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동학혁명 한용운 나용환 홍병기 지석영

정종배 2022. 5. 11. 18:31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동학혁명 기념일 한용운, 나용환, 홍병기, 지석영

오늘은 동학농민혁명 128주년 기념일이다. 법정기념일이고 비공휴일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국가기념일이다.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봉건 제도에 항거하여 궐기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애국애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2019년 제정되었다. 기념일은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이다. 이날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개최되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의 경우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다.
망우리공원 인물 중 동학혁명에 직접 가담하고 활동한 민족대표는 나용환, 한용운, 홍병기 세분이다. 천도교 대표는 오세창 선생 이종일 두 분이다. 또한, 기독교 대표인 박희도, 박동완 두 분과 이갑성의 아내 차숙경의 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동학혁명 관군인 송촌 지석영도 망우리공원 가족묘지에 묻혀 있다.

봉암(浲菴) 나용환(羅龍煥, 1864~1936)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1864년 8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 숭인면 흥인리에서 태어났다. 소설가 나도향의 원적지이다. 나용환의 본관은 나주, 도호는 봉암과 담(潭이다. 어려서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려고 몇 차례 과거시험을 보기도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고향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지냈다. 23세에 동학에 입문하여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에는 19세에 동학에 입문한 나인협(羅仁協)과 함께 평안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나용환은 천도교인이다. 1907년 5월 나용환은 정주순독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5월에는 도사에 임명되었다. 또 1910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현기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11년에는 공선관장에 임명되었다. 3·1운동 직전까지 그는 중앙총부에 머무르며 교회의 중요정책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성천 등 서북지역의 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권동진은 (1935.6.) 기고문에서 "손병희가 천도교의 재정과 행정에 대해서는 오영창, 나용환 두 분을 가장 신임했다"고 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6년 5월 18일 정부는 나용환 등 독립운동가 14명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하단 22번에 안장됐다.
그의 장남 경덕은 소파 방정환의 장녀 경화와 결혼하였다. 1933년에 조직된 소녀악극단 '낭랑좌' 소속의 가수 나선교는 그의 딸이다.

인암(仁菴) 홍병기(洪秉箕, 1869~1949)는 1869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홍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홍익룡은 참봉參奉의 벼슬을 한 양반이었으나, 적출은 아니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무예를 닦았으며, 19세 때인 188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신분적인 한계로 고위직에 오르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홍병기는 24세 때인 1892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정확한 입교 동기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동학에 입교한 후 여주지역에서 포교활동을 벌였고, 자역의 접주로 성장하였다. 동학농민 운동 당시인 1894년 9월, 최시형의 명을 받고 여주에서 임학선 등과 함께 기포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수십여 인의 교인들이 있었다.

1894년 10월, 홍병기는 휘하 교인들을 이끌고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에 도착하였다. 경기도 편의장便義長 이종훈 등의 지휘를 받으며 그곳에서 500명의 포군 등과 대치하였고, 보은군 장내리로 향하던 중 충북 괴산에서 그곳 수령이 이끄는 관군과 충주에서 온 수백 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손병희, 이종훈 등과 최시형을 시종하며 도망을 다녔다. 1898년 최시형이 관헌에 잡혔을 때, 홍병기는 손병희, 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을 구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시형이 뜻하지 않게 사망하자, 동학교단은 도통의 전수와 노선의 설정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다. 이때 홍병기는 연원 관계에 따라 손병희를 지지하면서, 측근으로서 보필하였다. 1900년 동학의 도통이 손병희에게 전수되었을 때, 편의장이란 직책과 대정大正이라는 원직을 받고, 손병희로부터 인암仁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동학의 중견 인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1905년 12월 동학이 근대적인 종교를 표방하고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이후, 홍병기는 보문관의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활동에 전념하였다. 1909년 10월 전제관장典制觀長, 1910년 1월 현기사장 서리, 1911년 6월 대종사장大宗司長 등의 주직에 임명되어 포교를 확대하고, 교회를 정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교회의 장로에 선임되었다. 3·1운동 직전의 홍병기는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고 천도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거의 유일한 대한민국장 근현대사 거인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고향 충남 홍성에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고 그 여파로 고향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청년운동, 농민운동, 소년운동 등 사회운동을 맹렬히 전개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며, 만해는 천도교에 대해 애정 어린 충고의 말을 남겼다.
“천도교가 과거에 있어 그만큼 크고 튼튼한 힘을 얻어온 것은 돈의 힘도 아니요 지식의 힘도 아니요 기타 모든 힘이 아니고 오직 주문의 힘인 줄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문을 일종 종교적 의식으로 보아 우습게 보는지 모르나, 나는 무엇보다 종교적 집단의 원동력으로서 주문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봅니다. 천도교의 그만한 힘도 주문에서 나온 줄로 생각합니다. 보다 더 심각하게 종교화가 되어 주십시오.”(‘신인간’ 1928년 1월호)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4년 03월과 2019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묘역 중 가정 먼저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다. (재)선학원은 매년 만해 스님의 다례재를 열반 일인 양력 6월 29일 혈육인 한영숙 여사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해 오고 있다. 이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묘지번호 204411이다.

옥파(沃坡), 묵암(黙菴),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은 독립선언서를 2만 1천부 인쇄했던 보성사 사장으로 직접 인쇄하고 비밀리에 배포했으며, 인쇄 도중에 총독부의 한인 형사가 들어와 적발될 위기에 처했으나 손병희가 거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보성사는 또 제1호 1만부를 찍어 3월 1일 서울시내에 살포하는 등 몇 차례 지하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곧 가정부(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지하신문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곳곳에서 제작되어 만세시위와 함께 살포되었다. 태화관과 보성사는 얼마 후 의문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서명하고 태화관 현장에서 직접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출옥 후 그의 일기대로 제2의 3.1독립운동을 준비했고 실행한 것이 '자주독립선언문' 이었다. 그러나 인쇄 도중 사전 발각되어, 더욱 심각한 감시, 탄압을 받았고, 그 결과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1925년 8월 31일, 68세를 일기로 영양실조로 아사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선생은 국권 강탈 이후 누구보다 일관되게 대규모 민중운동을 통해서 국권회복을 주장했으며, 갑오 동학혁명의 실천이며 갑진 개혁의 당대적 실천으로 해석했다. 선생은 특히 동학을 민중적 종교, 애국적 종교, 민주/민권적 종교, 개혁적 종교, 여성친화적 종교로 해석함으로써 3.1독립운동과 같은 민주, 민족, 민중적, 근대적 혁명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고 보았다. 선생은 동학천도교를 실학, 개화사상과 함께 가장 강력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지침으로 제시하였다.‘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조선 후기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을 전파한 조선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 자는 공윤, 호는 송촌 또는 태원이며 한의사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5대 의사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자라서는 개화사상가 강위에게서 서양의술과 신지식을 배웠고 특히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 종두법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전파했다. 후에 의학교(서울 의대)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한글과 한국어에도 관심을 가져 초기 국문연구의 초석을 닦았고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저술로 『우두신설』, 『자전석요』 등을 남겼다.

1894년 9월 2일 광양농민군 영호대도소 대장인 김인배와 부대장인 류하덕이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하동을 점령하여 도소를 설치하였고 그 여세로 곤양을 거쳐 진주를 9월17일에 점령하였다. 하동 다솔사에 모인 하동 동학군 수천 명은 진주 접경의 완사역에서 순천 농민군과 합세했다. 농민군의 세력이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에서 급속하게 확대되자 조선의 개화정권과 일본 측은 각각 대비책을 강구했다.

조정과 감영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임명했다. 9월 25일자로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차하해 현지로 파견했다. 지석영은 9월 26일 대구를 출발해 28일 부산에 도착했고 감리서와 일본 영사관을 만난 후 출동해 배편으로 29일 통영에 도착했다. 지석영은 통영에서 포군(砲軍) 100명과 군관 4명 즉 104명을 인계받은 다음 10월 2일에 고성으로 향했고 고성에서 일본군과 합류했다. 그는 통영의 관군 및 군수지원을 받으며 진주와 하동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했다. 이때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서 동년 10월 22일에는 하동에서 크게 패하여 섬진강에 빠져 죽은 농민군이 3천 300여 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밤이면 고향 서당 사랑방에 모여든 어른들이 집단으로 외우는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훔리치야 도래 훔리함리 사바하”를 뜻도 모르고 따라 외우고 혼자 다닐 때도 중얼거렸다. 지금의 신흥종교라 말하는 동학에 뿌리를 둔 증산교 보천교 일파의 주문을 외우며 집안과 마을의 안녕을 빌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한다. 새마을 운동 이후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은 사라졌다.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들은 집안 내력은 다음과 같다.

계유정란 고명대신 우의정 진주정가 충장공파 파시조 충장공 정분과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마지막 전투대장 선무일등공신 15대조 성재 정감 장군을 기리는 충신각을 1867년 고종 4년에 고향인 표산마을에 건립하였다. 삼정문란 때도 공신 후예라 면제되었다.

1862년 4월 임술민란(봉기)라 일컫는 함평민란 선봉장 정한순은 월야면 출신이고 박태원의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첫 장인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의 주인공이었다. 30년 후 동학혁명 1894년 11월 16일부터 17일 이틀 동안 치른 고막원(교) 전투에서 동학군인 증조부는 관군에 의해 부상을 당하여 10여 년 넘게 병상에 누웠다 생을 마감했다.

6.25전쟁 9.28수복 후 퇴각하는 인민군이 학교면 사거리 월산리 주민들을 하룻밤에 22명을 학살했다. 내 고향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주변 마을에서 저 마을은 오늘밤 쑥대밭이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하였는데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완장 찬 이가 이 마을은 내가 머슴을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과 동학혁명 동학군 후손이라며 그대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