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북과 남을 경험한 부부 소설가 김이석과 박순녀

정종배 2022. 6. 30. 01:52

망우리공원 문인열전(13)

 

북과 남을 경험한 부부 소설가 김이석과 박순녀

 

정종배

 

소설가 박순녀는 192891일 함흥 출생이다. 오랜 건강 비결은 정말 죽을 고비를 굽이굽이 넘겼을 뿐이다고 대답한다. 박순녀 작가의 소원은 고향 함흥 반룡산을 휘도는 성천강 만세교 가까운 강둑에 문학비를 세우고 눈 내리는 밤이면 한 바퀴 돌아보는 일이다. 아리수 강변의 아파트 한밤중에 일어나 책상 의자에 앉는다.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로 간 '전라도 가시내'를 노래한 함경도 사내 시인 이용악의 시 그리움이 책상 위 서랍장 모서리에 붙어 있다. 요즘 부쩍 희미한 기억을 붙잡아 젖니 빼듯 시인들의 시 한 편 손수 써 붙이고 나직나직 읊조린다. 망우리공원 남향받이에 잠들어 있는 소설가 김이석 지아비가 그리워 오늘 밤도 지샌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 위에 /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 연달린 산과 산 사이 /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 1947협동, 이용악의 시 그리움중에서

 

소설가 김이석의 아내인 박순녀 작가로부터 몇 장의 사진을 포함한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음식상을 앞에 놓고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을 사진의 가장자리에 손글씨로 써서 보내주었다. 사진 위 왼쪽 두 번째부터 원응서, 박남수, 이명성(백수사 주인), 황염수, 박연희, 천관우, 구상, 김진수, 석영학, 김수영 등은 서 있다. 사진 아래 왼쪽 세 번째 박순녀, 김이석, 마해송, 최정희 등은 앉아 있다. 박순녀 작가가 사진에 대해 어느 모임이라 하여달라고 하였다. 박순녀 작가는 김이석 소설가 옆에 한복 입은 본인도 밝히지 않았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김이석과 박순녀 작가의 문화예술계 교류의 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은 5·16군사쿠데타 때 소설가 김이석 집에서 6일 동안 기거했다. 낮에는 담배 밤엔 소주를 마시고 파리에 가 말과 문학을 하겠다며 취해 쓰러져 잠을 자다 머리를 빡빡 밀고 나왔다. 시인 김수영이 김이석 작가 7주기에 쓴 글을 읽어보면, 사진 속 모임이 김이석과 박순녀 작가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그 잔치 때 상황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김이석은 1914716일 평양 출생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기독교 신앙을 일찍 받아들인 아버지 김치화와 어머니 이득화의 43녀 중 차남이다. 평양 종로통에 빌딩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다. 김이석은 내성적이고 말수는 적으나 호불호는 분명하여 지난해 탄생 100주년인 김수영 시인과의 관계는 두 분의 특별한 성격들이 잘 어울렸다. 박순녀 소설가는 그 당시에는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해가 쉽지 않았으나 지금에 생각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한다.

김이석 평양종로보통학교 1년 후배인 김병기 화백과는 바둑 친구이고 이중섭 화가는 불우한 말년을 챙겼다. 이중섭은 친구인 구상 시인의 부탁을 받고 시화집 응향의 표지 제작 및 표지화를 그렸다. 북한 체제 첫 번째 필화사건은 원산문학가동맹(위원장 박경수)이 원산에서 발행된 해방 1주년 기념시화집 응향이었다. 응향에는 구상·강홍운·서창훈·이종민·노양근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가 실렸다. 19461220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상무위원회에서 이 시집을 퇴폐적·반인민적·반동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평양에서 온 응향사건조사위원단 김이석·김사량·송영·최명익 등 검열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19472월 원산의 영화관 '원산관'에서 응향성토대회가 열렸다. 시인 구상은 휴식 시간에 급히 짐을 싸 들고 월남을 감행해 버렸다. 김이석을 6·25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에서 만난 시인 구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취직자리를 알아봤다. 김이석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 화백의 전시회 및 돈과 그림에 대한 관리와 생활을 돌봐주었다. 이중섭 화백의 적십자병원 무연고 주검을 첫 번째로 확인한 이가 김이석·김병기·김광균·구상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박순녀 소설가는 황염수 화가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김이석 소설가는 1927년 평양종로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 광성고보를 거쳐,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938년 중퇴하였다. 중퇴한 이유는 배울 게 없다고 알려질 정도로 실력파였다. 실제로는 형님의 급서로 평양에서 가업인 사업체를 이어받아 운영할 만큼 이재에도 밝았다. 그 뒤 조선곡산주식회사에 다니다가, 평양 명륜여상 교사로 근무했다.

6·25 한국전쟁 1·4후퇴 때 가족을 두고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이 무렵 중부전선에서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였다. 1953년 환도 후 문학예술편집위원과 성동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다. 1957년부터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방송작가 1호인 소설가 박순녀와 재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일찍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드러내 보통학교 때에 동요 돌배나무(1925)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 재학 당시 단편소설 환등(1938)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8년 단편소설 부어동아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평양에서 구연묵·김조규·유항림·양운한·김성집·김화청 등과 함께 단층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지 단층을 발간하면서 감정세포의 전복(1937) 등을 발표했다. ‘단층동인 모임에 윤동주 시인이 몇 번 참가하였다고 김병기 화백이 증언하였다.

월남 후 종군작가단에 들어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1954실비명을 발표했다. 이어 외뿔소·달과 더불어·소녀 태숙의 이야기·광풍속에서·뻐꾸기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실비명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면(1958)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단편소설 외에 1962년 역사장편소설 난세비화한국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1964918일 역사장편물 신홍길동전을 쓰던 중 고혈압으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921일 망우리공동묘지 호암 문일평 유택에서 오른쪽 30미터 지점 남동향으로 유택을 마련했다. 1년 뒤 망우리 묘지 앞에 세운 소설가 김이석 묘비는 시암 배길기 초대 서예가협회장의 글씨를 새겼다. 묘지번호는 203693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표작 실비명·외뿔소·학춤에서와 같이 사적 체험과는 거리가 있는 주인공의 꿈의 상실에 대한 좌절과 상심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관앞골 기억·교련과 나등의 1920년대 식민지사회의 단면을 제시한 소년시절의 회상이나, 뻐꾸기·동면·지게부대·허민선생·재회등의 사소설적 접근으로,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조명한 1·4후퇴 때 월남한 지식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의 기록과 같이 사적 체험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들 작품에는 식민지시대로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의 한국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의 문체는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표현으로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관조하는 담담한 심경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작품집으로 단편집 실비명(1956)·동면(1964)과 아동장편소설 해와 달은 누구를 위해(1964) 등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문장작법(1961)이 있다. 단편집 실비명으로 1957년 제4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 제1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김수영은 김이석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휴전 후 서울에서였다. 김수영은 원응서와 함께 있는 김이석을 보고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뗑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 실은 김수영으로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전쟁 피해자였다. 6·25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을 때 그는 선배, 동년배 문인들과 함께 한청빌딩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에서 인민군 노래를 배우며 사상교육을 받았고, 또 가두행진을 해야 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김수영은 함께 교육을 받던 유정·김용호·박계주·박영준 등과 북으로 끌려가 훈련을 받고 인민군에 배치됐다. "나 포로수용소에 와 있다. 한번 와다오." 조병화가 죽은 줄 알았던 김수영에게서 엽서를 받은 것은 피란지 부산의 서울고등학교에서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때 김수영은 배치돼 있던 인민군 부대에서 탈출했다가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총살 위기에 몰렸다. 여기서 탈출에 성공해 서울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집 앞에서 경찰서로 연행돼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인민군 포로 신세로 수용소로 이감되고 말았다.

김수영은 월남한 이후 후배 여성작가 박순녀와 재혼한 김이석에게 퉁명스럽게 묻곤 했다. "형은 무엇이 좋아, 여기로 왔소?" 그러면 김이석의 대답이 이랬다. "김사량이 자식이 우리가 써내는 글을 샅샅이 다 읽고 점수를 매기는데, 글쎄 내 소설은 밤낮 60점 미만이야. 주제가 어떻다는 둥 주인공의 사상성이 투철하지 못하고 미흡하다는 둥 말이야. 난 단지 아니꼬워서 무작정 남하한 거야."

김이석이 월남할 때 동행한 양명문의 증언에 따르면 "김이석은 꾀가 없어 문학동맹에 충성을 바칠 줄 몰랐고, 원래 글을 빨리 써내는 재주를 못 가졌다. 평론가 안함광에게 불려가 '동무는 너무 안일하고 태만하니 앞으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훈시까지 들었다"고 한다. 역시 함께 월남한 수필가 원응서는 김이석이 딱 한 번 농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를 써서 공연하게 됐는데 '이데올로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공연 금지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이석은 자기식대로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된 북한 체제를 지긋지긋해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김이석은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 너무 빨리 작고한 천재 화가 이중섭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평양종로보통학교 김병기와 이중섭 화백의 1년 선배이다. 김병기 화백은 김이석 소설가의 광성고보 동문이고 바둑 친구였지만 김이석 작가 입이 무거워 박순녀 작가는 올 31일 돌아가신 106세 김병기 화백을 전혀 알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다.

김수영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월남 후 14년을 그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 차근호, 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 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은 3·8 따라지라며 은연중에 반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만행이 뛰어난 예술의 혼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한다.

 

박순녀 소설가와 20201230일부터 올 6월 말까지 여섯 번을 찾아가 뵙고 말씀을 나눴다. 언제든지 전화하고 찾아오길 바라신다. 김이석·박순녀 두 소설가의 삶과 작품 및 두 분이 만난 예술가 및 사람들과의 후일담을 소개한다.

김이석 작가는 6·25 한국전쟁으로 남하하여 궁색하였지만 예술지상주의자로, 오롯이 작가는 작품으로 일관된 삶을 지향해야 한다며 일관했다. 정치 쪽으로 가버린 천관우·장준하 등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김이석 작가의 작품 중 망우리 묘지 뒷면에 한 문장 새긴 실비명이 대표작으로 알려졌으나 김작가는 동면을 아꼈다. 동면은 연극 공연을 고려해 구성한 소설이었다. 김작가는 살아생전 박연희 소설가와 제일 친했고 소설가 김동리 손소희 부부와도 가까이 지냈다. 서영호 기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홍제동 문화촌 국민주택 단지 월세 3,0003개월 미뤄 퇴거 위기 때 서기자가 몇 번을 후원하여 위기를 넘겼다. 이중섭 그림을 세간에는 상당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져 이중섭 유작전 관계자들이 연락이 많았다. 하지만 소장한 이중섭 그림 세 점 중 한 점은 좋아하는 기자한테 선물하고, 한 점은 서영호 기자에게 후원한 방값 대신 선물했다. 한 점은 팔아 살림에 보탰다. 실제 이중섭 그림을 소장하지 않고 있다.

김이석 작가는 가장으로서 정말 다정다감하였으나 술을 자주 즐기며 구상·김수영·박연희 등과 술자리에 어울리면 악동이었다. 글쓰기 보름 전부터는 절주하고 신문 연재할 때는 토·일요일 주말 음주를 하였다.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요리에 취미가 있었다. 미식가로 식당 주방장에게 배워 와 집에서 요리하여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가장으로서 만점이었으나, 술자리에서는 악동이라 박순녀 작가는 김이석 작가가 살아 있을 때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으론 후회된다고 말하고 있다. 김남조 시인은 너무 힘이 세서 가까이하지 않았다. 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의 수필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다(푸른사상, 2021)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강민·구인환·구혜영·권용태·남구봉·남정현·김여정·박용숙·박정희·송문정·송병수·신동한·신봉승·안영·유금호·윤병로·이국자·이성교·이정호·이준영·정명숙·정인영·최미나 등 원로문인들이 인사동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밥 한 끼 먹으며 안부를 묻고 서로를 위로하던 인우회4년 전에 해체할 정도로 주변 작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1978년 원로 및 중진문화예술인 9인이 장르의 구분 없이 함께하는 이색 문학동인 갈숲의 동인지 갈숲이 나왔다. 향파 이주홍 선생이 서거한 뒤 동인들이 확대됐다. 소설가 박순녀는 갈숲동인으로 소설가 향파 이주홍·송원희, 서예가 청남 오제봉, 시인 박노석·조순, 아동문학가 임신행, 수필가 빈남수·서인숙 등과 활동했다. 운성 구상·우인 송지영 등도 동인에 참가하였다. 아동문학가 이주홍 선생의 주도로 동인지 갈숲은 창간 이후 꾸준히 이어져 왔다. 24호까지는 향파 선생이 편집을 하였다. 향파 선생의 타계 이후에는 시인 조순에 의해 201141호까지 이어오다가 지금은 종간한 상태이다. 17년 동안 동인을 꾸려오다, 동인들의 십시일반 모아 자비 출판하기로 하여 원고까지 받았으나 마지막 동인지는 끝내 출간하지 못했다.

갈숲동인들은 모임 시작 전 청남 오제봉 작업실에서 몇 점씩 붓글씨를 남겼다. 시인 구상 선생은 다 좋은데 술만 들어가면 악동으로 박순녀 소설가는 술자리에서만큼은 거리를 두었다. 박순녀 작가는 1985년 구상 시인의 친필 유묵 한 점을 간직하고 있다. 구상 시인이 아침에 일어나 돌려달라는데 주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 ‘明暗不二네 자의 한자로 시인 구상의 친필 중 한자를 붓으로 쓴 유묵은 드물다. 반듯한 글씨체는 필자의 은사이신 살아생전 시인 구상 선생님을 뵙듯 반가웠다. 은사님의 따님인 구자명 소설가에게 카톡으로 유묵 사진을 보냈다. 구자명 소설가는 아버지 유품 중 한자로 쓴 유묵은 거의 없는데 귀한 자료라며 잘 보관하길 바랐다. 또한, 직접 보았으면 좋겠다며 반가워하였다.

박순녀 작가는 이정호·임옥인·최정희·최현식 등과 어울렸다. 그중에 가장 친한 이정호 소설가는 분단의 아픔을 주로 그려 관북작가로 불렀다. 두 소설가는 고향이 함경도이고 학창 시절 그리고 첫 교직이 함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에 돈독하기가 우애 좋은 자매 이상이었다.

소녀들이 사랑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전 빨간머리 앤(창조사)1963년 처음으로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 신지식 아동문학가의 추천을 주선하였다. 신지식은 1956년과 1957새벗분홍조갑지탱자 아주머니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어머니가 일본인으로 완벽주의자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방어벽을 쳤다. 박순녀 소설가는 이제는 어떤 문제도 다 말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마음을 내려놓은 94세의 지금이 행복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다.

박순녀 작가는 김이석 소설가와 1958년 재혼하고 1960년에 낳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김양하 교수와 사위 문준영 한양대학교 교수 부부 집과 가까운 거리의 아파트에서 독서와 명상과 운동으로 소일하고 있다. 외손녀 단비도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요즘 비혼주의가 많은 현실에서 30살에 결혼까지 하였다. 딸 부부가 미국으로 유학 갔다. 그때 맡아 기른 외손녀 단비에 대한 할머니표 1991~2년에 쓴 육아일기 단비엄마 바쁘대요를 새롭게 손질한 단비야 단비야 안녕(동서문화사, 2020)을 재출간하였다. 박순녀 작가의 출간된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도서는 단비엄마 바쁘대요였다.

 

1928년에 함흥에서 태어난 박순녀 작가의 집안은 일찍 개화하였다. 아버지는 한국인 최초 소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박순녀는 함남고등여학교(1944), 원산여자사범학교 강습과(1945)를 수료하고 해방 후 단신 월남하여 1950년 서울대 사대 영어과 졸업했다. 1960년 단편 케이스 워커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64년 단편 외인촌 입구사상계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떤 파리·시간의 기둥· ·아이 러브 유·기쁜 우리 젊은 날등이 있다. 2014년에 펴낸 창작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세종도서로 선정됐다.

소설가 박순녀는 1960~70년대 주옥같은 단편을 많이 썼다. 그녀의 소설엔 전통적 가족 질서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의지를 갖고 생활하는 학생이나 인텔리 여성이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편 아이 러브 유(1962)(1968)을 떠올릴지 모른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일본인 스승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설 아이 러브 유는 전시동원령으로 숨 막혔던 일제 말 여학교가 배경이다. 일본인 교장 네로는 조선 여학생에게 참전을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양심적인 일본인 야마끼 선생은 조선인 여학생에게 적십자 간호원 지원을 거부하도록 충고한다. 야마끼는 학생들 사이에서 육발 선생으로 알려졌다. ‘는 교장실로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고문을 당한다. 야마끼 선생은 교장 네로와 싸우며 학생을 수사당국에 넘긴다는 건 언어도단이라 반발한다. 결국 퇴학으로 결정이 났고 때마침 8·15해방을 맞았다. 본국으로 송환되는 일본인 무리 속에 는 스승을 발견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야마끼 선생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며 싱긋 웃는다. 소설 속 야마끼 선생은 박순녀가 학창 시절 만났던 실제 스승인데 본명은 야마모토山本.

한편, 소설 에서도 일본인 체육선생 이누오犬尾가 등장하는데 원산사범 기숙사를 무대로 소설이 펼쳐진다. 이누오 선생은 민족적 편견을 갖지 않고 조선인 여학생들의 독립정신을 동정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소설 이 출간되고, 이누오의 실제 인물인 이나다 주조稻田十三 선생이 내한해 사제가 재회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선일보196833일자 기사 중 일부다.

해방이 되고 서로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25년이 지났지만 박순녀 여사는 그때의 이나다稲田(59)선생을 못 잊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여사에게 의외의 국제편지가 날아왔다. “그리운 내 제자弟子가 한국에서 여류작가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았소. 작품 속에 그려진 나를 보고 다만 조그마한 신념으로 살아온 내 인생의 보람을 얻은 것 같소. 문학과 교육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소. 새삼 서울의 하늘이 보구 싶구려. 나는 이 책을 내 인생의 기념품으로 간직할 생각이오.” 바로 이나다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하략)

이나다 주조 선생님의 딸인 나가하마 가쓰코長浜和子와의 2대에 걸친 인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 은 많이 팔렸다. 여학생들이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애초에 3부작으로 시작했는데 1부만 내고 못 냈다. 에 등장한 이나다 선생님의 딸이 수소문해서 박작가를 찾아왔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직 후 아버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해 한국외대 외국어학당에서 반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일본에 돌아가서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자기는 한국말을 배울 정도로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다. 해마다 봄, 가을이면 한국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에서 한 달씩 봉사하고 돌아갔다.

나가하마 씨가 소설 을 일본어로 번역해 박작가에게 보내주면 박작가가 손질해 다시 보내주는 식으로 전문全文 검토를 세 번이나 했다. 한 번을 하는데, 1년쯤 걸렸다. 본문은 어지간히 일본어로 해도 박작가의 표현과 비슷한데 본문 속 대화는 달랐다. 박작가가 쓴 소설의 대화는 낡은 한국식 대화였다. 그런데 나가하마 씨가 대화를 손질하면 현대식으로 대화가 싹 살아났다.

그 작품을 출간하기까지 10년은 걸렸다. 4년 전 200권을 인쇄했다. ‘왜 이렇게 하느냐고 박작가가 물으니, ‘자기네 가족들이 읽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생전 아버지가 이다음에 120% 행복하거든 20%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하셨는데 20%를 환원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봉사도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다. 박작가는 그 소리를 들으니 굉장히 찡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해외여행을 어디 갔느냐. 나가하마 씨 말이 아무 데도 간 적 없고 오직 한국에 와서 매년 두 차례 봉사하고 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박작가와 나가하마 씨는 연락이 닿는다.

나가하마 씨의 지인이 화가인데 소설 의 주인공에 반해 그림 4점을 그렸다. 박작가는 2점을 선물 받았다. 한 점은 8년 전 경기도 산본도서관에 도서와 함께 기증하고, 한 점은 박작가의 거실 벽에 걸려 있다. 지금도 나가하마 씨가 1년에 한두 번씩 소포를 보내오고 있다.” 이나다 주조 선생님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소설 조선일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박순녀 작가 또래의 남성 8명이 찾아왔다. 바로 이나다 선생님 제자들이었다. 박순녀 작가의 고향 함흥 출신도 있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일본을 상대로 무역상을 하여서 이나다 선생님이 사시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 내외가 한국에 오셨다. 박작가는 원산사범 동기 대여섯 명과 마중을 나갔다.

소설 아이 러브 유에 나오는 육발 선생님과도 인연이 이어졌다. 그분 실제 성함은 야마모토 선생님이었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육발로 알려졌다. 학생들이 육발을 보려고 맨날 쫓아다녔다. 훗날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선생님 부인을 만났다. 박순녀 작가가 한일우호협회 초청으로 일본에 갔을 때 만났다. 학교 다닐 때 야마모토 선생은 총각이었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그 부인과 여러 번 편지 왕래가 있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난 한국에 교육자로 왔지, 다른 것은 없었다고 말씀했다고 부인이 전했다. 박순녀 작가에게 물었다. 진짜 육발이던가요. “그 부인에게 확인했지. 소설에는 육발을 확인한 것처럼 썼지만 확인은 못 했거든요. 선생님 부인 말씀이 육발은 아닌데 조금 기형이라고

이나다 선생님은 체육, 야마모토는 국어 선생이었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원산에서 귀국하는데 참 비참했다. 양말, 신발조차 신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아이들 발바닥에 돌멩이가 박혔다. 이나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 무리에 섞여 어디를 갔다고 하면 그곳에 사는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먹밥을 드리곤 하였다. 이나다 선생님 딸인 나가하마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국에서 제자들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참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유골을 한강에 띄웠다.

 

박순녀는 월남 1세대 여성작가다. 해방 직후 학업의 열정으로 단신 월남했다. 월남 체험은 그녀의 작품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외상적 체험으로 자리한다. 소설 어떤 파리·잘못 온 청년등 많은 작품 속에서 남과 북을 오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을 담았다.

박순녀 작가는 젊은 시절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는요, 항상 배경에 누가 있었다. 그 시절, 고종사촌 오빠가 한 분 있었다. 요새 말하면 엘리트였다. 그 오빠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나를 더 예뻐했다. 이 오빠가 아무튼 여자는 배워야 한대요. 그때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유학 가려 했지만 패전국이 되어 갈 수 없었고 평양에는 대학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오니까 오빠와 일본에서 대학을 같이 다녔던 청년이 날 찾아왔다. 내가 자주 사촌오빠에게 편지를 썼는데 오빠는 그 편지를 기숙사 친구들이랑 다 돌려 읽었다. 그래서 그 기숙사에 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청년은 한국에 오니까 스승이 없는 거야. 서울대에서 강사를 하는데, 계속 있으면 서울대 교수도 될 수 있겠지만 뭐가 밑천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더 배우고 싶었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간다며 나더러 같이 가자는데 배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다.”

학창 시절, 박순녀에게 영향을 미친 고종사촌 오빠 이름은 허준許準이었다. 그는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 갔다고 한다.

허준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진 역경을 이겨내면서 보기 드문 친화력으로 자신을 키워 일본의 일고一高를 거쳐서 센다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지 나 어렸을 적부터 내게 열정과 꿈을 가질 수 있게 부단히 도와주었다. 말로, 글로, 행동으로 그는 나에게 주문했다. 공부를 하라고, 글을 읽으라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전적으로 그 오빠의 영향이었다. 해방이 남북을 갈라놓은 뒤 나는 남으로 왔지만 그는 조총련계여서 나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이중섭을 찾아서, 345)

월남하실 때 부모님은 함께 오지 못하였다 그 아픈 시간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도망쳤어요. 도망쳐서 오니까, 사흘 만에 우리 엄마하고 오빠가 잡으러 왔다, 서울에. 아무리 가자고 해도, 내가 안 가니까 타협안을 내셨다. ‘일단 가면, 집에서 다 허락을 받아 짐을 꾸려 보내준다는 것이다. 그때 서울에 오려면 조선은행권이 있어야 하는데, ‘집 안에 모아둔 조선은행권을 다 줄 테니 일단 가기만 해달라는 겁니다. 그걸 믿고 도로 함흥에 돌아갔었다. 집에 가니까 보낼 생각을 안 해요. 단식투쟁을 했다. 우리 집에서 7남매 중에 셋째 딸이었다. 딱 가운데인 고명딸 하나를 잃을까 봐 손들고 정식으로 보내줬다.”

그러나 그 와중에 월남한 박순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나를 다시 생각하였다. 좌우의 이념논쟁도 시들해지고, 다시 공부하고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지만,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청춘의 덫에 빠졌다. 남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름답지만 이어가기 쉽지 않은 청춘의 꿈. 박순녀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두 번째 아이를 가질 무렵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남편은 시댁 가족들과 먼저 피난을 가고 임신 때문에 그녀는 서울에 머물렀다. 뒤늦게야 피난지 제주도에서 합류했다. 그사이 남편에게 다른 여자와의 염문이 있었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단호하게 갈라섰다.

동명여고 교사를 그만두고 이듬해인 1960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까지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방송국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썼었다. 이를테면 잡문 같은 것을 많이 썼었다. 방송국 원고는 굉장히 쓰기 쉬웠다. 원고지를 다 메꾸는 게 아니고 대화가 몇 줄, 거기다 뮤직 넣고 하면 200자 원고지에 글은 3분의 1이 들어갈까 말까 하였다. 하룻밤에 100장 넘게도 막 썼는데, 하지만 쓰고 싶은 것은 소설이었다. 방송국에 오는 문인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의 원고 심부름을 하거나 고료를 전하곤 하였다. 어느 분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소설 쓰고 싶다고 그랬겠다. 나더러 진짜 쓰고 싶으면 방송국 원고를 접어라는 것이다. 소설은 막 써 내려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 충고를 따랐다. 딱 끊어버렸다. 그러고 소설 쓰기 시작한 게, 아이고, 힘들어.”

박순녀 작가가 2014년 펴낸 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동서문화사)을 펴낸 뒤 제5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김이석보다 14세 연하인 박순녀는, 아내를 사랑하고 딸을 위해 헌신하는 덕구를 그린 김이석에게 반했던 것일까.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6년 만에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신문 부음기사 제목은. ‘청빈淸貧 속에서 숨진 작가 김이석씨. 51세로 사망. 실비명등의 작품 남기고’(조선일보, 1964920, 5)이었다. 박순녀 작가는 남편인 김이석 작가의 죽음과 장례식 뒤 후일담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땐 문단이 좁아서 다 알았다. 신문에 크게 났었다. 게다가 두어 시간 만에 가버리니까 너무 충격이었다. 제가 동명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제자가 스승의 날에 찾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가 대학에 다닐 때 영화관에 갔던 이야기를 하였다. 대한뉴스를 보는데 선생님이 막 우는 게 나오더라는 것이다. 박순녀 작가가 그 시절 뉴스에, 뉴스거리가 없어 대한뉴스에 나온 사람이었다고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박순녀가 2014년 펴낸 소설 이중섭을 찾아서황소은박지의 화가 이중섭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중섭의 상대역이 남편 김이석이다. 소설은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데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박순녀는 생전 남편에게 이중섭과의 교우를 들었다고 한다. 6·25 전쟁 후 서울 명동 동방살롱을 배경으로 이중섭은 참혹하기 그지없는 빈한한 삶을 이어간다. 이중섭은 판잣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 웅크리고 앉거나,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나 화첩이 없으니 합판이나 종이, 담뱃갑 은박지에도 그렸다.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김병기 화백은 이중섭은 돈이 없어 큰 그림을 남길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중섭은 김광균의 시 설야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이중섭의 아내인 마사코가 김광균 앞으로 남편에게 쓴 편지를 보내면, 이중섭은 자기가 가지 않고, 김이석이 갖다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이중섭과 김이석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이중섭의 아내 남덕의 본명은 야마모토 마사코이다. 이중섭은 그녀를 남쪽에서 얻었다고 해서 남득南得이라 부르다 언제부턴가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인이라는 뜻으로 남덕南德이 되었다.

 

소설가 김이석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었다. “김 선생은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이북에서 단층동인으로 활동했는데, 한 동인의 남매가 아버지 없이 할머니랑 이남에 내려왔다. 게네가 수소문해 김 작가를 만났다. 부산 피란민 시절부터 돌보기 시작했는데 사실, 김 작가도 재력이 없었다. 남자아이는 어느 평양 출신 부자에게 맡겼는데 여자아이는 맡길 데가 없었다. 고료가 나오면 얼마를 보태주곤 했는데 나와 결혼할 무렵이었다. 고료를 1만원인가를 받았는데 내게 5000, 그 여자아이에게 5000원을 주며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저씨가 이제 가정을 가졌으니까 이제 도와줄 수 없다. 마지막이라고요. 그 말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중섭을 돌본 것도 이를테면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이중섭은 돈 관리를 못 하는 인물이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거지처럼 살고. 돈이 들어오면 쓰지 않고는 못 배겨서 다 써버렸다. 쓰지 못했을 때의 그 처참함!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쓸 때의 그 우월감! 이중섭이 제대로 돈과 그림을 관리할 수 있었다면 김 작가가 그 옆에서 얼쩡거리지 않았겠지. 혼자서 못 하니까, 보통 사람은 피하니까, 피하는 상황에서 이중섭을 도와준 겁니다.”

박순녀 작가는 남편 김이석 작가가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고 말한다. 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의 결말에 김이석 작가에 대한 박순녀 작가의 믿음, 변치 않는 사랑이 실려 있다. “김이석 작가는 내가 어떤 땅에 어떤 척박한 조건으로 태어난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노력뿐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그는 내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어서 나는 3년 남짓 맹렬하게 책만 읽을 수가 있었다. 길을 잃어도 제자리로 돌아올 지표를 마련해준 것이다. 겉돌면서 산 나에게 스스로를 올바로 알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가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박순녀 작가는 1950년대 당시 고료가 괜찮은 방송작가 1호로 활동했다. 김이석 작가는 수줍은 성격이었다. 박순녀 작가는 그의 소설 실비명을 읽고 한방에 가 재혼했다. 박순녀 작가는 싫어한 교사를 그만두고 김이석 작가에게 받은 3년 사숙은 생애 최고 배움으로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김작가를 황망하게 여의고 살림을 꾸리며 글에 정진했다. 남남북녀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정호·임옥인·최정희·최현식 등과 교류했다.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의 따님인 김채원 소설가와 필자가 관동대진재 다큐를 제작하는 재일한국인 오충공 감독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인사동 화봉문고에서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승천하는 청춘(1925)을 따님인 김채원 작가가 낭독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박순녀 소설가와 담소한 내용을 김채원 작가에게 보내면 김작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말씀한다. 이제는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계신다며 자주 찾아가 귀한 시간 보내라며 격려한다.

박순녀 소설가는 해방 후 북한에서는 거지나 매춘 등을 볼 수 없었다며 6·25 한국전쟁 후 월남한 분들의 자식 교육에 대한 자존감에 대해 말씀을 하였다. 북쪽에 고향을 둔 예술인들의 소외감을 드러내며 문학관과 추모제 등에 대해 말씀했다. 유품에 대해 공공 기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말씀했다. 중랑구청과 망우리공원 관리와 유지 등을 이야기 나누며 정상 궤도 오르면 기증 의사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20213월 급작스레 사망한 후 필자에게 전화하여 정선생이 책임지고 망우리 김작가 옆에 유골을 묻어달라며 이제 마음 놓인다고, 지금도 김작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서울교원문학회 회원들과 망우리공원을 답사하며 김이석 소설가의 묘역을 알려 준 뒤, 성동고등학교 국어 수업을 받은 수필가 한명희 전임 회장님으로부터 받은 소설가 김이석 선생님 추모의 글을 망우리 묘역에서 낭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