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만해 한용운 78주기

정종배 2022. 6. 29. 03:43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만해 한용운 78주기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거의 유일한 대한민국장 근현대사 거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78주기


만해 한용운은 3·1혁명 민족대표(불교계) 33인 중의 한 분이다. 만해는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 방숙영(方淑英)이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491번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용운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3·1 만세운동으로 3년 징역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문학운동과 불교 혁신운동에 힘을 쏟다 1944년 6월 29(음, 5.9.)일 향년 64세로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만해는 시인이고 승려이며 독립지사이다. 유택은 망우리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만해의 가문은 무장을 많이 배출했다. 부친 응준은 종5품의 충훈부 도사와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을, 조부 영호는 종4품의 선략장군행훈련원첨정을, 증조 광후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을 지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와 유교적 교양을 지닌 농촌 중산층 정도였다. 만해는 어릴 적 몸은 작았으나 힘이 세고 모험심이 강하였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당찬 아이였다.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1892년 14세에 고향에서 전정숙(全貞淑, 1877~1950)과 결혼했다. 1904년 아들 한보국이 태어났다. 한보국은 스물다섯이 되던 해 신간회 홍성지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하였다. 그 뒤 홍성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과 홍성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당시에는 해주시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다. 1950년 1월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당시 그는 남조선로동당 당원이었다. 같은 해 6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에서 풀려난 그는 홍성군당위원장 및 충남 농민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이어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한보국은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한보국은 평양피복관리소 부지배인으로 상당히 순탄한 생활을 했다. 한보국은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운명하며, 임종 시에는 자녀들에게 통일이 되면 자신을 대신해 할아버지 한용운의 묘소에 찾아가 성묘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장남은 어려서 죽고 셋째 딸인 명심씨가 2001년 말에 북한잡지 《통일신보》에 기고를 하면서 만해의 손녀 다섯과 후손이 북한에 산다는 게 알려졌다.

한용운은 1894년 고종31년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 건양 1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한때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 광무 9년에 인제의 백담사에서 은사인 김연곡(金連谷) 스님의 셋째 상좌로 수계를 받아 1907년 불교에 귀의했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힘을 쏟았다.

만해는 젊은 시절 두 번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세계지리책인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1850)을 읽고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안 만해는 1906년에 세계일주여행을 단행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곳에선 일제에 쫓겨 고향을 등진 조선의 청년들이 머리 깎은 사람만 보면 ‘왜놈 앞잡이인 일진회원일 것’이라며 뭇매로 때려죽이거나 산 채로 바다에 수장했다. 만해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격투 끝에 사지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쏜 사람을 욕하거나 허둥지둥 대지도 않고 침착한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을에 도착하였으며, 병원에서 마취하지 않고 수술을 할 때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에 치료를 주선한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이라며 감탄했다. 나중에 그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 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 증상이 생겼으며, 뼛속에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았다.

두 시기 중간엔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했다. 도쿄에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대학)에서 일본인 아사다 교수의 도움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공부했다. 이때 유학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귀었다. 훗날 3.1혁명 주역으로 만나게 되는 인연도 이미 싹트고 있었다.

1911년 박한영 선사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를 개최했다. 1910년부터 집필하여 1912년 탈고한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하였다. 1913년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백담사에 오는 애국지사에게 조국 없는 백성의 비애와 앞날의 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펼쳐 놓고 설득했다. 이 해에 범어사에 들어가 1914년 『불교대전』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12년부터 통도사에서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고 그 가운데에서 1,000여 부의 경·율·론으로부터 중요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불교대전』은 ‘축소판 팔만대장경’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불교대전』을 1914년 발행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다. 1918년에는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 계몽운동에 앞장서는 데 힘썼고,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만해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린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또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해인사의 승려인 백용성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했으나, 독립선언서를 표제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27일에는 다시 최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 대표자로 서명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은 도장으로 서명날인하였다.
서명자가 확정되자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는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이필주·함태영, 불교측 대표 한용운,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최남선 등이 참석하여 회합했다. 이 자리의 주요 의제는 독립선언서의 날인 순서에 있었다.

기독교 측은 서명자의 순서를 연령순으로 하거나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최린이 그렇게 되면 위계질서가 확고한 천도교 측에서 볼 때는 선생과 제자의 순위가 바뀌게 되므로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장시간의 논의 결과, 그동안 준비과정으로 보아서도 손병희 선생을 수위에 쓰고, 제2위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길선주(장로교파) 목사를, 제3위에는 이필주(감리교파) 목사 그리고 불교측을 대표하여 제4위에는 백용성(승려)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손병희·길선주·이필주·백용성의 순위가 결정되고 나머지 29인은 성명의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여 서명날인하게 되었다.
다음날인 28일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당시 나이)

- 천도교(15명): 손병희(59)·권동진(59)·최린(42)·오세창(56)·임예환(55)·권병덕(53)·이종일(62)·나용환(56)·나인협(49)·홍기조(60)·김완규(44)·이종훈(65)·홍병기(51)·박준승(54)·양한묵(58)
- 기독교(16명): 이승훈(56)·박희도(42)·최성모(47)·신홍식(48)·양전백(51)·이명룡(47)·길선주(51)·이갑성(31)·김창준(31)·이필주(51)·오화영(40)·박동완(35)·정춘수(45)·신석구(45)·유여대(42)·김병조(44)
- 불교(2명): 한용운(41)·백용성(56)

민족대표에 서명하지 않은 주요 인사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함태영 외에 송진우와 현상윤 등이 있다. 이들은 3.1만세운동 거사 후의 지속적인 운동과 지도를 맡기 위해 서명에서 빠졌다. 그리고 최남선은 스스로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으므로 그대로 받아줬다.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3.1혁명을 주도한 인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천도교: 박인호(66)·노헌용(53)·이경섭(45)·한병익(20)·김홍규(45)
- 기독교: 함태영(48)·김지환(29)·안세환(33)·김세환(32)
- 교육계: 송진우(31)·현상윤(28)
- 문인: 최남선(31)
- 무직: 임규(51)·김도태(29)·노정식(30)
- 학생: 강기덕(31)·김원벽(27)

1919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참여한 가운데, 선언서를 발표한다는 것을 경성부청의 경무총감부에 통지하는 한편,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각기 선언서가 보내졌다.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한용운이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만해는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1928년 경성지부장을 겸임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불교동맹 지도자로 활동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만당 당수로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3년 55세 때 충남 보령 출신 유숙원(1898~1965)씨와 재혼하여 1934년 딸 한영숙을 얻었다. 한영숙은 2남 1녀를 낳았다. 만해의 따님인 한영숙 씨는 2012년 2월 26일 《한국일보》 <서화숙의 만남>에서 ‘망우리에 있는 만해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옮기자는 이야기가 계속돼왔는데’ 것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망우리 모시기도 힘들었어요. 친구분들이 어렵게 마련해주신 거거든요. 그대로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거기도 독립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이 많으세요. 아버지는 와글와글하고 떠받드는 걸 안 좋아했어요. 만약에 망우리가 폐쇄된다면 고향인 홍성으로 모셔야겠지요. 생가 자리도 있고 동상도 있잖아요.“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소설 「박명」을 연재했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남 사천군 다솔사와 7월 12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 김규식, 박광, 홍명희, 만공 송월면,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 등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같은 날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이 중 망우리공원에 관련된 분은 왕산 허위(13도창의군탑), 도산 안창호, 만해 한용운 등 세 분이다. 2019년 3월 1일 3등급 독립장에서 1등급 대한민국장을 서훈한 유관순 열사를 포함하여 네 분이다.

1947년 유관순 열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여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되기 이전에는 어떤 신문에도 유관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3.1만세운동에 참가한 이화학당 200여 명 중 한 명의 참가자였다. 이화학당 김활란, 신봉조, 박인덕 등이 친일 문제로 본인 및 어려운 학교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선택한 인물이 유관순이었다.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쓴 소설가 전영택 그리고 교과서를 편찬하며 수록한 박창해와 유관순 집안의 먼 조카인 유제한 등이 영웅 서사 인물을 만들었다. 또한 일부 기독교 교회와 독립지사의 홍보도 유관순 열사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만세운동 당시 순국한 이는 대략 7천5명에 이른다. 유관순 열사 역시 만세운동을 이끌고 격렬한 옥중투쟁을 하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받지 못했다. 유관순 열사 부모님도 3.1만세운동 당시 순국하였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분은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하였다. 3.1만세운동 현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부모보다 옥사한 딸에게 더 높은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망우리공원에는 3·1혁명에 참여한 30여 분이 묻혔다. 현재는 15여 분이 남았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한용운·박희도·나용환·박동완·이종일·홍병기 등 7분이 묻혔다. 이 중에 나용환·박동완·이종일·홍병기 등 4분은 1966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 안장됐다.

민족대표 33인 중 박희도와 만해 한용운과 슬프고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합성 사진과 함께 실렸다. 중앙보육학교 초대 교장 박희도는 제자와의 미투사건인 <에로교장 Y선생 사건> ‘키스내기 화투’ 이후 1930년대 자치론과 1940년 전후 《동양지광》에서 징병, 징용, 위안부, 홍보 찬양, 강연, 좌담회 등 친일의 밑을 깔아준 잡지 사장과 주간 및 발행인으로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변절의 길을 걸었다.

1994년 03월과 2019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묘역 중 가정 먼저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유상규 등 여덟 명의 독립지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 제691-1~8호로 등록했다고 2017년 10월 23일 밝혔다. 망우리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을 문화재청은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계승과 역사적 교훈이 담긴 역사적 장소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재)선학원은 매년 만해 스님의 다례재를 입적 일인 양력 6월 29일 혈육인 한영숙 여사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해 오고 있다. 이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만해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장례식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홍제동 화장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비록 시설은 낡았으나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설 미아리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7월 1일 민적이 없는 삶에서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묘지번호 204411이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흑풍』·『후회』 등을 저술하였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시집 『님의 침묵』 「군말」에서 읽을 수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용운, 「군말」, 『님의 침묵』(1926)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고 1926년 회동서관에서 처음 펴내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다시 펴낸 『님의 침묵』은 한국 현대 시사에 드높이 솟아 있는 한 봉우리다. 『님의 침묵』에는 “향가·고려 가요·시조 ·가사는 물론, 한시·불경에 흐르는 정신사적 형질과 시적 방법”이 계승되고 있다
1926년에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즉 역설의 미학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회자정리, 거자필반)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순신 사공 삼아/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하여 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 - 한용운의 시조, 「무제」

망우리공원 답사할 때 개인이나 어떤 단체, 종교·이념·계층·직업·남녀노소·시간·계절 등을 떠나 꼭 함께 경배를 드리는 분은 만해 한용운이다. 만해 유택은 정 동향이며 동은 인의예지신 오상 중 인(仁)에 해당한다. 인은 사단 중 측은지심 즉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겨 누구나 받아들이는 어진 마음씨이다. 만해 유택 안에서 명상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어 간다는 유명한 지리학자도 있다. 새해 해돋이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무궁화꽃이 더욱 아름답고 가장 어울리는 유택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은 쉽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더욱더 어려웠다. 그로 인해 많은 지사들이 고초를 당했다. 만해는 국내에 남아서 거의 유일하게 드러내놓고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지사이며 혁명가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만해는 『불교유신론』에서 인구 1억 명은 되어야 나라로서 제대로 힘을 발휘해 세계만방에 행세할 수 있다며 승려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조정래(송광사)와 시인 조태일(태안사) 등도 스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절에서 보냈다.

사상가로 만해를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평하며 "조선의 청년들은 만해를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벽초 홍명희는 종교인으로서 “7천 승려를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은 다른 사람 만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만해는 특히 1920~30년대 농민 노동자에 많은 관심과 그들의 사회운동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시인으로서 만해는 문학사 불멸의 시집 『님의 침묵』 외 수백 편의 시(시조, 한시, 선시 포함)와 소설·산문·논설·시론을 발표하여 일본제국주의에 길들어가는 민족을 깨우친 죽비였다.
시인 구상은 시인의 인격적 존재로서 만해 한용운을 으뜸으로 쳤다. “가령 오늘의 어떤 시인이 만해 한용운보다도 찬란한 언어와 능란한 솜씨로 훨씬 애국적인 시를 만들어냈다 해도 그의 실제 행동이 비어 있을 때 과연 그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먹혀들어갈 것인가 하면 이는 천만의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시에서는 언령이라고 해서 말이 생명을 지니기에는 그 말을 지탱하는 내면적 진실 즉 그 말이 지니는 등가량의 윤리적인 의지와 그 체험을 필요로 한다.” - 시인 구상의 수필, 「예술인의 자세」 중에서

2018년 만해 한용운 유택 위 소나무 한 그루와 새해 해돋이를 맞았다. 내 자신과 약속했다. 특별히 망우리공원 이야기를 월간지 《작은책》에 연재하는데 술술 잘 풀어낼 수 있게 노력하며, 울림 있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망우리공원 ‘님’을 찾아간다/ 언제나 변함없이 반겨준다/ 누구와 동행해도 가리지 않는다/ 사색의 길 생각만 해도 애잔하여 흥겨운 시간이다/ 사색의 길을 오르내리며 참배하여 삶의 님을 만난다/ 님 하면 만해 한용운 님이다/ 님 때문에 사색의 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걷는다/ 팔만대장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우리말을 시와 시집으로 옮겨놓았다/. 초등학생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님이다/ 석좌교수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님이다/ 노교수가 젊은 혈기로 만해산을 10여 년 오르다 너무나 큰 산이라 포기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정상에 오르려 생애를 걸고 싶다고 토로한다/ 만해의 설중매와 숫눈길 생애가 님이다/ 님을 좇는 이가 또 다른 님을 낳고 헤아릴 수 없는 님을 빚어낸다 – 정종배의 시, 「만해 한용운의 님을 좇아」

2000년부터 필자는 봉사 및 체험활동 참여하는 학생들이나 참배객들과 만해의 대표시 「님의 침묵」 한 행씩 서로 이어받아 낭송하면 더욱 맑고 결기 있는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2015년 8·15광복절 홍성군 문인협회 회원들의 만해묘소 참배하는 일행과 마주하여 묘역에 대해 설명했다. 그때 구재기 시인를 만났다. 구시인은 2010년 명예퇴직 후 서천 ‘산애재’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인터넷 카페 ‘시인의 방 산애재’를 꾸려가 인터넷상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홍성례 시낭송가는 만해 유택 앞에서 시 낭송을 연습한다. 필자는 2020년 8월 14일 정년퇴임식 마친 뒤 망우리공원 참배 중 중랑문화재단 출범 후 첫 답사하는 표재순 이사장과 유경애 대표이사를 만해 유택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망우리공원을 답사하며 인물들의 묘역에서 만나 뵙는 이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사회에 밑거름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만해 한용운 묘비는 ‘만해사상연구회’에서 짓고 여초 김응현 서예가 글씨를 새겼다. 묘비 제자는 ‘광개토왕비문체’이다. 광개토왕 비문을 탁본해 일제가 왜곡한 사실을 밝힌 역사학자 이진희 선생의 아내인 재일한국인 에세이스트 오문자(동인지 《봉선화》 편집장) 선생이 2017년 9월 5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묘역을 답사하기 전 먼저 이중섭 화가와 한용운 선생 유택을 참배하며 ‘광개토왕비문체’를 금방 알아봤다. 묘비 앞면 ‘夫人兪氏在右’는 부인 유숙원씨 묘소가 만해의 유택 우측에 있다는 뜻이다. 여초의 제자인 황재국(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서예가는 망우리공원 최학송 문학비와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의 어머니 묘비를 썼다.

망우리공원 묘비에 새긴 서예가들은 대한민국 서예계를 잇는 대표 작가들이다. 소개하면 위창 오세창(오촌 설태희, 소파 묘비 동심여선,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해강 김규진, 일본에서 서도라 일컫는 것을 서예라 명명한 소전 손재형(위창 오세창, 도산 안창호 묘비, 정촌 손창환), 창애 김순동(오촌 설태희 비문), 1937년 세운 추사 김정희의 묘비에 고예서체로 비문을 새긴 죽하 김승렬(호암 문일평 묘갈), 윤희화(지석영), 석산 김흡(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일중 김충현(죽산 조봉암, 소천 강용율), 여초 김응현(위창 오세창, 만해 한용운), 원곡 김기승(도산 안창호, 장덕수 박은혜 부부, 오한영), 시암 배길기(김말봉, 김이석), 학남 정환섭(계산 김승민), 어천 최중길(남파 박찬익), 월정 정주상(소파 방정환), 원당 김제운(소아 김진성), 해관 손경식(정촌 손창환), 중관 황재국(서해 최학송 문학비, 김준엽 모친) 등이다. 이외도 해공 신익희(현포 이병홍), 소설가 송지영(시인 박인환), 이중섭의 친구이며 화가인 한묵(화가 이중섭), 차중락의 맏형 차중경(가수 차중락), 신확(신경진 묘비), 박태유(신경진 신도비) 등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고 문일평 새 묘비는 아쉽게도 컴퓨터로 새겼다.

또한, 신완(신경진 묘비), 송시열(신경진 신도비),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연천 홍석주(명온공주 김현근 묘비), 위당 정인보(오촌 설태희, 호암 문일평 묘갈), 흥사단 단우 춘원 이광수(도산 안창호, 태허 유상규의 연보비), 조완구(남파 박찬익 옛 비문), 월탄 박종화(숙부인 양천허씨), 우월 김활란(장덕수 박은혜 부부), 노산 이은상(정촌 손창환), 흥사단 단우 주요한(오한영), 동탁 조지훈(남파 박찬익), 독립운동가 이현익(계산 김승민), 백낙운(지석영), 윤보선(행농 이영준) 목사 강신명(송암 서병호), 호수돈여고 은사 성천 유달영(이경숙), 소설가 송지영(박인환), 이규태(호암 문일평 비문), 중앙고 은사 이병도(국채표), 아동문학가 이재철(방정환), 조병화(가수 차중락 비석 시 ‘낙엽의 뜻’), 숙명여대 교수 김남조(임숙제), 음악평론가 한상우(채동선), 산림청 임업연구원 원장 조재명(아사카와 다쿠미 표지석), 우리문학기림회 곽근(최학송 문학비) 등 지은 글 즉 비문 및 문학비와 표지석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비석에 찬(撰)이나 지(識)는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전(篆)은 서체의 하나인 전서체를 말하며 비석의 앞 큰 글씨 즉 제자(題字)를 쓴 분을 말한다. 그리고 서(書)는 비문의 글씨를 쓴 이를 말한다.

만해 한용운의 곧고 바른 지사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인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과 관련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최린은 천도교의 대표로서 만해와 3.1만세운동을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래서 둘은 동지로서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최린은 창씨개명하고 중추원 참의를 거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을 역임 등 일제 말기에 변절하였다. 어느 날 최린이 만해를 찾아왔다. 만해는 꼬락서니조차 보기 싫다며 ‘집에 없다’고 전하라고 외면한다. 최린은 돌아서며 가려다 마침 딸 한영숙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백 원짜리 지폐를 쥐여줬다. 당시 백 원은 쌀 열다섯 가마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만해는 부인 유씨와 딸 영숙에게 마구 화를 내고서는 그 돈을 가지고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향했다. 만해는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돈 백 원을 던지며 ‘더러운 돈은 받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조선의 3대 천재로 민족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육당 최남선이 변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만해는 시내 어느 음식점에 지인들을 불러내 최남선의 장례식을 치러 버렸다. “이제부터 왜인에게 종노릇을 자청해서 조선의 의기로부터 떠나서 죽은 고 최남선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날 만해는 비분강개하며 무진장 술을 퍼마셨다. 어느 날 육당 최남선이 길을 가다가 만해를 만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당신, 누구시오?”, “나, 육당 아닙니까?”, “육당이 누구요?”, “육당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습니까?” 그러자 만해는 이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내가 아는 최남선은 이미 죽어서 장사까지 치렀소.”

조선의 또 하나의 천재였던 춘원 이광수는 불교 소설을 쓰면서 불교의 교리나 사상에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자주 만해를 찾아와 묻곤 했다. 문학적으로도 통하는 것이 많아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춘원도 육당과 마찬가지로 변절하였다. 각별했던 사이였기에 만해는 춘원의 변절을 매우 침통하게 생각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춘원은 또 만해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물론 창씨개명한 후였다. 만해는 그것을 알고 춘원의 인사도 받기 전에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춘원은 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해하다가 돌아갔다.

만해는 호적이 없는 일생이다. 성북동에 북향으로 심우장을 짓고 재혼하여 딸을 얻었다. 소설을 쓰며 가정을 꾸렸고 단재 신채호의 비를 세웠다. 만해는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벌판 호랑이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식을 1938년 심우장에서 5일장을 지냈다. 일송 선생의 유해는 “나라잃은 몸이 무덤이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물에 띄웠다. 이 장례식에 아버지 조헌영과 참석한 시인 조지훈은 만해를 만나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계기였다.

일제 말기인 1941년 총독부는 우리나라 사람의 호적까지 고치기 위한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당시 9할이 창씨개명을 끝냈다는 보도가 《매일신보》에 발표된 것을 보고 격분 끝에 대종교 나철 대종사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자결을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바로 망우리에 묻혔다 2003년 무연고 묘 처리로 빗돌만 남은 애국지사요 국문학자인 신명균 대종교인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이 한심한 창씨개명의 보도를 보고 격분하여 약을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이 애국 자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분의 직절(直節)은 찬양하지만 자살이란 종교상의 죄가 될 뿐 아니라 자기의 격분이나 비관이나 혹은 공포를 참지 못하는 심적 변화의 발로이니 높이 평가할 것은 못 된다. 나라를 잃고 자살한 것이 충이라 하나 이것은 비겁 자책 혹은 실망의 극치이다. 예컨대 파산했다고 부모가 자살한다면 그 유아들이 비참해지는 것과 같이 후인에게 불행을 주는 것이다.“

성북동을 답사할 때 성북동미술관과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을 떠나 <만해 한용운 동상>을 거쳐 <심우장>으로 이동한다. 만해 한용운의 북향집 <심우장>은 <북정마을>이라 불리는 달동네 7부 능선이다. <심우장>에서 100여 미터 위에 이산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에서 유래한 성북동 <비둘기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성북동은 북한산 물줄기 성북천이 서출동류 명당수가 흐르는 계곡과 숲속에 자리 잡은 명승지이다. 그래서 성북천 북쪽 계곡 위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주택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성북천 남쪽에는 서울성곽 바로 아래 지역으로 경사가 심할 뿐 아니라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게 집을 지으면 북향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부자들은 이곳에 아예 집을 짓지 않기 때문에 해방 이후 갈 곳을 못 찾은 서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1931년 만해가 간호를 하던 유숙원 여사와 재혼했다. 1933년 벽산 김적음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 잡은 집이 바로 <심우장>이다. 이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지었다고 하나 지형상 북향으로 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현판은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의 어른인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다. 현재의 <간송미술관>의 원래 이름 <보화각>을 지어준 이가 바로 오세창이다. 이제는 일본을 위시한 40여 나라의 대사관저가 들어섰다, 70년대에는 <삼청각>, <대원각> 등에서 친일군부세력의 요정정치가 행해졌다. <대원각>은 시인 백석과 나눈 사랑으로 유명한 기생 진향,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와 무소유 법정 스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많은 작가와 예술가 등의 임시 거처와 작업실과 살림집으로 문화 예술 향기가 깊게 서린 곳이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죽은 뒤 딸 한영숙과 그 가족이 살았다. 그래서 현재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이용되고 있다.

《창조문예》 2022년 3월호 제302호 망우리공원 문일열전(8)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