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동아일보 초대 주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
장덕수는 동아일보 초대 주필 및 부사장으로 신한청년당·한국민주당 외교부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쳤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 간사와 국민의용대 지도위원으로 친일 인명사전 수록되었다.
장덕수는 본관은 결성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교육자·학자·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남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그 뒤 임정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사회 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강점기 전시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발기인 성명서 작성을 기초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찬성과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놓고 김구, 이승만 등과 갈등하다가 제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단정 지지 노선으로 선회했다.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에서 태어났다. 농부인 아버지는 장붕도이고 어머니는 김현묘의 셋째 아들이다.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까지 9대 독자였는데, 4형제가 태어났다.
형 장덕준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일찍이 신문물에 눈을 떠 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일본식민통치하에서 최초로 순직한 한국 언론인이 되었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동생 장덕진은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카지노를 털다가 사살되었다. 형제들이 외국어 능통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유년기 때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했다. 진남포의 한 학교에서 장덕진 등과 하숙,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독학으로 판임관 시험에 합격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평생 친구인 송진우, 김성수 등과 사귀게 되었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하고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에 도착, 독립운동을 하다 여운형·서병호·신채호·신성모 등과 교류하며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한 신한청년당 조직에 간여하였다.
1919년 여운형은 상하이로 귀환하기 전 장덕수와 헤어지면서 보다 나은 환경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다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이별은 여운형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운형의 '동경회담'에 통역으로 선정되어 거주제한에서 풀려났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이 되어 활동했다.
또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관여하고 의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장도빈·오상근 등과 함께 청년단체의 통일을 위해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조직했으며 1921년 1월에는 김한·홍증식·김사국·이영· 오상근·김명식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했다. 한편 1920년 가을 최팔용·이봉수·주종건· 김철수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1921년 6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재무위원 및 국내부 간부로 참여했다.
그러나 1922년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자금 문제로 일어난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부인과 함께 묻혔다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회의 간부 김사국은 그를 축출하려 음모를 꾸민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사국은 1921년 가을부터 이른바 사기 공산당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자 장덕수를 맹공격하여 1922년 4월에 장덕수를 내모는 데 성공한다.‘ 장덕수를 비난한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지 37년 뒤에야 결백이 증명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뒷날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는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 김철수가 1980년 5월 16일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 돈은 장덕수가 아니라 최팔용에게 전달됐다.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리하여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한 장덕수는 치요다 구 간다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장덕수 구타사건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된다. 그러나 후일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1947년 12월 2일 새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 청설장에서 종로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 박광옥·한독당 당원인 초등교사 배희범 등의 총에 맞고 절명했다.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 때문에,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던 백범 김구는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 암살현장에 망우역사문화공원 이영준 박사도 함께 있여 입방아에 올랐다.
장덕수 박은혜 부부 유택 비문은 미국 유학 시절 장덕수의 청혼을 딱지 놓고 박은혜를 소개한 김활란 박사가 짓고 원곡 김기승 서예가 글씨를 새겼다. 6·25 한국전쟁 때 망우산전투 상흔이 망주석과 문인석에 남아 있다. 문인석 얼굴이 총탄에 상처를 입었다. 페친인 안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려 대장동 50억 클럽으로 국회의원을 그만둔 이와 같다며 농담을 할 정도로 닮았다. 부부 유택에 접한 아차산 산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답사길이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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