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김춘배 독립운동가

정종배 2022. 12. 1. 08:58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전북 완주 기독교와 독립운동 명가 신출귀몰 독립운동가
김춘배(金春培, 1906~1942)

2020년 4월 18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이 단체 카톡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망우리공원 답사 중 찾아 찍은 묘비와 묘역이었다.
묘비 앞면, 河東鄭公春山之墓(하동정공춘산지묘). 묘비 옆면, 원적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향봉동 367번지 독립운동 옥살이 후유증으로 돌아가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시즌(2) 단체 카톡 채팅방에 김춘배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가 뜨겁게 올라왔다.

독립운동가. 별명은 상배(相倍ㆍ尙培)·길동(吉同)·정춘산(鄭春山)·한중해(韓仲海). 1906년 2월 29일 태어나 1942년 7월 8일 순국했다.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본적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1385번지. 주소는 함남 북청군 신창군 신창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시기는 1927년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때로 1934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다음 시기는 1934년의 의열투쟁인데, 이로 인해 광복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보내었다.

1927년 2월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정의부 부대에 가담하여 권총 2정과 실탄 17발로 무장한 뒤 6차에 걸쳐 자산가를 역방하며 무장항일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간도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영사관 소속의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에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7월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나 재차 붙잡히는 바람에 징역 1년 10개월이란 기간이 가중되어 모두 8년의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에야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1934년 10월 3일 함남 북청군 양북면 신창에 소재한 경찰주재소의 무기고를 단신으로 공격하여 파괴하고 권총 2정과 실탄 100발 및 장총 6정과 동 실탄 600발을 탈취한 후 일경 및 자경단원 등 2만여 명이 동원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일인 순사부장을 비롯한 2명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맹렬한 활동을 펴다가 19일이 지난 1934년 10월 22일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주거침입과 절도·강도·살인미수 그리고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동년 12월 초에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가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지만, 아내는 죽었고, 아들은 어려 그를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해방 이듬해 12월 1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길거리에서 숨을 거뒀다. 망우리 공동묘지 한구석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춘배 집안은 가산을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가문이다. 형 김성배 목사 등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독립운동가 김춘배보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김헌식 영수를 먼저 소개해야겠다. 김헌식 영수는 1902년 한국에 온 맥쿠첸(McCutchen; 한국명:마로덕)선교사에게 이듬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삼례제일교회 초대 영수가 되었고, 1907년 봄에는 교인이 100여 명가량 늘어 김헌식의 사랑채에서 예배드렸다. 김헌식의 아들인 김창언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의 갖은 행패를 참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1918년 토지를 처분하여 머슴들에게 나누어주고 53명의 가족이 만주 용정 천보산으로 떠났다. 만주에서 나라 잃은 설움이 짙어졌고, 슬하의 5형제는 이후 독립군 홍범도이 이끄는 부대 등 여러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올해 광복 73주년을 맞이하여 도서출판 ‘흔적’에서 「독립운동가 김춘배(이승철, 김경근 엮음)」라는 단행본을 냈다. 잊혀진 크리스찬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다시 조명하며 선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발행인 정복량 목사는 말했다.(박세홍, 2018.8.15. 가스펠투데이)

독립운동가 김춘배 일명 정춘산 생애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철수 시인, 김영식 작가, 김수종 작가, 김금호 국장, 필자 등 모든 채널과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찾아 헤맸지만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가 김춘배 손자임을 확인했다. 망우리공원 정춘산 묘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어렴풋이 망우리에 묻혀계신다는 말로 기억되지만, 할아버지 묘지가 망우리공원에 있다는 것으로 매우 당혹스러워 서울에 회의차 올라오면 필자와 만나 묘지를 확인하기로 하였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위패 봉안 시기가 2019년 2월 20일로 확인되었다. 김경근 목사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필자와 한 시인, 김 작가, 김 국장 모두 김춘배 독립운동가의 신출귀몰한 삶과 독립운동의 길을 추적하는 통로가 막혀 답답하지만, 그분의 활약상에 대한 흥미가 더욱 배가됐다. 하지만 위패 봉안을 비롯 김경근 목사 형님이 동생과 소통 없이 유해 없는 위패로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망우리공원 사무실에 문의하여 묘비의 망자와 후손들 이름으로 묘지관리대장 컴퓨터프로그램에 입력하여 찾았으나, 전혀 후손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묘비를 세우면서 쓴 도구가 상석 아래에서 나왔다. 묘비를 세운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묘지번호가 나왔다. 묘지번호로 찾았으나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 후손과 통화하였는데 20여 년 전 망우산 능선 너머 조봉암 선생 묘역 근처로 이장을 했다는 것이다.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오후 2시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가 망우리공원 하동정공춘산지묘 묘비와 봉분을 확인하러 올라와 필자도 동참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도 함께하여 의문을 조금이라도 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손자인 김경근 목사가 한 시간 앞 당겨 오후 1시에 망우리공원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금호 국장과 맹강주 주무관 동행하여 김 목사님 차로 이동하여 넷이서 묘지를 찾았다. 장덕수 묘역에서 동락정 방향 사색의 길 굽이돌아 길 아래로 내려가 50미터 지점에서 좌측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묘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마침 옆 묘역에서 산제를 모시고 있었다. 김국장이 옆 산소에 대해 물었으나 한 번도 함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묘지번호 표지판이 나타나 희망의 끈을 이어갔다.

김경근 목사와 대화를 정리하면 김춘배 의사 가계 독립운동 명가로 조부와 아버지 5형제 후손들이 중국 북한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김춘배 의거를 김일성 일대기 초판에 ‘만보산 사건’의 모델이라 하여 남쪽 후손들 연좌제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초기기독교 공동생산 분배를 주장하였다는 신문기사 한 줄에 서훈이 늦어졌다. 완주 삼례에서 기념관 건립과 교육 등을 계획하고 있는데, 망우리공원 묘역이 김춘배 독립지사이길 바라며 망우리 묘비 이름으로 경찰의 신원조회 방법을 이용하는 방법과 묘지 관리인을 찾아 후손들과 연락을 하고 있는지가 연결 고리로 찾아보기로 약속했다.

지금까지 김춘배 묘지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연락받은 이가 횡설수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전한다.

신창지서습격사건 호외기사 동아일보

8년 형기 마치고 가족 사진 뒷줄 오른쪽이 김춘배 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