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주산 신명균
교육자 국어학자 조선어학회 창씨개명에 분개하여 나철의 사진을 품에 안고 순국한 대종교 독립지사
주산(珠汕) 신명균(申明均, 1889~1941)
신명균은 1889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신명균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국어학자와 교육자였지만,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자결했다. 1940년에 접어들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같은 해 2월부터 8월 10일까지 신고하도록 다그쳤다. 조선민중의 징병·징용을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횡포에 항의하여 죽음을 선택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1년 11월 20일 나철의 사진을 품고 자결한 대종교인으로 그의 행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조선어신문조차 없어진 일제말기라는 상황과 국어학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일제에 항거한 그의 고결한 삶과 투쟁은 해방 뒤 지금까지 묻혔다.
1941년 총독부는 우리나라 사람의 호적까지를 고치기 위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9할이 창씨개명을 끝냈다는 보도가 매일신보에 발표된 것을 보고 격분 끝에 자결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 분이 바로 애국지사요 국문학자인 신명균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이 한심한 창씨의 보도를 보고 격분하여 약을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만해는 이 애국 자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분의 직절(直節)은 찬양하지만 자살이란 종교상의 죄가 될 뿐 아니라 자기의 격분이나 비관이나 혹은 공포를 참지 못하는 심적 변화의 발로이니 높이 평가할 것은 못 된다. 나라를 잃고 자살한 것이 충(忠)이라 하나 이것은 비겁 자책(自責) 혹은 실망의 극치이다. 예컨대 파산했다고 부모가 자살한다면 그 유아(遺兒)들이 비참해지는 것과 같이 후인에게 불행을 주는 것이다.
신명균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1년 조선어강습원 1기생으로 김두봉·이규영·최현배·이병기·장지영 등과 함께 주시경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1913년 3월에서 1914년 4월까지 신명균은 조선어강습원 초등과 강사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1914년에서 1922년까지 8년간 뚝섬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192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도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동덕여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원으로 있었으며, 1921년 장지영·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동인지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권덕규·이병기·최현배·정열모 등과 함께 《한글》(1927.2.∼1928.12.)을 펴내어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진력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가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통일과 보급에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로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그리고 신명균을 들 수 있다. 1대 간사장 이극로의 뒤를 이어 2대 간사장을 그가 맡았다.
일제에 맞선 그의 언어독립투쟁은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명균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으로서, 이의 완성을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여하였다. 1931년부터 조선어연구회를 모체로 하여 조선어학회가 발족되자 그 기간회원으로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인 《한글》(1932년 재창간) 등을 통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사업에 앞장을 섰다. 국어연구 및 맞춤법통일안 제정사업과 관련된 일부 업적은 「한자음 문제에 대하여」(한글, 2∼6호)·「된시옷이란 무엇이냐?」(한글 7호, 1927.11.)·「조선글 철자법」(1928)·「맞춤법의 합리화」(한글 3호, 1932) 등이며, 또한 『한글』(1권 8호, 1933)에서는 된소리는 각자병서 ㄲ, ㄸ, ㅃ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을 학구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이는 맞춤법통일안의 된소리 표기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어문법』이라는 문법서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청년상식보급회’가 계획한 청년상식총서 가운데 들어 있는데 그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보면, 주시경·김두봉으로 이어진 문법체계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곧 품사분류 등에서 조사나 어미를 품사로 인정하는 문법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문법에서는 품사명을 한자어로 적고 있다는 점이 색다르다. 한편, 출판사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면서 소년지 『신소년』과 조선문학전집으로서 『시조전집』·『주시경집』·『가사집』·『소설집』·『백옥루』 등을 펴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간행한 이 자료집은 당시로서는 가장 집대성된 고전문학자료로 평가된다.
2021년 5월 2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5일 차 사색의 길과 구리둘레제1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김상용 묘역 쪽 도로 10여 미터 아래 남아 있는 주산 신명균 묘비를 찾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인 박용규 역사학자가 한글학회 연구위원 때 두 번에 걸쳐 보훈처에 신청하여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묘지는 무연고처리로 2003년 용미리시립공원묘지로 합장 이장하였다. 그런데 누구도 그 장소를 몰라 안타까운 현실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초혼장으로 다시 모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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