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영등포공고 열운 김규현 교장선생님

정종배 2022. 6. 1. 17:42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영등포공고 열운 김규현 교장선생님

영등포공고 교장을 역임한 열운 김규현(1904.11.10.~1956.6.1.) 66주기

열운의 유택 오른쪽 비문에는, 공휘 규현(奎現) 호 열운(洌雲) 단기 4237년(1904)갑신 11월 10일생
단기 4289년(1956) 병신 6월 1일 영면. 사자 창종 형종 환종 손 한욱 한용

열운의 유택 왼쪽의 추모비에는, 전면: 열운 김규현 성생 추모비. 후면: 민족 오천년의 얼을 말씀하시고 우리만은 부디 국가의 강성이 되라고 말씀하시던 동양의 새로운 윤리로 세계를 건설하려든 교장선생님, 선생님의 품이 영원히 그리워 저희들은 이 비를 세움니다. 단기 사천이백구십년(1957) 이월 이십칠일 영공고 제3회 졸업생 일동

열운 김규현 선생님의 출생지가 서울 영등포 지역인지, 서울교원문학회 회장을 역임한 영등포공고 김완기 선생님과 몇 번에 걸쳐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현재까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영등포공고 관련 신문 기사는 묘비의 글과 일치 한다.
간토대진재 조사요원 관련과 남방잔류동포구출촉진대회 의장 선출과 진보당 정치인 김규현 등의 활동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해당 인물이라 추정하고 이력을 찾아 기록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의 간토대진재가 일어난 후, 총독부가 동경에 생존자를 확인하고 그 명단을 신문에 공개했다.
총독부 제2회 안부조사도착 당국에서 지난 16일까지 조사한 동경지방재류동포 제2회 안부조사는 이제 새로 도착하였더라 현재 장백료기숙생 생존자(9월 16일)
총독부출장소의 제2회 안부조사는 좌기와 같이 도착하였더라 관동대지진 후의 재일동포 안부를 조사하여 알렸는데 동경시내각소산재자 총독부 조사요원 김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동아일보, 1923.9.23)

남방잔류동포구출 촉진회 결성대회 개최
조국이 해방된지 3년이 되는 오늘날 아직도 남방 이역에서 곤경에 빠져 헤매이는 동포들을 하루바삐 구출하기 위하여 6일 상오 11시 시내 견지동 중앙여자중학교 강당에서 남방잔류동포구출촉진회 결성대회가 있었다. 김규현(金奎現) 씨의 남방에 있는 동포의 실정 보고에는 참석자로 하여금 그 비참한 정경을 들으매 동포애의 눈물을 흘리었다. 탄원문 낭독 경과보고 등이 있은 후 위원선출에 있어 의장에 김규현 부의장에 정서(鄭曙) 씨가 피선되었으며 구출 방법 등을 토의한 다음 앞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하오 5시경 폐회하였다. (조선, 동아일보, 1947.4.9)

영공전도에 서광
영등포 중앙에 있는 영등포공업중학교는 그간 재정과 교실 부족으로 곤경에 놓여 있든 바 이즈음 시내 북아현동 3-12에 거주하는 김복응(金馥應, 40) 씨가 김포 부근에 있는 토지 28만여 평(시가 3천5백만원)을 동교에 희사하여 재단을 설립하게 하였고, 지방유지 김규현(金奎現,36) 씨가 증축과 수리 재료로 시가 2백여만원에 달하는 목재를 기부하여 앞으로 고급 중학교를 추진하리라 학교 당국은 물론 일반의 칭송이 자자하다.(조선일보 1949.6.24.)(경향신문, 1949.6.25.) 신문 기사 내용에 김규현의 나이가 36세로 기록되어 있는데 추정컨대 46세가 맞지 않은가 싶다.

국민회시지부임원 국민회서울특별시 본부는 6.25사변 이후 조직망이 파괴되어 아무런 활동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 31일 시청 회의실에서 상임위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부서를 선정하는 한편 초당파적 국민운동체로서 지부 재조직 강화를 적극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위원장 강창희 부위원장 김규현 최봉하(조선일보 1952.11.4)

1956년 3월 31일 하오에 중앙예식장에서 이명하 사회로 개최된 진보당(가칭) 전국추진대표자(대표자 103명)와 다수의 추진위원들이 참석하여 정강정책 및 당 기구 등을 심사 결정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회의에서 김규현은 서상일 최익환 조봉암 이동하 김위제 박기출 장지필 임기봉 등과 함께 의장단 9인으로 피선되었다. 의장에 호선된 서상일 씨 진행으로 각종 보고와 별항과 같은 정강 정책 선언 등을 채택 통과하였다.

선언 요지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금 환기 계승하여 우리가 당면한 민주 수호와 조국 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
허울 좋은 자유와 무위무책한 시정 하에 수백만을 넘는 실업자군과 민주 조국의 수호에 희생된 수십만의 상이군경이 거리에 방황하고 농민 노동자 봉급생활자 그리고 수백만의 월남 피난민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신음하며 양심적인 중소기업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산과 파탄의 불안에 잠겨 있으니 이 국민의 생활은 실로 백척간두에 서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 책임정치와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이에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봉금생활자 및 중소기업자 등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선 신당을 기(起)하고자 한다.

강령
1.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이 실현을 기(期)한다.
2. 우리는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과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및 봉급생활자의 생활권을 확보하여 조국의 부흥번영을 기한다.
3. 우리는 안으로 민주 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 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 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 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4. 우리는 교육 수제를 혁신하여 국가 보장제를 수립하고 민족적 새 문화의 창조로써 세계문화에의 기여를 기한다.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 후보에 추대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서상일을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규현 등 부위원장 9명의 한 명으로 선출하였다.(조선일보 1956.4.1., 경향신문, 1956.4.2)
4월 4일 하오에는 (5월 15일의) 3대 정·부대통령 선거에 임할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서상일 총참모로 김규현을 부참모로 결정하였다. 각부 참모 중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은 대통령선거사무장 윤길중, 정보 고정훈, 선전 신도성, 기획 김두한 등이다(경향신문, 1956.4.6.)
4월 12(13)일에 진보당 상설 기관으로서 인권옹호위와 정·부통령선거대책기관으로서 자유분위기보장위원회 위원장으로 고문 주방용 부위원장 임기봉 위원으로 신용순 외 6인 대변인 고정훈 등과 참여하였다(조선일보 1956.4.14., 경향신문 1956년 4월 14일).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2022년 6월 1일 65주기인 다암 박승룡 독립운동가 관련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간토대진재 관련 세 번째 다큐제작하는 재일한국인 오충공 감독을 만나려 인사동을 거쳐 인천공항철도를 타고 가는 도중 도쿄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대합실로 들어간다는 카톡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66주기인 열운 김규현교장 선생님 관련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오후 다섯 시 다시 확인하는데 기쁜 단서를 찾아 올린다.

유럽한민족연대 이종현 상임고문과 부인 우즐라 리 여사의 통일뉴스 인터뷰 기사(입력 2018.6.19.)에서 다음과 같은 김규현 영등포공고 교장 선생님의 진보당 정치 활동을 확인하였다.

지난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입국불허와 강제추방을 당했던 이종현 유럽한민족연대 상임고문이 올해 5.18기념재단 초청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출국을 이틀 앞둔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 대화역 인근 공원에서 이 고문과 부인 우즐라 리 여사를 만났다.

9.28 서울수복 직후에는 시민증이 있어야 자유롭게 서울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1.4후퇴 때 피난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형님 두 분은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아버님은 반 불구 상태로 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동생 둘을 건사해야만 했다. 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같은 짓을 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될 즈음에야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몸이 다부져 보이니까 권투부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월사금없이 다닐 수 있도록 아는 분이 알선을 해주었다.그때부터 권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몇달 후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권투실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침에는 학교를 다니고 오후에는 권투부 주장으로 후배들도 지도하면서 월사금을 내지 않고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 다음에 영등포공업고등학교까지 같은 방식으로 다니다가 졸업하게 됐다.

그 때 교장선생님이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1956년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선거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교장선생님 성함은 김규현으로 기억된다.

그분이 나를 참 총애하셔서 항상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보셨고 정치문제, 이념문제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나를 좋아해 주셨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선생님들 중에서도 몇몇 그런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에게도 많은 교육을 받게 되었고 남북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민족의식이 싹트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1학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1956년 6월 1일 별세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열운의 묘소 위치는 소설가 최학송 묘역 뒤 망우산 능선으로 오르는 지름길 50여미터 동남쪽 붉은소나무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묘지번호는 205179이다.

붉은소나무 밑이 기운이 엄청 세다. 답사길 잠시 쉬며 숨고르기를 하는 곳이다. 볕좋은 봄 가을에 나보다 조금 더 나이 먹은 신사가 그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돗자리에 누워서 거풍 즉 풍욕을 즐기고 있는 곁을 몇 번이나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