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이경숙

정종배 2022. 11. 20. 20:54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이경숙

 

이 겨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사회운동가 이경숙(李景淑, 1924.3.9.~1953.11.18.)

 

 

묘비 앞면, 李景淑무덤. 묘비 뒷면, 소년시절엔 일정하 민족애의 꽃 청년 때엔 정열적인 어린의의 스승 장년엔 크리스챤홈의 태양 이 나라 MRA운동의 개척자의 하나 순수한 신앙 착한 덕행의 30년 일생은 이 고장 여성의 영원의 거울 19531118일 서울대학교 교수 유달영 씀

 

성천 유달영 선생 개성 호수돈여고 이경숙 3년 내리 담임교사 입학 때는 우울하다 담임을 아버지로 믿고 따라 2학년부터 놀라운 성장에 눈을 몇 번이나 비벼 바라봤다 평균 97점 성적으로 졸업했다. 늘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겸손했다. 유달영 중매와 주례로 결혼했다. 이경숙의 한결같은 신념은 "이 겨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으로 페스탈로치와 같은 삶을 살고자 개성 큰 학교 스카웃을 외면하고 시골학교 교사로 늘 너그럽고 부드럽고 남 앞에서 말하기 쑥스러워하였지만 불의에는 엄숙하고 날카로운 얼굴로 맞서며 몸과 마음 다 바쳤다.

 

샤머니즘에 완고한 시어머니 시집살이 고달팠으나 "제 며느리는 성인이죠 이 하늘 아래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도 착하고 어진 마음씨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어요 선생님" 며느리를 좇아 크리스천이 되었다. 성천에게 고백했고 화장터에서 이경숙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성천 유달영이 망우리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여 주었다.

 

큰 스승 시인 구상 말년에 불편한 몸을 필자가 고물차로 모시고 성천 집에 찾아가 수세守歲하는 두 분의 우정을 지켜보며 아끼는 제자 중 이경숙을 으뜸으로 여긴다며 두 손을 잡아 주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유택과 남동쪽으로 이웃하여 45일 식목일 전후 다쿠미 선생 추모식 참배객들이 많을 때는 이경숙 선생의 유택을 이용했다. 다쿠미 선생과 같은 남향이다. 묘지번호 203364이다. 기름진 땅인지 두더지가 봉분 앞을 헤집어 놓는다. 지금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유택 오른쪽 묘지가 이장하여 그곳을 정리하여 추모제 및 답사하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이경숙의 호수돈여고 스승 유달영, 유달영의 양정고보 스승 김교신, 김교신의 무교회 운동 스승 우찌무라 간조와 연결되고 조선총독부 산림과장 및 영림창장이며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유택이 남아 있는 사이토 오토사쿠와 우찌무라 간조와 뜻을 같이 하였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그의 인생이 달라진다. 이경숙의 영원한 스승인 유달영 박사의 글을 소개한다.

 

서울의 북한산 기슭에 김교신 선생이 개천의 돌을 주워 모아 집과 서재를 짓고 거기서 양정고보까지 자전거로 통근하면서 聖書朝鮮’(성서조선)10년간 발간하였다. 그 집에서 겨울 방학에는 전국의 독자들이 모여서 약 1주일 동안 합숙하면서 성서 공부와 함께 일본에 병탄된 이 나라의 장래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밤에 토론이 끝날 무렵 내가 농촌운동의 선구자인 샘골(泉谷·천곡)의 최용신양의 생애를 전기로 남겨두기를 바란다는 제의를 했다. 김교신 함석헌 선생은 좋은 의도라고 찬성하였고 자리를 함께했던 다석 유영모 선생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의를 표했다. 그의 출생지인 원산으로 찾아가서 그가 졸업한 루씨여고를 방문하고 재학시절의 성장 과정과 학창 생활 등 자료를 조사했다. 그가 함께 자란 오빠 시풍씨도 만나서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생활 과정도 상세하게 알아냈다. 그리고 다시 최양의 활동무대였던 시흥군 샘골에 가서 최양을 도우며 함께 일하던 동지들과 밤을 새우며 그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샘골에 자료를 수집하러 갔을 때에는 최양의 바로 아래 동생인 최용경 양이 용신 양의 뒤를 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최양이 쓰던 방에서 먹고 자면서 업적을 조사할 때에 최양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 하였다. 개성으로 돌아와 혹독한 더위에 밤낮을 이어 글을 썼다. 전기의 스타일은 누구도 시도해 본 일이 없는 편지체로 썼다. 조선의 딸에게 써 보내는 장문의 절절한 소원을 담은 편지로 썼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나의 담임반 졸업생 조윤희 양과 이경숙 양 두 사람이 박물실에서 철야하며 나를 도와주었다. 무의촌에서 일생을 바치려던 조양은 경성제대 의학부 연구생이었으며, 이양은 교육자로 제2의 최용신이 되려던 나의 동지들이었는데 모두 젊어서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