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곽영주 경무대경찰서장

정종배 2022. 12. 21. 04:06

경무대경찰서장 4.19혁명 경무대 앞 발포책임자 별명 부부통령 곽박사 정치경찰 곽영주(郭永周, 1924~1961) 61주기

 

1960년 5월 8일 하야하는 이승박 부부를 경호하는 곽영주

곽영주는 1924년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 현풍 곽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경성공립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병기 병과 군조에까지 올랐다. 8.15 광복 이후 고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대통령 당시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일을 보게 되었다.

 

이때 뽑힌 일화는 당시 곽영주는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의 보초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경찰서를 방문한 시간에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 깊게 보았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론 엄청난 덩치와 우렁찬 목소리, 강렬한 마스크가 눈에 확 띄어,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1950년 경무대경찰서의 경위로 승진했으며, 1951년 경무대경찰서의 경감으로 승진했다.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의 경무과에 전보됨과 동시에 총경에 올랐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에는 치안국으로 다시 전보되었다가 경무관에 승진하는 등 줄곧 출세 가도를 달렸다. 총경에서 경무관에 오르는 데도 보통 7년이 걸리는데,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경위에서 경무관까지 7년이 걸렸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우선 이정재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깡패가 된 그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이때 곽영주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부부통령 내지는 곽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안하무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충실히 계승되었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다. 자기 나름대론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과 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장소에서 면박당해서 끌려나갔다.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에 형이 죽은 후 남로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나 백선엽이 찾아와서 심사위원들을 일일이 설득시켜 기어이 진급시켰다. 그런데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드러내도 먹히지 않자 빨갱이 색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지, 박정희와 김호남의 이혼 경력을 어디서 알아냈는지 들고 와 그의 여자관계가 굉장히 문란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서대문 앞 총격사건 이기붕 자택(현재 4.19혁명기념 도서관)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으로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물러났다.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5.16군사쿠데타 혁명재판으로 곽영주는 최인규,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과 나란히 19611221일 교수형을 당했다. 당연히 호사가들 사이에선 과거 곽영주와 박정희의 갈등을 지적하며 곽이 박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나왔다. 이튿날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고향의 산자락으로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