 장로로 있으면서 교세 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1혁명 때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6년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망우리에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에 안장됐다.
홍병기는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1869년 고종 6년 양력 12월 10 아버지 홍익룡(洪益龍)과 어머니 한익화(韓益嬅)의 아들로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운회(運晦), 도호는 인암이다. 참봉 벼슬 양반집 서자로 태어난 그는 신분차별로 인해 청년기에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닦았으며 한학을 공부하여 고문에 능통했다. 1887년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신분적 한계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1892년 24세 때 당시 시대 상황과 개인적인 고민 등으로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어 교리를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1893년 보은군 속리면 장내리에서 개최된 동학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 소위 제2차 갑오농민전쟁 때 최시형의 명을 받고 임학선과 함께 그는 경기도 여주에서 기포하였다. 10월에 홍병기는 휘하 교인들을 이끌고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에 도착하였다. 경기도 편의장 이종훈과 편의사 이용구 등의 지휘를 받으며 그곳에서 500명의 포군 등과 대치하였고, 보은군 장내리로 향하던 중 충북 괴산에서 그곳 수령이 이끄는 관군과 충주에서 온 수백 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손병희, 이종훈 등과 최시형을 시종하며 도망을 다녔다. 1898년 최시형이 관헌에 잡혔을 때, 홍병기는 손병희, 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을 구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시형이 뜻하지 않게 처형되자, 동학교단은 도통의 전수와 노선의 설정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다. 이때 홍병기는 연원 관계에 따라 손병희를 지지하면서, 측근으로서 보필하였다. 1900년 동학의 도통이 손병희에게 전수되었을 때, 편의장이란 직책과 대정이라는 원직을 받고, 손병희로부터 인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동학의 중견 인물로 성장하였다.
1901년, 일본에 외유 중인 손병희가 박영효, 조희연 등의 개화파 인물과 접촉하며 동학의 개화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홍병기는 손병희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03년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 육군 참모부의 차장인 다무라(田村怡興造) 등과 제휴하여 친러파 내각을 붕괴시킨 후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는 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급작스런 다무라의 사망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04년에는 손병희가 일러전쟁의 혼란기에 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홍병기 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 4월경에는 동학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로 정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대동회의 기치 아래에서 시위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동학지도부가 일본과 모종의 협의 하에 1904년 10월 진보회를 설립하고 ‘흑의단발’을 내세우며 갑진개화운동을 추진하였을 때도 홍병기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4년 말 이용구가 진보회를 친일단체인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한 후에는 일진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2월 일진회의 매국 행위에 분노한 민중들이 동학을 매국 종교라고 비난하자, 손병희는 위기감을 느끼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재탄생시켰다. 홍병기는 보문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어 교회 활동을 전념했다. 이용구계와 김연국계의 천도교인이 시천교를 분립하여 교단의 운영이 곤란해지자 천도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교회 내 위계가 1907년 고문, 1908년 경도사에 올랐고, 시무하던 직무도 1910년 현기사장 서리, 1911년 대종사장으로 상향되었다. 1910년대 전반에는 대종사장으로, 대종사장에서 물러난 1916년 이후에는 장로로서, 천도교의 중요사항을 결정하여 교세를 신장시키고 교인을 교육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의 천도교 대표들과 만나, 독립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찬성하여 27일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위의 4인 및 이종일·이종훈·임예환·권병덕·나인협·김완규·나용환·홍기조·박준승·양한묵 등 천도교 동지와 다시 만나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천도교계 민족대표 1인으로 서명과 날인 하였다.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33인 가운데는 무관 출신이 권동진 ·홍병기 두 분이지만 구한말 시위대 부교(중사)를 지낸 이필주 포함하면 3명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당시 나이)
- 천도교(15명): 손병희(59)·권동진(59)·최린(42)·오세창(56)·임예환(55)·권병덕(53)·이종일(62)·나용환(56)·나인협(49)·홍기조(60)·김완규(44)·이종훈(65)·홍병기(51)·박준승(54)·양한묵(58)
- 기독교(16명): 이승훈(56)·박희도(42)·최성모(47)·신홍식(48)·양전백(51)·이명룡(47)·길선주(51)·이갑성(31)·김창준(31)·이필주(51)·오화영(40)·박동완(35)·정춘수(45)·신석구(45)·유여대(42)·김병조(44)
- 불교(2명): 한용운(41)·백용성(56)
민족대표에 서명하지 않은 주요 인사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함태영 외에 송진우와 현상윤 등이 있다. 이들은 3.1만세운동 거사 후의 지속적인 운동과 지도를 맡기 위해 서명에서 빠졌다. 그리고 최남선은 스스로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으므로 그대로 받아줬다.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3.1혁명을 주도한 인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천도교: 박인호(66)·노헌용(53)·이경섭(45)·한병익(20)·김홍규(45)
- 기독교: 함태영(48)·김지환(29)·안세환(33)·김세환(32)
- 교육계: 송진우(31)·현상윤(28)
- 문인: 최남선(31)
- 무직: 임규(51)·김도태(29)·노정식(30)
- 학생: 강기덕(31)·김원벽(27)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에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 만세를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제 당국의 조사과정에서 일본 관헌의 가혹한 취조와 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기회만 오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답할 정도로 강한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당초 일제는 손병희 등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등 48명을 '내란죄'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죄목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바뀌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김완규 ·박준승·최준모와 함께 출옥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와 오지영 등과 함께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신문화운동’이란 개량적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천도교중앙총부의 집권파의 노선에 반대하여 교인의 대표인 의정원을 선출한 후 이들로 구성된 의정원의 결의로 교회의 중요사무를 처리하려고 하였다. 또 종의원·종법원·종무원의 삼원제를 실시하여 교권의 분립을 이루고, 선거로써 교주를 선출하고, 교주와 수위의 봉급을 동일하게 할 만큼 극단적인 천도교의 평등 이념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천도교 내 혁신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2년 말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개량적 문화운동을 반대하고, 혁명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2년 7월 14일 이종훈·최동희·송헌·이동락·김광희·이동구·김봉국 등과 서울에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종훈이 고문, 최동희가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송헌이 비서, 이동락이 해외조직부장, 김광희가 선전부장, 이동구가 해내조직부장, 김봉국이 해내선전부장, 박태윤이 재정부장, 김치보·강창선·지동섭·김홍종·강도희·김문벽·이동욱·강명혁·김병식·손두성이 위원에 임명된 가운데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항일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외교부장 최동희를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동휘·한명세 등과 협의한 후 소비에트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24년 4월 5일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나용환이 부위원장, 윤익선이 내무위원장, 최동희가 외무위원장, 김진팔이 재무위원장, 정계완이 선전위원장, 이종훈이 사성위원장에 임명된 가운데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최동희 등을 통하여 천도교와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제휴를 맺고,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한 후 대일항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러시아가 일소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 탓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고려혁명위원회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최동희와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등이 정의부의 정이형·양기탁, 연해주에서 만주로 온 주진수·이규풍 등과 협의하여 1926년 3월 지린성에서 정의부·천도교연합회·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무장투쟁과 자치조직을 담당할 지도정당조직인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동구·김봉국 등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고려혁명당에 가입하여 당원을 모집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종락이 지린성 창춘에서 체포되어 고려혁명당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1927년 1월 29일 만주에서 신의주경찰서의 경부보에게 체포되었다. 근 60세의 노인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2년 가까이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이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 5일 가출옥하였다
종로구 소격동 119-1에 살았던 홍병기는 출옥 후 동대문 밖 손병희의 사저 상춘원에서 늦게 얻은 아들 인섭(영섭)과 함께 지냈다. 1930년 8월 29 국치일 무렵 아들 인섭이 모 사건의 범인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신문 사회면에 이름이 올랐다. 당시 22세의 인섭이 국치일 “8월 29일을 전후해 서울 시내 숭인동에 '불온한' 격문을 붙이다 붙잡혔다. 취조 과정에서 영섭이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홍병기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매일신보, 1930.9.11.)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홍병기는 3.1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백범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충칭에서 환국하자 그는 3.1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또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奉戴·공경하여 받듦)를 천명하였으며, 임정 계열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동학혁명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9년 당시 홍병기는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2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1월 17일 오후 1시 40분경, 행당교를 지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그의 왼쪽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즉시 국방부 제2육군병원으로 호송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중상인데다 워낙 고령이어서 위독한 상황이었다. 사고를 당한 지 9일 뒤인 1월 26일 오후 8시 15분, 홍병기는 만 80세로 환원(還元)하였다. 장례식은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됐다. 장지는 망우리공동묘지였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8번, 박동완 독립지사 바로 곁에 안장됐다. 이때 나용환 이종일 두 분도 이장 안장됐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7분의 묘소가 망우리에 있다가 현재는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세 분만 남아 있다. 2009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청림(淸林) 홍재만(洪在萬)(우노실버웨어 대표) 은주전자 50년 만든 명장이 홍병기 손자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창신동까지 홍부자집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모두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손자 홍재만은 어린 시절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1972년 13살 초등학교 졸업 후 야간중학교 다니는 어린 시절부터 서울 종로 금속공예 공방 견습공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먹고 자야 했다.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금속공예 명장이 되었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우노공방’ 홍재만 대한민국 금속공예 명장(60)의 터전이다. 공방 안에선 홍 명장을 포함해 6명의 50~60대 남성들이 제각기 성인 주먹만한 쇠덩어리에 동그란 은판을 얹어 망치로 두드린다. 은으로 찻주전자를 만드는 중이다. 이 주전자는 판매가가 5천만 원이 넘는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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