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576돌 한글날 망우역사문화공원 한글 연구 보급 운동을 하신 분

정종배 2022. 10. 7. 19:41

한글학회 이사장 역임 김호직 콩박사

송촌 지석영 묘비

청산리 전투 참전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명재 이탁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이종일

일장기 말소 사건 이순신의 난중일기 최초 한글 번역 충무광

소파 방정환의 묘비 위창 오세창 글씨

3.1혁명 33인 박동완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 역임 주산 신명균 묘비

576돌 한글날 망우역사문화공원 한글 연구 보급 운동을 하신 분

576돌 10월 9일 한글날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 매년 10월 9일이다. 2005년 국경일로 승격되었고, 2013년부터 공휴일로 지켜지고 있다. 1926년 11월 조선어연구회를 주측으로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해 기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5년부터는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 말문에 적힌 날짜에 근거하여, 지금의 10월 9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각종 학술대회와 백일장이 거행된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는 한글 말살을 꾀해 각급 학교와 공식 모임에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조선어 큰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기 위하여 1942년 10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발단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경찰이 트집잡으면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교육한 교사 정태진을 체포하였으며, 그가 관여하던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하여 33명의 조선어학회 회원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켰다.

망우역사문화공원 한글 연구 보급 운동을 하신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송촌 지석영(1855~1935)은 종두법의 도입자, 관립(국립)의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의학의 선구자, 1905년 상소문을 올려 개화가 늦어지는 것은 한글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07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어 주시경 등과 국문 보급에 힘썼다.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사전인 자전석요(1909)를 간행했다.

소파 방정환(1889~1931)은 어린이란 말 사용과 어린이날제정에 힘쓰고 어린이잡지와 사랑의 선물을 통해 문맹 퇴치 및 한글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나라 꽃>을 작곡한 함이영91915~1957)과

<오빠 생각>의 오빠인 영주 최신복(1906~1945)과

베이붐 세대들이 초등학교 시절 가장 많이 부른 동요
<어린이 노래>∙<코끼리>∙<꼬마 눈사람>∙<산토끼>∙<태극기>∙<금강산>∙<유관순 노래>∙<스승의 은혜> 등을 작사한 소천 강용률도 어린이 운동과 동요를 통해 한글 보급 즉 우리말 사용에 공헌하였다.
강소천(1915~1963)은 1937년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8·15광복 때까지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창작 동화와 동극을 실험하고 한글을 연구하였다. 조선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동요 90곡 작시와 300여 동시와 동시집을 동화 9작품집을 발간했다.

 

기독교인 민족대표 33인 만주와 하와이 민족의 의식 북돋운 목사 및 교육자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한편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당시 기독교신보는 일제강점기 초기 한국인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민족 언론이었다.

학범 박승빈(1880~1943)은 변호사로 법전의 편찬을 기획하면서 국어표기법 통일의 필요성 절감하고 국어연구의 길로 나섰다. 문일평, 오세창 등과 결성한 계명구락부(1918)는 1927년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사전 원고를 인수하여 한동안 사전 편찬도 시도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설립하고 기관지 정음을 간행하고 저서 조선어학(1935)을 남겼다. 한글맞춤법 제정시에는 조선어학회의 표의주의에 대립하여 세종 이래의 전통적 표음주의(: 먹으니머그니)를 주장하며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지기 문명훤, 1892~1958)은 한글을 연구하여 한글 제 문화, 국어의 참두루미라는 저서도 남겼다. 그의 연보비에는 “말에는 본이 있고 글에는 법이 있다. 말과 글이 같은 민족의 사회에서 말의 본이 글의 법이오, 글의 법이 곧 말의 본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묘비와 상석과 연보비 남음. 연보비에서 묘지 터를 찾아가기 제일 어렵다. 연보비는 경기도 구리시 묘지 터는 서울시 중랑구에 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박현식, (신명균), (명재 이탁) 등이 있다.

(주산 신명균, 1889~1941)은 최현배, 김두봉 등과 함께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제1(1913) 졸업생으로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이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발족에 참여했고, 1927년 잡지 한글의 편집과 발행인이 됐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언문철자법회에 참여하여 우리 철자법을 주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을 역임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자결하였다. 2017년 뒤늦게 애국장 서훈을 받았으나 묘는 이미 2003년경 무연고로 처리되어 용미리 무연고합장묘로 옮겼다는데, 아직 그 위치를 모른다. 묘비는 남아 있다. 초혼장으로 다시 모시길 빌어본다.

오봉 박현식(1894~1954)은 중동학교 교사 출신으로 한영학원 설립자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12일 맞춤법통일안 제정을 총회에서 결의하고 원안을 1932년 12월에 작성하였는데, 박현식은 신명균과 함께 12인의 한 사람으로 원안 작성에 참여하였고, 1933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맞춤법통일안을 통과시켰을 때, 신명균, 명재 이탁과 함께 작성위원 18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명재 이탁, 1898~1967)은 오산고보 교사를 하며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 독립운동가(애국장)로 1992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비석은 서울대 제자들이 세웠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발기인 108명에 박승빈, 박희도, 방정환, (신명균), (이탁), 지석영(6)이 참가하였다.

1935년경 결성된 사전편찬후원회원 14인에 설태희(1875~1940), 설원식 부자가 참가하였다
설원식(1896~1942)의 묘에 적힌 호 석천(石泉, 돌샘)은 주시경의 호 백천(白泉, 흰샘)에서 따왔고, 매제 김두백은 국어학자 김두봉의 동생이며,
동생 설의식(1901~1954)도 해방 후 한글문화보급회 명예위원장을 맡았고 난중일기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였다. 충무광으로 불릴만큼 충무공 이순신을 알리는데 온힘을 다했다.

(이종일, 1858~1955)은 일제강점기 때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래 경향 각지의 7개 학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고 1898년에는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다. 31혁명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서 원고를 스스로 조판.교정.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다. 그 뒤 대한협회ㆍ자강회ㆍ조선국문연구회 등 구국단체를 조직하여 정신개조를 주장하고 근면ㆍ노력을 강조하였으며,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김호직(1905~1959)은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 수석 졸업. 1949년 정부 파견 제1차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영양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년 반 동안 영양학을 전공하여 이학박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 "콩의 생장 촉진소" . 당시 세계 생물학계에 커다란 각광을 받음.
한국을 떠나기 전 개신교 장로교인이었던 김호직은 미국 유학 생활 과정에서 학교 친구였던 올리버 웨이맨의 전도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속칭 모르몬교]의 신앙을 접하였고, 1951729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침례를 받게 되었다. 1952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는 영양학자·교육자이자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개척자로 활동하였다. 1957년 한글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건국대학교 축산대학(한국 최초 축산대학) 초대학장에 역임하였다. 1959년 9월 4일 사회장으로 장례식. 망우리 묘소에 영면했다.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 참상을 목격한,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은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 장형두(張亨斗, 1906~1949)는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하고, 19342'경성식물회' 창립하여 조선향토식물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생과 애호가들이 참여했다. 장형두는 1935년 3월 '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경성식물회’를 개칭하며 '조선식물학연구회창립을 주도했다
1949년 학생용 식물도감 학생 조선식물도보(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를 발간하여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비록 종이 질이 떨어지지만 많은 식물의 그림은 나카이의 '조선삼림식물편'의 그것에 못지않다. 그래서인지 초판이후 1년 동안 제4판까지 인쇄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도감이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과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되기를 서문에서 밝혔다. '식물''묻사리''고산식물''높산묻사리'동물옮사리로 하는 등 철저하게 한글로 표기했다. ’묻사리'땅에 묻혀서 사는 생물'이라는, '옮사리'움직여 옮겨가며 사는 생물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당시 한글학자 최현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형두 식물분류학자 조선의 유일무이한 천재 식물분류학자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하고, 19342'경성식물회' 창립 19353'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경성식물회’를 개칭하며 '조선식물학연구회‘ 창립을 주도 장형두 선생은 '일본과 맞짱 뜬 식물학자', "조선 식물상은 조선인 손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민족주의자로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49년 10월 21일 좌익?(밀수)으로 몰리던 조카에 대한 연루 혐의?로 서울 중부서에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3일만인 23일에 고문치사에 의해, 조선의 유일한 권위자로 천재적인 식물(분류)학자를 어이없이 잃어버렸다.

19491026일 제헌국회 제5회 국회임시회의,조선어학회 관련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와 성북동 길상사를 시주한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가 진향이란 기생으로 함흥 형무소에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고,김영한 여사 일본 유학을 도왔다는 흥사단 단우인 신현모 의원이 발의한'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의 속기록 일부다.

"장형두씨로 말하면 본래 전남 광주 사람으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학자입니다.그이로 말하면 식물연구를 한20년 동안이나 하고 자기 추수 2,000석이나 되는 재산을 다 없애고, 백두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으로 돌아당기면서 식물을 수집해서 표본을 맨들고 장차 사범대학에 식물표본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맨들겠다고 그런 포부를 가지고 지금 사범대학 부설중학 조고만 강실(講室)을 하나 빌려 가지구서 거기서 자기 부인과 어린 자제와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을 터입니다."

요정정치가 극에 달할 때 3대요정으로 알려진 성북동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 경내 길상화 법명 묘비로 남은 김영한은 당시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던 한글학자 신현모 선생의 눈에 띄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1937년 신현모 선생이 동우회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함흥경찰서에 유치된다. 이 소식을 접한 김영한은 유학을 포기하고 함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신현모 선생의 면회를 거부한다.
김영한은 면회 기회를 찾기 위해 함흥 권번에 들어가 다시 기생 진향이 된다.

며칠 후 영생고보 연회석 자리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천재 시인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고보를 나와 일본유학을 마치고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영새고보에서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세살 어린 강소천과 스승과 제자로 만나 월남 후 소천이 <스승의 은혜>를 작시하였다

잘생긴 외모는 요즘 배우 공유를 닮은듯 하기도 했다.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백석 26세 기생 진향 22세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당시 여인이 읽고 있던 <당나라 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서 그녀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다.
백석은 자야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시인 백석의 부모가 기생과 결혼 시킬 수 없다고 반대한다.
백석은 부모님의 강요로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백석은 신부를 보지도 않고 자야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 뜨거운 밤을 보낸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같이 살자고 간청하나,자야는 서울에 남겠다고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난다.
이때 백석이 자야에게 봉투를 건넨다.
봉투속에는 자야를 그리워하며 지은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가 들어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팍팍 쌓이는 밤 힌 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덜어워 벌이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42년 한글을 쓰지 못한 일제시대 엄혹한 시절에 시집을 내려 15여년 쓴 시를 한글로 정리한 독립운동가 추담 허연 선생은
2010년 허경숙 허일 허달 3남매가 아버지 허연 시집 '박꽃'을 발간했다. 손자인 허용은 30여년 전 서훈을 받지 못한 할아버지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 보훈처에 제출했다.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의 동생 함성덕은 무역상으로 부를 쌓고 산부인과 의사인 박명희 부부는
박명희의 아버지인 송암 박두성이 훈맹정음 맹인을 위한 한글 점자 1926114일 반포 후 교육 및 홍보 후원자로 힘을 쏟았다.

시간 나시면 서울둘레길 2길인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을 걸으시며 선인들의 얼과 삶을 되새기며 성찰을 통해 즐거운 나날이길 빕니다.

중랑망우공간 2층 전시실 한글 관련 내용으로 연말까지 전합니다.

가을이 깊어 갑니다.
망우카페 커피를 마시며
저녁노을 노을빛에 젖어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