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대한민국 라디오 방송 최초 아나운서 이옥경
한국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과 최초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 부부
노창성(盧昌成, 1896~1955) 이옥경(李玉慶, 1901~1982.5.1.) 40주기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는 마현경과 이옥경이다. 1926년 11월 30일 서울 중구 정동,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방송 개시 직전인 1927년 1월 5일 조선인 아나운서 2명을 채용했다. 이옥경과 마현경이다. 이옥경은 조선인 최초의 라디오 아나운서이며, 마현경은 최초의 공채 출신 아나운서였다. 둘은 모두 경성방송 개국 멤버의 아내이기도 했다. 이옥경의 남편은 기술부 직원 노창성, 마현경의 남편은 방송 사상 최초의 PD로 꼽히는 최승일이었다. 마현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땐 노래를 잘 불러 '여왕' 별명을 얻었다.
첫 여자 아나운서의 가족 중에도 선구적 인사들이다. 마현경 아나운서의 시누이, 즉 남편 최승일의 여동생이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다. 이옥경 아나운서 아홉 자식 중 둘째 딸이 바로 한국 최초 여성 패션디자이너이자 판탈롱·미니스커트를 소개한 본명이 노명자인 ‘노라노’다.
2021년 4월 중랑구청 발주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사흘째 날 대한민국 최초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과 방송인 노창성 부부 합장 묘지를 찾았다. 묘지번호 105601이다. 이옥경과 노창성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이옥경 아나운서는 인천세관 관리이자 황태자 영어교사이며 제령학교 영어 강사였던 이학인 씨의 무남독녀로 인천에서 1901년 9월 7일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미국 망명길에 중국 안동에서 영국인 친구를 만나 안동 영국 세관에 근무하여 이옥경도 안동현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옥경이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며 귀국해 오늘날 인천여자고등학교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했다.
그녀는 학창시절 공부뿐만 아니라 명문에 명필 마라톤 대표 전교 테니스 대표선수 압록강에서 연마한 아이스 스케이팅 선수 등 노래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빼어났다. 졸업하던 해 일본신문에 ‘꽃 중에 꽃’이라 대서특필했다. 그녀의 빛나는 두 눈동자, 배꽃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름한 그에 얼굴, 호리호리한 몸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방송국 안 여러 사람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였다.
이옥경은 경성방송국 개국 첫날 발탁되어서 방송을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용 과정도 ‘첫날 발탁’이나 ‘추천’에 의했다. 그녀를 ‘발탁하고 추천한’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남편인 노창성이었다. 그 무렵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직원으로 방송국 설립의 기술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1926년 6월부터 시험 방송을 하던 중 개국이 가까워 아나운서가 모두 남자여서 청취하는 시민들이 딱딱하게 느낄 것을 염려한 노창성이 문득 미모에다가 고운 목소리를 겸비한, 그러면서 일본어에 능통한 부인 이옥경에게 아나운서 역할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경성방송국은 1926년 12월 서울 중구 정동 1번지,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2층 사옥을 준공한 뒤 이듬해 1월부터 시험방송에 나섰다. 초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7대 3의 비율로 방송하다가 조선인의 불만이 커지자 1927년 7월부터 일본어와 조선어의 비율을 6대 4로 조정했고, 1933년 4월 연희방송소가 문 연 뒤로는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조선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나눠 운영했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부터 진행된 경성방송국 개국식은 이옥경 아나운서와 방송부 주임 일본인 미쓰나카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라디오에서는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라고 시작하는 일본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첫 방송 전파가 쏘아 올려진 것이다. 1906년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 탄생한 지 21년, 세계 최초의 정시 라디오 방송국 미국의 KDKA가 출범한 지 7년, 일본 도쿄에서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JODK'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일본에 할당한 호출부호(콜사인) 'JO'에 도쿄(AK)·오사카(BK)·나고야(CK)에 이은 4번째 방송국이라는 뜻의 'DK'를 합친 것이었다. 주파수는 중파 690㎑, 출력은 1㎾였다. 경성방송국 개국한 다음 날 소파 방정환이 최초로 동화 「어린이와 직업」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1928년 둘째 딸 노라노(노명자)가 태어나 1930년 방송국을 떠났다. 자녀가 5남 4녀다.
라디오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정작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쌀 한 가마니 값이 5원일 때 월 청취료가 2원이고 온 가족이 들을 수 있는 수신기 가격은 100원이었으니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려면 경성방송국과 계약을 맺어야 했고 수신 계약자는 청취허가장을 대문 밖에 붙여야 했다. 개국 당시 청취자는 조선인 275명을 포함해 1천4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인기가 급등해 조선어 전용 방송이 생겨난 1933년에는 2만5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당국이 불법 청취자 단속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5년부터는 지방에도 방송국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를 탄생시킨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은 서울 출신으로 동경고공 전기화학과를 졸업한 기술자였다. ‘실험방송의 주역 초대 방송관리국장과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장 및 사업부장’ ‘동양전선주식회사 생산부장’ ‘조선방송협회 방송국장’ 그리고 훗날 ‘공보처 방송관리국장’을 지냈다. 1926년 11월 첫 전파 발사하며 마이크로폰 앞에서 “지금은 실험방송 중입니다”이라고 외친 노창성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두 사람은 만주 안동 소학교 선후배로 동경 유학 시절부터 사랑이 싹터 결혼했다.
필자는 이옥경 노창성 부부가 잠들어 있는 산줄기를 예체능 능선이라 부른다. 위로부터 음악영화의 일인자 노필 영화감독, 홍난파와 쌍벽을 이룬 산남 채동선 작곡가(이장), 만능 스포츠 스타이자 체육 행정가인 송운 이영민 체육인(비석 남음), 의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는 차중락 가수 등이다.
매년 7월 31일 조봉암 추모식에 참석하는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께서 필자의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겠다며 30권을 사주었다. 직접 찾아가 뵙고 4.19 세대 중 정치를 하지 않고 문화재단을 꾸리는 자부심과 대한민국 해양 대국의 기틀과 꿈을 이야기하였다. 일제강점기 인천 출신 김활란, 조봉암, 이옥경, 함세덕 등을 인천의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데 이옥경 아나운서 근무 기간 너무 짧아 아쉽다고 말씀했다.
미국에 이민 간 대학 과 동기이며 인천 출신 심규환 친구가 필자의 망우리공원 활동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고 있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최승희 사진 9장을 구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활용하길 바란다며 주소를 요구하였다. 재차 생년월일 보내라 하였다. 관세를 물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중랑구청에 기증하려는데, 중랑구청 어디에도 기증품을 보관하고 관리할 수장고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망우리공원 인물들의 후손들은 인물의 유품을 기증하고 싶어도 뒤로 미루는 실정이다. 김영랑 시인의 장례식, 안석영 묘비와 영랑 묘지 이장 및 비문을 세우는 날, 후손들의 성묘 사진 등을 영랑의 막내딸인 김애란 여사한테 받은 지가 7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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