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사이토 오토사쿠 86주기

정종배 2022. 6. 28. 08:30


조선총독부 기사 농상공부 산림과장 영림창장 포플러 아까시나무 도입 식목일 제정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 1866~1936) 86주기

사이토 오토사쿠는 1966년 10월 일본 니이가타현 출생이다. 1891년 도쿄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 산림국에서 근무하였다. 1895년 동경 우시고메 일본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해 청일 전쟁에 종군한 경험을 인정받아 대만 총독부 임이포무간서장이 되고 혼다와 함께 옥산 탐험에 성공하였다.

1899년 귀국 후, 이시카와현 기사를 거쳐서 1902년 야마나시현 제6과 초대과장으로 '삼림 정치'를 담당했다. 1906년부터 홋카이도청 임정과장으로 임용되어 국유림 존폐 구분의 실시, 가문비나무·분비나무의 천연 갱신법을 연구하고, 1908년 6월 1일 삿포로군 노보로의 국유림 내에 내무성 노보로 임업시험장을 설치하였다. 홋카이도청 임정과장 겸 지방 임업과장 겸 임업시험장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1월 대한제국 산림국 기사로 초빙되어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 초대과장으로 조선 임야 분포도를 제작하였고, 조선 삼림령을 작성하였으며, 기념식수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단순히 애림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치산치수와 목재 생산을 의식하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1915년 영림창장으로 신의주에 갔다가, 1918년 퇴직과 동시에 조선산림회를 창립하여 상담역이 되었다. 제국 삼림회가 설립되자 평의원이 되었고, 주식회사 황해사 임업부 고문의 이름으로 전 책임을 맡아 산림 신탁업부를 만들었다. 그 후 업무 일체를 계승하여 사이토 임업 사무소를 세워 조선의 녹화 및 활산 활수의 촉진에 노력하였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조림업에 매진 경성로타리클럽 회원으로서 활약하고 경성기독교청년회 평의원에 뽑히기도 했다.

사이토는 “원래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산을 소유한다고 하는 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선인 대다수는 남벌 폭채를 일삼고 식림을 행하는 것이 적었다. 산에 대한 소유권이 안정되어 있어야 자기 땅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의식도 생기는 법이다.”라고 하여 조선인들 사이에는 원래 임야 소유권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임야 황폐 현상이 극심해졌다고 주장하였다.

1932년 경기도의 지침인 『조선 임업 투자의 유망』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1936년 6월 28일 별세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으며, 경성 일본 기독교회 장로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 산림정책의 총수로 일제의 조선 임야 수탈을 지휘했으며, 강압적이고 고식적인 식목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비난을 면치 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임업 근대화를 주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한국에 식목일을 제정하고 아까시와 포플러(미루나무)를 심는 것을 건의하고 주도적으로 실행했다.

사이토 오토사쿠의 경기여고 출신인 손녀가 『두 조국』이라는 책을 썼다. 우찌무라 간조의 친구인 사이토 오토사쿠의 조선신궁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색의 길 일방통행 길을 따라 동락정 정자를 지나 조봉암 선생 유택과 오기만 선생 안내판 전 오른쪽 묘역 입구 들어가는 돌문 두 개 사이에 사이토 오토사쿠 묘지 안내판이 서 있다. 30여m 올라가면 일본식 묘비가 서 있다. 돌문으로 미루어 보면 사이토 오토사쿠에 대한 추모의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1970년대 일본에서 유족들이 망우리공원 묘역을 찾으려 직접 방문하였으나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갔다. 망우리공원 흙 한 줌을 가져가 사이토 오토사쿠 고향의 가족 묘지에 뿌렸다.

2017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에서 아사카와 다쿠미 추모식을 치르며 사이토 오토사쿠도 함께 첫 추모행사가 이루어졌다. 산림 관계 학자들의 거센 항의에 한 번의 행사로 끝났다.

일본강점기 임업과 산림정책을 연구해 온 공주교대 최병택 교수는 연합뉴스 통화에서 "사이토는 식민지 임업 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라며 "조선총독부가 내걸었던 식민지문명화론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사이토는 한국의 모든 관습과 제도를 야만시하고 일본의 시스템을 문명으로 포장하는 데 앞장섰다"며 "그런 사람을 추모하는 것은 식민지 담론을 제대로 비판하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지적했다.
'임업 근대화와 녹화에 기여한 사람'이라는 주장과 '산림 수탈의 지휘자'라는 평가가 엇갈린 셈이다.

사이토의 묘는 한국식 묘와 달리 봉분이 없다. 일본식으로 묘비 아래에 화장한 유골을 묻은 것이다. 묘비 뒤에는 사이토가 사망한 1936년을 뜻하는 '쇼와(昭和) 11년'이 적혀 있다.

1936년은 경성부립 망우리공동묘지가 1933년 지정하여 정비작업 후 매장이 시작된 해이다. 유관순 유해가 묻혀 있다고 추정하는 이태원공동묘지무연합장분묘 비에도 쇼와 11년이 새겨져 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노치환 사무총장은 묘비의 파손 흔적을 가리키며 "한국전쟁 당시 총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들"이라고 설명했다. 노 사무총장 등은 돌아가며 묘비 주변에 막걸리를 부은 후 묵념하는 것으로 참배를 마쳤다.

참고로 한국전쟁 상흔이 남아 있는 유명인사 묘비와 상석은 명온공주와 김현근, 장덕수, 신명균 등이다.

망우리공원에 있는 설명 게시판에 따르면 사이토는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 퇴직했으나 한국에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림 위탁경영 사업을 했다.

그는 차관·국장급을 일컫는 칙임관 이상의 관료로 한국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이기도 하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사이토의 영향으로 임업계에 투신했고 한국에서도 인연을 이어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2년~1923년 사이의 다쿠미가 쓴 일기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와 왕래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