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추담 허연

정종배 2022. 5. 31. 16:34

 

 

망우리공원 문인열전(11)

 

의명학교(삼육중고) 출신 교육가 흥사단 단우로 수양동우회 사건 옥고 도산의 발자취에 묻어 달라

 

정종배

 

추담(秋潭) 허연(許然, 1896~1949)

 

박꽃은 소박한 꽃 흰 꽃 / 조선의 옷 빛 / 물들지 않은 조선의 옷 빛 / 순박한 그 맛은 / 소선 사람만이 아느 귀한 꽃 // 황혼에 새 이슬에 / 고개 드는 흰 꽃 / 수집은 조선처녀 / 빛없이 타는 백열, / 해진 뒤에 박나뷔만을 기다리는 / 깨끗한 꽃 // 박꽃은 소박한 흰 꽃 / 조선의 옷 빛 / 물들지 않는 조선의 / 순박함으로 / 조선 사람만의 / 가슴에 피는 / 귀한 꽃 // 황혼黃昏, 새 이슬에 / 고개드는 / 수줍은 조선 처녀 / 순결로 타는 백열白熱 / 해진 뒤 오는 박나비만을 기다리는 깨끗한 꽃 허연 박꽃

 

추담 허연이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둔 듯 1942917일에 쓴 머리글과 원고지에 차례를 매기었다. 1949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한 갑자 지나 2010년 자식들이 그 차례를 지키어 시집 박꽃(다솜출판사)을 출간하였다. 허연은 시집 제목을 박꽃으로 정하였다. 그는 시집을 내려고 정리한 시 중에서 박꽃을 아꼈다. 그의 시 박꽃은 일본 패망을 은유적으로 예언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며, 막내아들 달이 아버지의 시 군데군데에 자신의 감상과 주석을 곁들여 읽는 분의 편의를 돕도록 하였다.

시집 박꽃발간을 주도한 허연의 둘째 아들 일이 쓴, 시집 서문에 해당하는한 갑자 늦어진 시집을 내면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갑자 늦어진 시집을 내면서

2005년 연말의 일입니다. 내년 2월이면 만 65세를 맞이하여 40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친다는 생각으로 정든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언젠가는 발간하려던 아버님 유고를 책꽂이 구석에서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과 새삼 아버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에 만사제폐하고 원고를 정리하였습니다.

아버님 유고는 대략 192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후반까지 20년간에 걸쳐 쓰신 글입니다. 이 시기는 일제의 강점, 해방, 분단의 소용돌이가 이 땅에 불어닥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중략)

유고에는 미국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글, 조국에 돌아오시어 고향 등지를 여행하시며 감상을 적으신 글, 일제의 현실과 사회의 부조리를 개탄하시는 글 및 해방 후 분단의 현실을 괴로워하시는 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지 반백 년, 이 글을 준비하신 지 한 갑자가 지난 지금에야 이 늦된 자식이,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젊으실 적의 아버님의 글을 읽으며 회한에 젖습니다. 2010년 둘째 아들 일

 

3.1혁명 제100주년을 맞이하며 독립유공자 발굴에 대한 사회적 목소리가 높다. 평남 순안의명학교 출신의 교육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허연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의명학교는 오늘날 삼육중·고등학교 및 삼육대학교의 전신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 설립했다. 삼육(三育)은 지··체를 육성한다는 의명학교 교육이념을 뜻한다. 1949년 함남 요덕군으로 이전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서울 옛 홍릉수목원 종묘장인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시조사 삼거리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한국본부와 출판사 시조사와 휘경동 배봉산 자락인 사도세자 능이었던 영우원터에 삼육서울병원등이 자리 잡고 있다.

허연 선생의 활동은 그간 재림교회 교단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6년 한국삼육고등학교 110주년 개교기념식에서 당시 동문회장 정성화 장로가 회고담으로 의명학교 3,4회 졸업생 중 독립운동가 최경신·허연·강봉호·이면식·유영순 등 선배들이 흥사단 단우로 활동하며 상해임시정부와 깊은 관련을 맺고 활동하였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짧게 언급하였다. 망우리공원에 잠들었던 재림교회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 선생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권학규, 김선문 두 분도 망우리에 이장하고 묘지를 썼다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재림교회 독립운동가 찾기 일을 하는 류대훈 장로는 망우리공원을 샅샅이 뒤지며 허연 선생 일대기를 뮤지컬로 공연하기 위하여 삼육대학 학생들과 준비하고 있다.

추담은 허봉국(奉國)과 김씨 사이에 3대 독자로 1896811일 평남 순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호적에는 평남 안주군 용현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허연은 다섯 살에 아버지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고서 외가에서 한문을 공부하며 자랐다. 1908년 러셀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던 평남 순안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 침식을 제공받는 급사로 들어가면서 재림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망우리공원 장덕수와 조봉암 선생도 어릴 적 가난으로 급사로 사회의 문을 열었다. 러셀 박사 곁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어와 병원 업무를 배웠다. 러셀 박사는 너도 그처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근면 노력하여 위대한 인물로 되라는 뜻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 이름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했다. 순안의명학교 중등교육을 러셀 박사의 주선으로 1913년 입학하여 학업을 병행했다. 191936일 순안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일경의 체포를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들고 상해로 6개월을 걸어서 망명했다. 그해 상해 삼육대학(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는 망우리공원에 가족묘지를 마련한 학병 출신 한국광복군 장준하와 김준엽 등의 도보 행군과 비교하여도 떨어지지 않은 장거이다. 그것도 나 홀로 6개월을 걸어가며 난관을 뚫고 간 추담의 집념과 끈기와 지혜는 되새겨 볼 일이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동지들과 함께 장장 6,000리를 걸어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순안의명학교 출신인 김창세(金昌世, 1893~1934, 121) 박사는 192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 공중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한민국 보건학의 선구자이다. 독립운동가 김창세 박사는 망우리 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으로 망우리에 묻혔다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아래 동서이자 주치의였고 흥사단 단우이며 재림교회 교인이었다.

192112133.1예배당에서 열린 상해유학생회(留滬學生會)의 모임을 소개하며 허연·주요섭·박헌영 연설 소식을 실었다.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조선 청년들의 상해유학생회는 당연히 상해임시정부가 깊게 관여했다.(임시정부 발행독립신문, 1921.12.26.) 이때 허연은 김규식과 인연을 맺었다. 이즈음, 일경의 추적을 피해 어릴 때 이름이던 용성 대신 허연으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꿔준 이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항일 독립운동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박사다. 김규식 박사는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대한민국 기독교 최초 유아세례를 받은 독립운동가 서병호(徐丙浩, 1885~1972) 목사와 동서지간이다. 두 분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의 종고모부이다.

추담은 1922521일 상해삼육초급대학을 졸업한 그는 귀국해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2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과수원, 호텔 식당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아 김규식 박사의 추천으로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 편입했다. 이 대학은 김규식 박사의 모교이다. 19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 경제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며, 1932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뉴욕에서 흥사단에 입단했다. 그의 흥사단 입단(265)을 권유한 이도 1923년 간토대지진 참상을 경험하였고 의명학교 동창이며 7살 어린 한승인(韓昇寅, 1903~1990, 260)이었다. 이기붕의 부인이 된 박마리아와 미국 유학 시절 선을 봤다. 1933년 귀국해 서울에 거주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의 뜻을 좇아 협성실업학교(현 광신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을 차지한 남승룡 선수를 키워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지식인이 불령선인으로 찍혀서 일경의 검거령에 희생될 때, 수양동우회 사건은 1937재경기독교청년면려회가 각 지부에 기독교인으로 독립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담은 문서를 발송한 게 일경에 발각되었다. 그 배후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동우회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1937610일부터 1938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하였다. 이에 안창호·이광수·김성업 등 동우회의 지역 지부 대부분 회원이 검거·재판 끝에 2년에서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45개월간의 구금기간 동안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최윤세·이기윤은 옥사하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한편 검거 뒤인 19386월 김기승·전영택·차상달·현제명·홍난파 등 수양동우회원 18명은 변절하여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는 오점을 남겼고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추담도 누하동 자택에서 긴급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미결수로서 12개월을 복역한 후 출소했다. 일경은 조서에 조선 독립을 궁극적 목적으로 결성한 미국의 흥사단, 조선의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수차례 회합하고, 협성실업학교의 상업전수과를 동우회 지도아래 두는 등의 활동을 했다고 적시했다.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누하동에서 살면서 독지가의 도움으로 초급 경상학부 대학인 중앙상업학원(4년제 대학)을 창립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원장에는 이종수(후일 서울대학 사범대학 학장 역임), 교무주임 겸 영어 교수 피천득과 미군정에 참여한 한승인이 측면에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하였다. 허연 선생은 해방 후에도 흥사단 국내 위원부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9년 일제 옥고의 후유증인 폐렴으로 병석에 누웠으며, 친지인 백인제 박사가 가까이 병원을 운영하며 돌보아 주었으나 그해 812일 향년 53세를 일기로 서울 필동 적산가옥 2층에서 별세했다.

19458.15로 해방 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28명의 흥사단 단우들 중심으로 망우리 도산 묘소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추모제를 마치고 내려오며 추천한 한승인과 대화를 나눴다. 한승인은 추담에게 미군정이 부르고 있으니 거기 일부터 하나씩 하자고 제안하였다. 추담은 군정 일을 싫소. 건강도 그렇거니와, 배워먹지 못한 미국 지아이(GI)들이 우리를 미개국 취급하여 으스대는 꼴도 보기 싫고.... 이종수, 피천득 제군이 계속 돕겠다니, 지금 운영하는 중앙상업학원을 더 발전시켜 본격 대학교육에 해당하는 육영사업을 벌이겠다고 하면서 또한 나 먼저 가거든 자네가 도산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망우리공동묘지에 가족묘지 100평으로 추담을 모셨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삼거리 왼쪽 일방통행 길 역으로 10여 분 걸어 오르다 시인 김상용 묘역을 지나고 지석영 연보비가 나온다. 다시 순환로를 50여 미터 걸어가면 사색의 길 왼쪽 길섶에 회양목이 20여 미터 식재된 곳 직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30여 미터를 내려가면 추담 허연 선생의 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단비인 오석 묘비 앞면에는 秋潭許公然 勸士金貴愛之墓, 뒷면에는 公諱許然貫陽川 西紀一八九六年八月十一日生 西紀一九四九年八月十二日卒 配勸士金氏貴愛 西紀 一九六年五月三日生 西紀一九九二年五月一日卒 子 許進 逸 達 女 慶孫 許煜 鎔 棋竣이라 새겨져 있다.

허연 선생은 뚜렷한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않았다. 유족은 30여 년 전에 서훈을 신청하였다. 당시 보훈처의 서훈 자격 조건과 심사 태도에 분개하였다. 이런 심사나 서훈은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모욕이니 다시는 신청도 받지도 않겠다고 가족들이 결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6월은 보훈의 달이다. 망우리공원에는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국가보훈처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잠들어 계신다. 추담 허연을 포함하여 김기만, 나우, 박현식, 변성옥, 이병홍, 이영학, 조봉암 등이다. 보훈처와 중랑구청 및 흥사단 등 관련 단체에서 자료를 찾아 서훈을 추서하여 일제와 독재정권 아래의 맵고 신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려야 마땅하다.

허연의 3남인 허달은 아버지 허연 선생의 일대기를 소설 허연(許然 - Benjamin Yun Hugh’s Life)’이라 명명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202011월부터 7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추담 허연 선생의 3남 허달 네이버 블로그 칠십에 서다(七十而立)’에서 가족사 중 부모님 이야기소설 허연을 중심으로 허연 선생과 그 후손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 허연의 서문에 해당하는 머리글과 어머님 김귀애金貴愛 여사에 대한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머리글

이 글의 주인공 Benjamin 허연(許然)은 우리 4남매의 아버지이시다. 1896811일에 평남 순안에서 태어나 194981253세의 나이로 서울 필동에서 돌아가셔서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히셨다.

순안의명학교(順安義命學校)에서 중등교육, 연희전문 중퇴, 중국 상해삼육대학(上海三育大學)에 유학하여 초급대학교육(1922), 버어지니아주의 Roanoke College 학사(1929), 펜실베니아주의 University of Pennsylvania 경제학 석사(1932) 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흥사단에 입단, 일제하의 조선에 귀국하여 서울에 거주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뜻을 좇아 협성실업학교의 교원으로 육영 사업에 복무하였고 1938년 중앙상업학원(4년제 대학)을 창립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귀국 2년 후인 1934년 김귀애(金貴愛 - 金基善, 廉敬信의 장녀)와 결혼하여 13남을 두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조선의 지식인이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 검거령에 희생될 때 아버님도 수감되어 미결수로서 12개월의 영어(囹圄)의 고초를 당하였다.

이 글의 필자는 1943년 태어난 고인의 막내아들로서, 부친을 6세에 여의었으므로 고인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그분이 남긴 시고(詩稿), 가용한 여러 기록과 가족의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를 소설 허연이라 명명하였다. 글에 등장하는 인명과 지명, 학교명 등은 실제 기록이 있는 경우 이를 충실히 반영하였고, 이야기의 구성을 위하여 허구의 사실을 만들어 원용한 경우에는 이를 장의 말미에 밝혀, 이 글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소임도 감당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이 글이 일제하 당시 선각자의 길을 밟았으면서도 역사에 기록될 성취를 이룩하지 못하고 가신 어느 사인(私人)의 가족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많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고자 하는 이들의 가슴에 무언가 전하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써 남기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글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Benjamin(벤자민 허재영)200110월 미국에서 태어나, 올해 UCLA Biochemistry 전공 신입생으로 입학한 필자의 큰손자이다. 증조부의 미국 이름을 내려받고 미국에서 일정 기간 학업을 수업할 예정이므로, 그를 등장시켜 미래 시간과 공간의 가상 뿌리찾기 여정을 밟게 함으로써 글의 구성이 전기(傳記) 형태로 단조로워짐을 지양하고 흥미롭게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이 글의 내용 속에서 2010년 발간한 고인의 유작 시집 박꽃과 육필 일기 ‘1925년 기록일부를 이야기 전개에 맞추어 실어 아쉬운 대로 시문학(詩文學)이 평생의 취미라고 말씀하였던 고인의 풍취를 실어보려 시도하였다.

202011월 대화 한 번 나누어 보지 못한 아버지 Benjamin을 그리워하며 막내아들 허달

 

어머님 김귀애여사

193236세 나이로 흥사단에 입단 귀국하신 아버님은 협성실업학교의 교사로 부임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육영사업이야말로 우리나라가 독립은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미래를 내다보신 선각자이셨습니다.

허연 선생이 귀국한 지 2년 뒤인 1934년 한글학자 김윤경 선생 등 일제가 소위 불령선인이라고 요시찰 인물로 찍어놓은 조선인 인텔리겐차들이 모여 사는 종로구 누하동에 자리를 잡은 우리나이 39세 노총각이 10년 연하인 방년 29(1906년생) 김귀애라는 이름의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노처녀를 만난 결혼하게 됩니다.

신여성 김귀애는 황해도 배천白川 출신으로 당시 협성실업학교의 서무주임 김기선金基善 씨와 엄경신嚴敬信 권사의 큰 딸이었다. 개성의 명문 호수돈여고를 졸업하고 음악(성악, 피아노)을 전공하려는 뜻을 가졌었으나 허연을 만나 뜻을 접었다. 슬하에 큰딸 경숙慶淑(1935~ ), 장남 진(1936~1995), 차남 일(1941~ ), 막내 달(1943~ ) 13남의 가정을 이뤘다.

허연 선생은 해방 후 미군정의 참여 초빙을 고사하였다. 수필가 피천득, 서울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한 이종수 교수 등을 영입하여 중앙상업학원(상과대학)을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반 미결수로 모진 고문을 당하신 후유증이 지병으로 힘들게 연명하시다 급기야 폐렴으로 1949년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나이 44세 이어 6.25 한국전쟁 등 갖가지 어려움을 당차게 이겨내고 4남매를 길러냈다. 친정어머니 대를 이어 종교(宗橋)교회 권사 직분을 수행하며 197252967세에 시작한 세브란스병원 봉사활동 수기가 1982618일로 끝났지만, 실제 봉사활동이 마친 날은 19831110이었다. 1978년부터는 매스컴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여기저기 기록이 남아있게 되는데, 199288세로 소천하시어 망우리 아버님과 합장하였다.

 

추담의 첫째 딸인 허경숙은 이화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추담 선생이 살림 밑천이라는 첫째 딸을 어찌나 사랑하였는지 바로 밑 남동생 허진 씨가 시샘을 할 정도였다. 허경숙 씨가 아버지인 추담 선생의 살아생전 행적을 보았고 많이 들어 추담 선생의 살아생전 활동과 집안의 대소사를 증언하고 있다. 또한 학창 시절 친구들의 집안과 아버지 친교와 장례식 그리고 돌아가신 후 가정사를 소상히 밝혀주셨다. 그 말씀 중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허연 선생은 집 안팎에서 이광수, 홍난파, 오천석, 주요한, 장리욱, 이은상, 임정기, 이종수, 한승인 등 흥사단 단우들과 어울렸다. 특히 오천석, 이광수와 자주 어울리며 오천석 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아 춘원 이광수와 취하도록 마셨다. 허경숙의 학창시절 친구는 오천석 선생의 딸 오경숙, 이기붕 박마리아의 딸 이강희, 박흥식의 딸 박경숙 등이었다. 남편은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박정기로 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박정희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을 도맡았다. 3선개헌 반대하며 탈당하여 재야인사로 소일하여 허경숙 여사가 명동에서 차마 술집을 할 수 없어 죽집을 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추담의 첫째 아들 허진은 아버지를 여의고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방황하는 날이 길었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 영화 골목에서 나운규 감독과 한국 영화계 1세대로 지사감독으로 일컫는 윤봉춘 감독의 장남인 윤삼육(본명 윤태영, 1937~2020)과 곽소동, 박철민, 임하 등의 영화인과 어울리며 영화 각본을 쓴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였다. 영화 장르는 사극과 액션, 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 내용은 중국 일본 독립운동 관련 등이 많았다. 영화 <족보>(1971)는 고영남 감독으로 주연 박노식, 윤정희, 김승호 등이고 황정순, 허장강, 김희갑, 송해, 장혁, 양훈, 배삼룡, 박병호 등이 출연한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고 <사학비권>(1978)은 성룡이 주연배우로 한국과 홍콩 합작품이다.

허진의 각색 영화는 <파행>(1990), <회춘녀>(1989,) <맷돌>(1988), <난운>(1987), <안녕 도오쿄>(1985), <양귀비>(1985), <이혼법정>(1984), <나는 다시 살고 싶다>(1987), <젖은 풀 젖은 잎>(1986), <복마전>(1983), <종로부르스>(1982), <대형출도>(1981), <비천권>(1980), <죽음의 다섯손가락>(1978), <사학비권>(1978), <십자수권>(1978), <칠협팔의>(1978), <강인의 무덤>(1975), <족보>(1971), <한 많은 두 여인>(1971), <여정>(1966), <삼천포 아가씨>(1966), <섬 색시>(1966), <활빈당>(1965), <나를 깊게 묻어주오>(1964), <마도로스 박>(1964) 등이다.

다대포 간첩 영화화 무장간첩 전충남, 이상규의 증언과 수기를 토대로 반공영화 <다대포서 다시 살다>가 동협상사에 의해 제작된다. 임하, 허진 씨가 각본을 쓰고 박용 감독이 연출하는 이 영화는 작년 123일 부산 다대포에 침투했다. 생포된 두 사람이 증언을 통해 무장간첩 및 특수공작원들의 훈련, 침투상황을 폭로한다. 1984426일 조선일보에 기사를 통해 각본가 허진 씨의 활동을 알 수 있다. 영화 제작은 1987<나는 다시 살고 싶다>로 제목이 바뀌어 개봉 상영되었다.

추담의 둘째 아들 허일은 1959년 서울(경기)상업고등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1963년 제15기로 졸업했다. 2000년 부경대학교 조선공학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삼신해운과 범우해운에서 승선 생활을 하였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해양대학교의 실습선 반도호 항해사와 선장, 1975년부터 1983년까지 한바다호 선장, 1994년부터 2년 동안 한나리호 선장을 맡았다. 1984년에서 88년까지 한국해양대학교 학보사 주간, 1992년에서 94년까지 2004년 박물관장, 1998년에서 2006년까지 장보고연구소장, 1996년에서 2000년까지 한국해양학회 회장, 1985년에서 2002년까지 한국항만학회 이사, 1986년부터 2001년까지 대한요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산 영도의 향토학교 교장을 1999년부터 맡아 사회봉사 할동을 하였다. 1967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해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의 대항해자 정화의 배와 항해(3인 공편역, 심산, 2005.7), 중국의 배(3인 공저, 도서출판 전망, 2005.2.), 세계해양사(7인 공편, 한국해양대학교 출판부, 2003), 장보고와 항해해상무역(4인 공저, 국학자료원, 2001), 실습선 한나라(한국해양대학교, 1994), 선박충돌사고의 원인과 분석 및 대책(한국해양학회, 1988), 선박의 등화 및 형상물(광문출판사, 1987) 등의 저역서와 항해학 관련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2006년 허일 교수는 정년 퇴임하며 해양수상록 바다에서 주운 이삭(다솜출판사)를 출간하였다.

추담의 둘째 아들 허일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시절 제자이며 필자의 목포 홍일고 제자인 현재 국립목포해양대학교 한원희 총장과 가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총장 잘 지내제.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추담 허연 선생 둘째 아들이 해양대학 허일 교수이시더군. 창조문예망우리공원 문인열전 원고를 쓰려고 자료준비 차 어제 후손들과 만났네? 한총장 취임을 알고 계시더군. 늘 건강 최우선으로 멋진 나날이길...’

허일 교수님은 저뿐만 아니고 한국해양대학교 많은 동문들이 존경하는 은사님입니다. 명불허전이셨군요. 교수님보다 선장님으로 부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는 진짜 해양인입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인연들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셋째 아들 허달은 네이버 칠십에 서다(七十而立)‘ dhugh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프로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속은 코칭경영원 파트너코치로 코칭 전문분야는 경영자 코칭(CEO, 임원), 리더십/성과 코칭, 커리어/라이프 코칭 등이었다. 허달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초중고를 거치며 두 번이나 월반을 할 정도로 어학에 뛰어난 재능으로 두뇌가 명석하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MBA), 연세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중국비즈니스 최고위과정을 거쳤다. SK그룹사 부사장 / SK Academy 교수(기업문화, 수펙스추구, 리더십), 세계적 에너지/화학 컨설턴트 Nexant(ChemSystems)한국대표, 한국화인케미칼, M&H Laboratories, Ace Bioech, CEO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코칭 경력은 CEO/경영자 1:1 및 그룹 코칭: 삼성 및 포스코 그룹 사장단 코칭, LG그룹, LG화학, LG이노텍, SK그룹,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C, BASF, 두산그룹, 두산인프라코어, 동우화인켐, Solmics, 효동개발() . 코칭/리더십 강의: 중앙대정보대학원, 서울공대화학생물공학부, SK텔레콤, SK에너지, SKC, 원익그룹(), Solmics, 효동개발() , KAIST 새내기 코칭, 대학생 멘토링, 박사과정 재학자 커리어 코칭 등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등의 코칭 인증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는 마중물의 힘(여시아문, 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비움과 소통, 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SK Academy 강의록, 2012), 사찰 경영론(동국대학교 출판부, 201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