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다암 박승룡 독립운동가

정종배 2022. 6. 1. 01:07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다암 박승룡 독립운동가

함남 이원군 3.1혁명 지도자 천도교 종법사
다암(茶庵) 박승룡(朴承龍, 1872~1957) 65주기

독립운동가 박승룡은 함남 이원군 이원읍 서문리 10번지에서 1872년 9월 21일 태어나 1957년 6월 1일 서울에서 서거했다.
박승룡은 31세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33세에 이원군에 영명학교와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장려했다. 1907년 다암은 대한협회를 조직을 주도하였다. 여기에는 남궁억·안창호·윤효정·정교·정운복·이동휘 등이 참여했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를 계승하여 창립된 계몽단체였다. 전국에 86개 이상의 지회를 조직했다. 다암은 대한협회 이원지회에서 활동했다. 대한협회와 지회는 회원과 사회 일반에 대한 계몽을 위해 연설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한다. 또한 지회 회원과 사회 일반의 교화와 사회적 폐습의 교정과 사회 복지와 구제와 위생 복지 활동 등 광범위한 사회 개선 활동을 하였다. 1909년 다암은 이원 지역의 이병조 등 5명과 함께 서북학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서북학회는 1908년 박은식·안창호·유동열·이갑·이동휘·최재학 등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조직한 것이다.

이원군의 3·1독립운동은 마치 국내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큼 잘 갖추어져 있었다. 조직이 있었고, 계획이 있었고, 지도가가 있었고,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작이 있었고, 민중의 호응이 있었다.
그는 천도교도로서 조선독립단 이원지단의 이름으로 동지 이도재·김병준·공시우·장홍규 등과 더불어 3월 10일 이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동지들을 이원읍내와 인근 부락에 파견하여 거사계획을 알리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아침 700여 군중이 읍내 장터에 모여들었고 이도재·김병준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뒤 시위의 불길은 남면 차호로 비화되었다. 3월 11일 오후 1시, 김탁 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주민들은 차호보통학교 교정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차호보통학교 학생 및 주민 1,500여 명은 헌병주재소·면사무소·차호리 시장·예수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김탁 등 주도 인물을 검거하였다.
3월 11일에는 군선항에서 장홍규 등의 주도하에 100여 명의 시위가 벌어졌다. 거의 같은 시각에 동면 상화리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차호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3월 12일까지의 시위에서 피검자들이 속출하자 시위는 한동안 주춤하였으나, 다시 3월 17일 면민이 궐기하였다. 이날 약 1백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앞에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이제까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세금을 도로 내놓으라고 외쳤다.

그는 이해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8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었고,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도 역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다암은 이원군 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1927년 이원군 서면 남문리에 중외일보 지국을 설치하고 중외일보 이원지국장으로 1년간 활동했다.

다암은 천도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22년 교주 불신임이 이루어지자 그는 최준모를 의장으로 하는 종의사 20여인과 함께 지방의 교구에 공문을 발송해 이를 반대했다. 1928년 천도교 법회에서 전국 각지의 종리원대표 500여명이 참석하여 도령 최린과 부도령 정광조를 선임했다. 이때 48세의 박승룡과 한창덕 등 35명이 종법사가 되었다.

1931년 이원군 농회에서 다암을 춘계양잠교사로 배치했다. 1931년 7월 함남 이원 군청 이전반대 서남면민대회 개회사를 하면서 신축을 결의했다. 1932년 12월 천도교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 대회를 열었는데 박승룡은 구파로 1,000여명이 참가한 경운동 도교당에서 사회를 맡았다. 천도교 명칭을 천도교중앙교회를 바꿨다. 이때 장로로 권동진과 오세창이었고 박승룡은 공선관장으로 선임되었다. 공선관장이 된 다암은 이원군 번영회장으로 청사 이전 반대 진정위원으로 활동하며 함경남도 함흥 도의원에 출마했다. 1936년 천도교 중앙교회에서 천도교주 출세기념이 이루어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4년 9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152에 이장 안장됐다.
독립운동가 박승룡 묘지 터는 망우리공원 사무실에서 출발하여 화장실을 지나면 왼쪽 일방통행 길을 버리고 서울둘레길 제2코스 곧장 용마산 방향으로 걸어가면 서광조 연보비를 지나 극작가 이광래 묘역 아래 사가정역 이정표에서 50m 내려가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묘비 앞면에 ‘천도교 종법사 다암박승룡지묘’ 뒷면에 생애를 새겼다. 옆면에 자손의 이름을 출계자와 나누어 새겼다. 그는 후처와 사이에 2남(건원, 동원) 4녀의 자녀이다.
비문은 고애자 건원이 눈물로 짓고 전 서울대교수 한글학회이사 한갑수의 글씨를 새겼다.

다암의 장남 박건원(朴乾源·建遠, 1904년 1월 1일~1975년 3월 19일)은 함흥고보 재학하며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1년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1924년의 대학 예과 시험에 이과에 응시하여 3위로 합격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제1기 입학생이었다. 경성제대 재학 중 성대오케스트라에 가입, 트럼본 주자였다. 1925년 홍난파, 조선축구단 단장 백명곤 등과 함께 재즈 경음악단 설립에 참여하였다. 1930년 3월 26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7등으로 졸업하였다. 1930년 9월 논문 를 발표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외과를 졸업한 뒤, 경성제대 의학부의 외과 부수, 의학부 외과 조수를 역임하고, 체질인류학도 연구하였다. 그 후 강원도립 강릉의원의 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부 연구실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35년 조선도립의원 의관이 되고 고등관 7등에 서용되었다.
1936년 6월 13일 강릉사우회(江陵寫友會) 월례회에 작품을 출원, 〈단오〉1점으로 입선상을 받았다.[3] 5월 13일에 열린 강릉사우회 제1회 사진전에는 등을 출품하여 입선을 받았다. 1938년 9월 22일 강릉에서 신라 때의 고분과 유골들을 발견하였다. 고분에는 대규모 순장의 흔적이 있었다.

1940년 창씨개명하여 황국신민 정목일번(正木日繁)이 되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교수회의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 박외과의원을 개업하여 다년간 의술을 펼쳤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본군 항공대에 징집되었다가 귀국했다. 1945년 1월 조선은행에 입사, 출납계에서 근무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강릉군 자치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미군정하 강원도 도지사로 있던 그는 지역 유지들과 더불어 강원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다시 조선은행에 복귀했다가 1947년 3월 좌익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조선은행에서 해고당하고 종로경찰서에 15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7년 5월 10일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백인제·김성진·이용설·고병간·정구충·최상채·전성관 등 10여인과 함께 조선외과학회(대한외과학회의 전신)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47년 7월 10일 전라남도지사로 임명되었고, 8월 15일 유임되었다. 그러나 10월 17일 내무부장관 윤치영은 그를 면직처리했다. 10월 19일 휴직계를 신청하여 받아들여졌다. 1949년 1월 21일 대한적십자사 춘천지사에서 설립한 춘천적십자의료소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하였다. 1954년 6월 9일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어 제1군사령부 작전처 차장으로 부임하였다. 임대령이었던 그는 1956년 9월 28일 공군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임 공군 준장이 되었다가 1957년 10월 7일 공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1958년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1961년 라이온스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1961년 10월 대한외과학회 자문위원, 1963년 대한의학협회 이사장, 라이온스클럽 이사장, 1964년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66년 6월 27일 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의 창립발기위원이 되고, 7월 9일 과학기술자연합회 창립총회에서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