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계산 김승민
독립운동 지휘자 비밀정원 계산(桂山) 김승민(金升旼, 1872~1931)
김승민은 자는 문일(文日), 호는 계산. 지릉참봉, 봉상시부제조, 비서승 등을 역임했다. 1872년 12월 11일 함경남도 함주군 연포면 신흥리에서 태어나, 1931년 11월 20일 중국 안도현에서 서거했다. 1906년 최익현 등과 함께 의병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06년 5월 18일에는 오적토벌관계로 일본군 감옥에서 1년 반 옥고를 치렀다.
1909년에는 해아밀사사건으로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중국을 망명하여 1920년에는 봉천성 안도현에서 홍두식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광복단을 조직하여 300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으며, 1923년 가을에는 흥업단·군비단의 3개 단체를 통합하여 광정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에는 만주 봉천성 안도현에서 대동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다가 간도 일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256 자리로 이장했다.
계산 선생 묘지 터(묘지번호 205189)는 서울 한강 이북 한북정맥 산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사계절 막힌 마음 꿰뚫어 힘을 얻고 갈 수 있는 숨겨둔 비밀정원이다. 필자가 묘지관리인으로 등록된 서해 최학송 묘지 참배 후 몇 번을 그냥 지나친 계산 선생의 묘지 터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눈 밝은 김금호 국장이 반쯤 묻혀 누운 비석에서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알아보고, 계산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을 알렸다.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일으켜 세운 비문을 읽어본다.
김승민 선생의 자는 성극星極이요 호는 계산桂山 단기 4205년(1872, 고종9년) 임신 12월 11일 함주군 연포면에서 탄생. 소시부터 면학. 그 뒤 주유천하 하며 산천을 즐기다가 24,5세부터는 영흥군 소재 도안암에서 오도일매悟道一昧 한때 삼남三南에서 이 암자에 모인 제자만도 수천 명을 헤아렸음. 광무 10년(1906) 5월 정3품 통정대부 비서감승(비서실장)에 임명되어 황제로부터 사전師傳의 대접을 받았음. 동년 황제의 밀지사건(일제 경찰이 말하는 김승민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대문 일인 감옥에서 1년 반 복역. 동 사건의 탄로로 광무황제는 마침내 양위. 그 뒤 해삼위로 밀항 도중 일 헌병에 피체. 다시 함흥옥에서 6개월 복역. 출감 후 만주로 망명. 이후 30년간 북만 일대를 전전하셔 독립군 백여 명과 더불어 광복단장 혹은 대동회장으로서 무력 항일투쟁에 전념 한편으로는 이민의 권장 후진교육의 개발 독립군의 양성 등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단기 4264년(1931) 9월경 안도安圖에서 흉도의 저격으로 순국. 단기 4301년(1968)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추서 받음. 좌부 성재문 여사는 4207년(1874)년 감술 9월 12일생 일찍이 부군인 선생의 뒤를 따라 도만.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필성에 절하는 고난을 겪으며 선생의 독립운동에 협조 그 업적 두드러진 바 있었음. 단기 4292년(1959) 음 8월 14일 선생의 안부에 집념하며 고국의 품에 안겨 장서. 두 분의 빛나는 독립운동 사적을 기리 새겨두기 위하여 이에 추모비를 건립하며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비는 비임. 건국기원 4301년(1968) 8월 일 재만공복동지 대표 후학 이현익李顯翼 찬지撰識 학남 정환섭鄭桓燮 경서敬書
사색의 길 길섶과 묘지 터 입구에 ‘계산지묘’ 묘지 안내석 2개 남아 있어 선생의 명성을 말하고 있다. 소전 손재형 선생의 수제자인 서울대 미대 출신 학남 정환섭 선생은 필자의 서예와 풍수 선생인 서예 60년 풍수 50년 인전 신덕선 선생의 스승이었다.
다음은 김수종 작가의 칼럼, 고종황제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지사 김승민 ’망우리 공원에 잠들다‘ 브레이크뉴스 기사(2022/04/09)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 4월 7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무실에 방문한 선생의 손녀 김성자씨에 따르면 조부는 중국에서 순국했고, 당시 가족들은 만주 용정에 거주하여 산소는 그곳에 있다고 들었다. 해방 이후 큰할머니 후손들은 대부분 만주와 남북에 흩어져 남았고, 두 번째 부인이었던 제 할머니 성재문 여사와 고모, 아버지는 서울 종로에 정착했다.
현재는 아들, 딸들 모두 사망했고, 나이든 손자, 손녀들만 남아있는 관계로 조부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1959년 조모가 사망하자, 망우리공원에 조부의 영혼을 불러 허묘를 만들고, 조모와 합장하는 형식으로 묘소를 만들었다.
이후 1968년 조부께서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추서 받아 현재 망우리에 남아있는 비석을 세웠다. 다시 1990년에는 ‘애국장’서훈을 받았다. 묘소를 관리할 손자들이 많지 않아 1994년에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에도 만주와 북한 고향에서의 생활이 힘들지 않았던 데는 일제 강점기 북에서 말단 공무원이었던 백부의 꿈에 조부께서 나타나 “산을 사라”는 말을 듣고 구매한 산에서 철광석이 발견되어 광산으로 큰돈을 벌어 독립자금도 보태고, 가족들 봉양에도 큰 도움이 됐다.
선생의 후손으로는 해방 이후 서울에 자리를 잡고 한국기원을 만드는데 일조한 김벽, 그의 아들인 바둑해설가 김수영, 바둑인 김수장이 있다. 또 서울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막내아들 김벽두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철학과 신문학을 전공했고 민중일보 주간을 지냈다. 이후 국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전우신문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아울러 부친, 모친과 함께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장녀는 북에 남았고, 그 아들 중에 하나는 소련 군사고문단 소속으로 러시아어통역관으로 활동했던 주영복이다. 그는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중립국을 선택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이민하여 살다가 말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주영복은 중국, 러시아어, 스페인어, 일어까지 능통했던 인재로 <내가 겪은 조선전쟁 I권, II권>(고려원),<76인의 포로들>(대광출판사),10년 이상 작업하여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단어를 정리한 <포-한사전>(성안당)을 집필했다. 특히 포-한사전은 지금도 포르투갈어 학습에 절대적인 자료다. 아직도 그의 사전을 능가하는 것은 나오지 않고 있어, 수요는 줄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초기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소좌 주영복은 주소만을 들고 외삼촌 김벽두가 살고 있는 종로 효자동을 찾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작은 외조모와 외숙부, 외사촌들을 잠시 만났다. 얼마 후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서 생활하다가 석방되어 브라질로 갔고, 이후 사진결혼을 서울 외가에서 주선하여 사진만으로 신부를 구해 한국인 아내와 브라질에서 결혼했다고 한다.
김승민 선생의 묘비는 글을 지은 이현익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905년 만주로 이주, 광정단의 외교부장으로 김승민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후 독립운동의 한편, 민족 종교인 대종교(단군교)의 전도에도 진력했다. 1944년 목단강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5년 광복 직전 소련군의 만주 진출로 출옥했다. 1990년에 김승민과 함께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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