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조용수《민족일보》사장

정종배 2022. 12. 21. 04:12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민족일보》사장 5.16 군사쿠데타 군부세력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당함 조용수 (趙鏞壽, 1930~1961)

 

조용수 사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 회부 되어 19611221일 사형을 당한 이들은 경무대경찰서장 경무관 곽영주,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 영화로 유명했지만 정치깡패였던 본명이 권중각이었던 임화수 그리고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과 민족일보사장 조용수 등이다. 이 중에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던 이는 곽영주, 임화수, 최백근, 조용수 등이다. 2018년 최백근 선생을 마지막으로 망우리공원에서 이장하였다.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조용준씨는 19611222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형 조용수 민족일보사장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아침에 형에게 면회 갔더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라. 이틀에 한 번꼴로 면회를 다녔는데 그 말이 형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 몰랐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용준씨는 1221일 오후 4시 라디오로 형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었다. 당시 형의 나이 31세였다. 민족일보창간을 문제 삼아 사형까지 시킨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튿날 시신을 수습한 용준씨는 아버지와 상의해 조용수 형님을 깜깜한 밤 9시 반 넘어, 언 땅을 피눈물로 파 망우리공동묘지에 묻었다. 1963년 남한산성 동문 밖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야산 자락 중턱으로 이장했다.

 

"1218. 남한산성부근 조용수 사장 묘소에서 진행 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61주기 추도식>에 함께 한 사월혁명회

올해 추도식은 몇 분 남지 않은 4월혁명 공간 활동하였던 원로들의 건강 악화로 조용수 사장의 뜻을 계승하는 민족일보기념사업회와 사월혁명회 그리고 추모연대와 유족 중심으로 약식 진행하였다.

올 겨울 최강 한파라고 하는데 다행히 눈은 많이 녹았고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 추도식을 거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원희복 이사장이 2022년 한해 사업 내용과 제4회 조용수언론상을 보고하였다.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는 박규장 ()미디어앤소사이어티 대표PD정용일 전 [민족21] 편집국장에게 특별상이 추서되었다.

민족일보는 사시를 통해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을 표방하였다.

즉 민족해방과 노동해방 그리고 통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미국의 검증을 받기위해 조국 통일보다 반공 국시를 천명하였다.

이승만도 미군정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이 국시라고 주장하였지만 쿠데타세력은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 혁명공약 첫째에 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로 삼았다.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하고 강화하였다.

당시 냉전 시대에 오로지 미국 사대만이 쿠데타를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며 박정희는 북을 적대시하며 자발적으로 굴종한 것이다.

그리고 혁신계를 바로 용공세력이라 규정하고 북과 일본 총련에 연계되었다고 사회당창당준비위원회 최백근 조직부장과 민족일보사 조용수 사장을 대표적으로 사형시킨다."(페이스북 한찬욱 글 인용)

 

조용수 사장과 용준씨는 네 살 터울이었다. 동생 용준씨에게 형은 까다롭고 엄격한 스승에 가까웠다. 1961213민족일보가 창간되고 형이 사장을 맡자, 용준씨는 기획실장으로 들어갔다. 폐간될 때까지 매일 35천부를 발행했다. 그 당시 제일 잘 팔리던 신문이 동아일보였는데 가판에선 민족일보가 그보다 앞서 1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창간 전후 용준씨는 주로 형의 자금 마련 심부름을 했다. “아버지는 살고 있던 부산 집을 팔아 창간자금을 댔다. 진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형의 고향 친구도 제법 큰돈을 보탰다.”

 

하지만 창간 3개월 만에 터진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혐의를 뒤집어씌워 518일 구속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창간자금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조용수 사장이 조총련계 자금 1만환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고 밝혔다. “형의 장인어른이 일본에서 파친코를 하던 민단 간부였다. 거기서 들어온 돈을 박정희와 김종필 등 군사쿠데타 세력은 조총련 자금이라고 날조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공소장에 쓴, 형에게 돈을 댄 북한 간첩이라고 지목한 이영근은 나중에 노태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조용수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송지영은 1969년 출소했다. 출소 후 송지영은 문예진흥원장과 KBS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시인 박인환과 어울리며 1956년 노래 <세월이 가면> 태어난 경상도집에 함께 했고, 망우리공원 시인 박인환 묘역 단비의 시와 글을 송지영이 새겼다.

 

조용수 재판정

 

조영수는 30년 경남 진주 대곡면의 부유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주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2·3·4대 자유당 의원을 지낸 조경규씨가 삼촌이고, 미군정 시기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낸 하만복씨가 외삼촌이다. 조용수는 진주에 있던 외삼촌 집에서 자라면서 광복 후 진주중학에 진학해 주로 우익 학생모임 민연에 가담해 활동했다.” 좌익학생들과 마찰을 빚어 대구 대륜고로 전학 졸업했다. 이만섭 국회의장이 동기동창으로 연세대학 정경학부에 진학한 조용수는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외삼촌 하만복 의원 비서로 근무했다.

 

19519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정경학부 2학년으로 편입했다. 조용수는 재일 한국인 모임인 거류민단 기관지 민주신문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언론과 첫 인연을 맺는다. 일본에서 그의 활동은 대부분 보수적이었다. 재일동포 북송 사업이 한창이던 1956년 조용수는 앞장서서 북송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대표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조용수의 활동에 변곡점이 생긴다. 진보당 사건이 터지자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씨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1959년에는 조봉암씨 구명청원서명운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59731일 조봉암이 사형당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진다. 조용수는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조용수는 자신이 진보 신문 창간에 전념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금에 성공한 조용수는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사시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등을 내걸었다. 특히 민족일보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역설했다.

박정희 군부는 군사쿠데타 이후 바로 혁신계 체포에 돌입했다. 518민족일보간부 10여 명을 전격 체포했다. 민족일보519일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됐다. 당시 선고공판 배석 판사가 대쪽판사라 알려졌고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이었다. 군사정권은 국내외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1961 1221에 사회당 간부 최백근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입회한 윤형중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날 사형당한 분 중 가장 나중 집행했고 목숨을 쉬이 놓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로부터 한 달 뒤 19621월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조용수에게 국제기자상을 추서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07송건호언론상심사위원회는 조용수 민족일보사 사장6회 송건호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청암 송건호 초대 한겨레신문 사장은 필자의 고교 선배로 모교 교지 한성에 학창 시절 헌책방 순례하며 책읽기를 통해 성장했다는 글을 실었다. 그 글을 읽고 길을 좇는 또랑시인 청암 선생의 뜻이 조금이라도 흘러가길 바라며 기를 쓰고 있다. 작년 3월 오충공 감독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며 청암묘역 앞에 깊이 머리 숙여 한참을 머물렀다.

 

2006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에 대한 사형집행이 위법이라고 판단하고 재심을 권고했고, 2008116일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20201015()민족일보기념사업회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작년 제1회 수상에 이어, 고승우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상임대표를 제2회 민족일보 조용수 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해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