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시인 초허 김동명

정종배 2023. 1. 21. 14:30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시인 초허 김동명

여장부 어머니 사랑으로 일제와 북한과 남한의 독재 정권에 까칠했던 종교인 교육자 정치인 민족시인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1.21.) 55주기

매일 저녁 식사를 5시에 먹은 뒤 북한산 둘레길 제9구간 마실길을 산책하며 주변까지 걷는다. 진관사 입구 공중화장실에서 일주문으로 가는 왼쪽 인도 길섶에 안내판이 서 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 관련 내용이다. 안내문에는 없지만 김신조 목사가 증언하길 124군부대 훈련 시에 없었던 진관사가 나타나 24시간을 진관사 입구 계곡에서 머물렀다. 청와대 공격 루트의 마지막 숙영지인 사모바위 동굴로 향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의미가 없다지만 역사란 사소한 시비에서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진관사와 관련 하루가 늦어진 역사가 현재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는 날도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초허 김동명 시인에 대해 자료를 찾아 경주 김씨 수은공파 사천 문중 김회기 회장과 김순정 총무와 김동명문학관 최은미 학예사 등과 소통했다. 그 가운데 1·21사태로 김동명 시인의 장례식이 어수선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 망우역사문화공원 초허 김동명 시인의 무덤터를 지난 화요일에 확인하여 마음의 짐을 덜었다.
그날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설원 백대진과 초허 김동명

2023년 1월 17일 오후 잔설이 남아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 망우산을 3시간 넘게 오르내려
오랫동안 목에 걸린 숙제를 마쳤다.
월간 <창조문예> 2023년 2월호에 실을 망우리공원 문인열전 글쓰기 자료 발굴 차원으로 답사한 결과였다.

최초로 자연주의 문학을 소개(「현대조선의 자연주의 문학을 제창함, 《신문계》 29호, 1915.12.) 하고 “상징주의는 자유시로다.” 라며 자유시란 용어를 쓰며 1922년 11월 월간지인 ≪신천지(新天地)≫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조선의 일본통치가 폭력에 의한 강압정치라고 규탄하면서 독립사상을 선전하여 고취시키는 항일운동을 한 문학가와 언론인으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아 독립운동가인 설원 백대진과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하는 날 오랜 질병 끝에 모내래 집에서 운명하여 어수선한 가운데 문인장(5일장)으로 1월 25일 상오 11시 서울예총회관 앞 광장에서 박종화 개식사, 이헌구 김사익 조사, 구상 조시, 김천애 조가로 장례식을 치르고 망우리공동묘지 부인과 합장한 민의원이고 정치평론가이며 <파초>·<내마음>·<수선화> 등의 시인 초허 김동명
두 분의 묘지 터를 찾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찾아 헤맨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동안 자주 다닌 길섶에 자리하고 있다가 이장하였다.

설원은 묘비도 없이 묻혀 있다. 국립현충원으로 1998년 10월 18일 이장 안장됐다.
초허는 부인과 합장했다. 초허는 본인 이름의 묘비는 없었다. 초허가 부인 묘비만 세웠다가 고향인 강릉 사천 노동리 문중 납골당에 2010년 10월 10일 모셨다.
김영랑, 나운규 묘비와 김사국 갓머리 등을 오는 봄에 찾아 세워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명실공히 역사문화예술 공원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딱 한 번 엉덩방아 찧었지만 두꺼운 옷을 입고 기분이 업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한 채 답사길 오르내리며

최학송 조봉암 한용운 박희도 서병호 강학린 임숙재 설태희 설의식 오세형 오기만 오기영 김명복 윤상필 김사국 박원희 김이석 문일평 오세창 최신복 방정환 이경숙 아사카와 다쿠미
사이토 오토사쿠 등 설을 맞아 성묘를 드렸다.

첫 번째 사진은 김동명 시인의 경주 김씨 수은공파 사천 문중 김순정 총무께서 보내주신 김동명 부부 이장한 날 묘역이다

지난 12월 김동명 시인의 큰아들인 김병우(95, 전 한남대 철학과 교수)씨가 강릉에서 운명하여 아버지 곁에 납골하였다.
개성에서 학교다니며 끝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들은 자상하고 다정하며 불의에 까칠한 아버지를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종이 위에 펼쳐 놓으면 시인이 되었고 행동으로 옮겨놓으면 정치인이 되었다.”
초허의 손자인 김민 신부님은 서강대학교 내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이다.

즐거운 벗들과 ‘남한강매운탕’에서 점심을 맛나게 먹고서 ‘중랑망우공간’의 ‘망우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셨다. 답사를 시작할 2시 30분쯤 카톡을 열었다.
오후 1시경에 소설가 박순녀 선생님께서 카톡을 보내왔다.
"잘 지내시지요? 정선생 주소 좀 찍어 주십사구요. 정보 하나 알려 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합니다. 박순녀"
1시간 30분 넘게 걸린 귀가 후 7시 30분에 소설가 김이석 유택의 사진을 첨부하여 답장을 드렸다.

2020년 3월 7일 토요일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생활력이 남다른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고, 일제와 북한과 남한 독재에 까칠했던 교육자이고 정치인이며 민족시인인 초허 김동명 시인의 묘지 터를 찾았다. 강릉시 사천면 경주 김씨 수은공파 사천 종중 9대 종손인 김회기 선생과 함께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망우산 주능선 ‘구리둘레길 제1코스’인 동락정 정자와 망우산 제2보루 사이를 오갔다. 초허 김동명 시인의 장례식과 성묘와 이장 등을 주관한 종손은 자신 있게 큰 소나무와 출입하던 오솔길 등을 기억하였다. 만약 이장한 분의 묘역을 망우리공원에 다시 복원한다면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문중 납골당에 모신 초허 김동명 시인의 재이장을 재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묘지번호는 204707이었다.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 오상순, 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 이희승, 젊은 층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등 《문장》 출신 및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로작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등이다.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 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ㅡ임종국 『친일문학론』(1966)에서

이 중에 가람 이병기 시조 시인은 1942년 12월 8일 《매일신보》에 「12월 8일」이란 시를 게재했다. 일제의 학병 권유를 조선의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다, 몇 구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칼차고 총을 메고 나가는 젊은이들/ 씩씩한 그 그림자 돌아도 아니보고/ 흘리는 피와 땀으로 배를 띄워 저으리......”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정운현, 도서출판 없어지지 않는 이야기, 1997)

필자가 파악한 김동명, 오일도, 이상화, 신석정, 오장환 시인도 친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망우리공원에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유택은 이장했다. 또한, 전원파 시인이라 부르는 김동명, 김상용, 신석정 세 시인 중 김동명, 김상용 두 분이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김동명 시인은 이장하여 김상용 시인 유택만 남았다.

2002년 2월 29일 광복회와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선정한 친일파 708인 중 친일문학인 42명에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행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704명 중 친일문학인은 김해강(3편), 김소운(3편), 박태원(3편) 3명이 제외되어 39명으로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시 분야(11명) 김동환(23편), 김상용(3편), 김안서(본명 억, 6편), 김종한(22편), 노천명(14편), 모윤숙(12편), 서정주(11편), 이찬(8편), 임학수(8편), 주요한(43편), 최남선(7편) 등이다.
소설·수필·희곡 분야 (17명) 김동인(소설, 9편), 박영호(10편), 송영(7편), 유진오(8편), 유치진( 12편), 이광수(103편), 이무영(6편), 이서구(4편), 이석훈(19편), 장혁주(8편), 정비석(9편), 정인택(13편), 조용만(8편), 채만식(13편), 최정희(14편), 함대훈(11편), 함세덕(6편) 등이다.

평론 분야 (11명) 곽종원(6편), 김기진(필명 팔봉, 17편), 김문집(3편), 김용제(25편), 박영희(18편), 백철(14편), 이헌구(4편), 정인섭(11편), 조연현(6편), 최재서(26편), 홍효민(5편) 등이다.

망우리공원 관련된 인물 중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김상용(시인), 함세덕(극작가), 이영찬(중추원), 민병덕(중추원), 박보양(중추원), 오긍선(교육), 김활란(교육), 임숙재(교육), 장덕수(교육), 노창성(언론), 박희도(언론), 안석주(아호 석영, 영화) 윤상필(군인, 만주국 관리), 부인식(군수), 홍재설(군수), 채수현(군수), 이광래(연극), 최신복(신시대주간, 문인), 박마리아(교육/학술) 등이다.

1923년 김동명은 《개벽》 10월호에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門)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는 이 시를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에게 바친다. 이 헌정시는 그가 지닌 퇴폐주의적인 기질을 드러내지만 썩 훌륭한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조선문단》,《조광》, 《신동아》 등에 많은 시들을 내놓아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0년 이후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자 그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도 한다.

김동명은 함흥 영생고보에 근무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둔 시인 백석이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초허보다 열두 살 아래였다. 초허를 도와 교지 《영생》을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백철도 백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소설가 한설야도 카프 제2차 검거 때 체포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 함흥에 있었다.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며 초허와 교류하며 객지살이하는 백석의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소천 강용률의 영생고보 선생님으로 초허 김동명, 백석, 백철 등이었다. 특히 백석과는 나이 차이가 세 살 적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소천은 1931년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그때 이미 강소천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시 「봄이 왔다」 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소년문사였다. 강소천은 1937년 졸업 후에도 백석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사숙을 하였다. 백석시인이 1941년 동시집 『호박꽃 초롱』 ‘서시’를 써 주었다. 백석 시집 『사슴』 33편의 시와 강소천의 동시집 『호박꽃 초롱』 33편의 동시는 3.1혁명 33인 민족대표를 뜻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허 김동명 시인은 1900년 2월 4일(음력)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서 김제옥과 신석우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초허의 어머니는 배움은 짧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들이 `강릉군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를 노동리 서당에 보내 한학을 공부하게 했다. 김동명의 한 생은 서러운 일생이었다. ‘구박둥이에 천덕꾸러기 사주팔자를 타고났다’해서 자탄도 많이 했지만, 또 서러움을 상쇄할 만한 도움의 손길도 있어서 뒤뚱뒤뚱 한세상을 살았다.

어릴 때는 외출복이 없어서 어머니가 외갓집 나들이를 할 때 데려가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거지꼴 같은 아들을 친정에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동명이 7세 때 처음 옷 한 벌을 얻어 입고 외가에를 갔는데, 그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어머니가 친정살이를 하러 간 길이었다. 망우리공원 신립장군과 같은 평산 신씨 신희공파 신사임당 친정 동네였다. 1908년 초허가 9세 때 원산으로 이사 가기 전 인사 드리려 간 외가 동네(사기막리 외가, 갈미봉)에서 열린 시 짓기에서 김동명이 장원을 하였다.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1921년 3년 만에 영생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흥남 동진소학교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일생은 그때부터였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3.1만세운동 두 해 후인 21년이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 신석우를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1혁명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일을 해 놓고 그는 '추방의 비운'을 맞이한다.

두 번째 추방은 평안남도 남포 근처의 강서소학교에서 당했다. 평양 숭실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 사람이 교장에게 애걸복걸해서 취직이 된 것인데 이 학교 또한 가을 학기 겨우 끝내고 나자 '나가 달라' 했다. 조선인을 일본 사람 만드는 교육 내용을 불평했기 때문이다. 속이 뭣같이 상했지만 그래도 대동강 강둑을 거닐며 시를 생각하는 재미 하나로 버티어 오던 학교생활을 별수 없이 청산하고 시 원고 보따리만 달랑 들고 돌아섰다.

그 후 신안주에 있는 유신학교에 세 번째로 취업, 여기서는 입조심을 대단히 해서 데뷔작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을 썼고 쫓겨나는 것도 한 학기만이 아니고 1년 만에 파직당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초허는 문학과는 큰 인연인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문학에 뜻을 둔 것이 1923년 무렵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초허가 비로소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친구 현인규를 만나고 나서다. 현인규로부터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빌려 읽은 초허는 크게 감동을 하고 1923년 10월 《개벽》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다. 그의 나이 스물네살 때다.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찬 이슬에 붉은 꽃물에 젖은 당신의 가슴을/ 붉은 술과 푸른 아편에 하염없이 웃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또 당신의 혼의 상흔傷痕에서 흘러 내리는 모든 고운 노래를…(후략)”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 일부

입 잘못 놀려 세 번씩이나 해고를 당한 김동명은 세상 살맛이 안 났다. 고향 생각이 비로소 났다. 가난에 쫓겨 도망하듯 떠나온 고향이지만 워낙 세파에 시달리고 서러우니 몸서리나는 고향도 생각하였다. 그는 고향 강릉으로 가 보기로 작정하고 봄비 내리는 4월 어느 날 길을 나섰다가 잠시 원산을 다녀갈 생각을 했다. 거기엔 조카 하나가 공무원을 하는데 거기 대고 하소연도 실컷 하고 여행 편의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일제시대의 관리란 역시 끗발이 좋아서 조카의 말 한마디에 냉큼 사람을 보내어 정중히 초빙해 가는 소학교가 있었다. 김동명은 고향길을 포기하고 그 학교에 눌러앉아 한 학기를 대과 없이 보내고 C여학교로 '자의에 의해서' 옮겨 앉았다. 고약한 운명이 끝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학교에 무슨 소송 사건이 생겼는데 김동명이 중뿔나게 거기에 말려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물러나겠소.' 모친을 닮아서 큰소리 잘 치고 객기도 있는 그가 '자의에 의해서' 퇴임을 했다. 네 번째는 C여학교로 옮긴 지 두 달 만이었다. 그러니 취직 최장기간은 1년이고 최단기간은 2개월이었다. 딸을 입 하나 덜기 위해 친구 집에 양녀로 보낼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이렇게 4차례 실직의 비운을 겪은 다음부터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린 셈이다. 몇 개월 조카 집에서 식객 노릇을 착실히 하다가 유림회儒林會 강습소의 일을 한 일 년 보았다.
독립운동가 강기덕을 비롯하여 지인들의 도움으로 초허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그는 동경 유학을 떠났다. 우연찮게 기독교계의 장학금을 받았고 처가에서도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기독교 자금이므로 일본 청산 학원靑山學園 신학과를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김동명은 아무래도 종교적 인간은 못되었다. 낮에는 청산학원에 나가고 밤에는 일본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 시절의 학제는 돈과 시간과 체력만 허락되면 둘이 아니라 세 군데 학교를 다녀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듬해 《조선문단》에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원산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습작시를 모아 등단 7년만에 첫 시집 『나의 거문고』(1930년, 북한 흥남지역 발간)를 상재한다.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芭蕉파초」는 1936년 《조광》 1월호, 또 다른 대표작 「내 마음」은 1937년 《조광》 6월호에 발표됐다. 이 두 편의 시는 『수선화」 등의 시와 함께 그의 두 번째 시집 『芭蕉파초』(1938년)에 모두 실린다. 시인 김동명의 대표작 ‘파조’ 시를 소개한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 하다.// 남국南國을 향向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시, 「파초芭蕉」

초허는 작곡가 김동진을 가르쳤다. 작곡가 김동진은 김동명을 스승으로 높이 알리고 민족시인 김동명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높았다. 김동진은 스승의 시를 작곡했다. <내 마음>은 널리 알려졌으나, 김동진이 27살 때 스승의 시를 보고 단번에 오선지에 작곡했다는 <수선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 이유는 김동명 시인이 제자 김동진도 친일한 것을 알고 직접 불러 서운한 점을 밝힌 뒤로 <수선화>는 자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수선화>는 김동명이 시인 백석을 위해 쓴 시라고 알려졌다.

그는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첫 아내는 그의 첫 직장인 동진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첫 부인 지정덕池貞德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남 2녀를 낳고 금슬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타계했다.

김동명은 42세에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李福順이었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였다.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 「천환 180도」에 써 놓았다. 그는 이李 부인의 몸에서 난 첫딸 월정月汀을 가장 사랑해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어떤 글에서 월정의 이름 풀이를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李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결실이라 더 귀중하고 소중했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둘째 부인도 둘째 딸 월령을 낳고 1959년 대학 수련회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첫날 입수하다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하여 간신히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김동명의 일생은 곡절이 너무 많고 가슴 아픈 참변도 여러 번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갔다. 강원도 명주군 노동리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장부 어머니 덕분에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그가 중풍으로 타계할 무렵, 그는 직업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없었다. 살던 집을 줄이고 줄여서 약값 대다가 마지막은 ‘서울의 시골 지역’ 남가좌동 모래내의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포함 31명의 북한군 124군부대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난 그 날 신산스런 삶을 마감했다.

김동명씨 문협장. 지난 21일 작고한 시인 김동명(金東鳴) 씨의 문협장이 25일 오전 11시 3백 여명 문인,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총회관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은 박종화(朴鍾和) 이헌구(李軒求) 씨의 조사와 구상(具常) 씨의 조시, 김천애(金天愛) 씨의 조가로 조촐히 끝내고, 유해는 오후 망우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 《조선일보》 1968.1.26.

망우리공원 지금의 솔샘약수터 통과하는 오솔길과 이어지는 구리둘레길 제1코스와 설태희 가족묘지 사이 능선에 자리 잡은 부인 이복순 묘지 옆에 안장됐다. 2010년 10월 10일 고향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경주김씨 수은공파 태경공 종중 선영으로 납골 봉안했다. 본인 묘비는 세우지 못하고 부인 이복순 묘비는 묻고 갔다.

김동명은 자기의 아호를 초허超虛라고 스스로 지었으나 한 번도 써먹지 않았고 또 자기의 일생을 초허超虛스럽게 살지도 않았다. 일 욕심이 많은 그는 남이 하는 짓은 모두 해보려고 했다. 20대에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고 30대에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목재상, 땔나무 장사, 양곡배급소까지 경영해서 큰돈을 만져보았는데 심지어는 흥남 역전에 부동산 투기를 크게 하기도 했다. 통일이 되어서 요행히 원 소유권이 찾아지면 그 자녀들이 막대한 땅을 유산 받게 될 것이다.

1942년 초허는 「술노래」, 「광인」을 마지막으로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절필한다.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이었지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한 일제에 대한 분노의 표시를 붓을 꺾는 것으로 몸소 실천한 것이다. 40대부터 김동명은 흥남을 떠나 서울에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신문지에 세면도구를 싸서 들고 '어슬렁어슬렁' 동해안 금강산 산기슭을 걸어 그만 월남을 해 버렸다. 해방 후에 생긴 정당에 관여했다가 별재미를 못보고 흥남에서 여러모로 물을 먹은 그는 서울살이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잇달아 불러들였다. 서울에는 김사익金士翼, 김재준金在俊, 송창근宋昌根 등 신학 계통의 선배들이 있어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곧 이화여대 교수직을 얻게 된다.

학자의 일을 하는 한편, 그는 정치가적 기질도 발휘해서 조선 민주당 정치부장도 하고 민주 국민당 문화부장도 한다. 흥남에 있을 때는 조선 민주당 흥남시 지부당 위원장까지 했는데 최용건崔鏞健에게 밟혀서 내쫓기고 그는 흥남중학교 교장직을 맡는데, 1946년 3월 13일에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절치부심하다가 월남을 결심했다고 한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물 중 해방 후 월남한 인물은 평양의전 박인환, 소설가 김이석, 화가 이중섭, 조각가 차근호, 아동문학가 강소천, 독립운동가 이영학 등이다.
시인 김수영은 “월남 후 14년을 그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 차근호, 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 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조선일보, 1964.9.23.)고 남과 북의 단절로 인한 아픔을 토로했다.

반면 월북한 인물은 통일운동가 수암 최백근, 극작가 함세덕 등이다. 수암 최백근은 간첩으로 검거되어 형을 살고 5.16쿠데타에 사형을 당해 현재도 미복권이다. 함세덕은 북한군 선무반 종군작가로 6.25한국전쟁 일어난 나흘 뒤인 6월 29일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 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는 결국 4.19혁명 이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60세 되던 해에 참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그 자리마저 잃은 후로는 정해진 수입 없이 정치평론, 시, 수필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정치평론을 발표했다. 그래도 그가 특별히 위해를 당하지 않는 이유는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와 동향 강릉 출신과 초허의 두 번째 부인 이복순 교수와 이화여전 동기라는 뒷배 힘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동명의 일생이 이처럼 좌충우돌 뛰는 말 같은 것은 그가 꽁생원 아버지를 닮지 않고 성격이 시원시원한 어머니의 기질을 이어받은 탓이었다. 그는 수필 등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안하고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썼다. 어릴 때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설화, 고담을 들려주었다. 어머니 신씨는 심청전이니 장화홍련전이니 하여간 그때 나온 이야기책은 모두 읽어 아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코 외아들을 과보호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새삼스레 한참 바라보다가 암만 봐도 너는 못생겼다. 이러기도 하고, 아들이 집에 편지 한 장이라도 보내면 꼭 흠을 잡아서 '아직 멀었다. 너 친구 아무개의 글보다는 못하다.' 하는 식으로 아들을 채찍질했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살림살이 박차고 흥남 부둣가에서 생선 장수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였다. 금강산 아랫자락 산골에서 금강산 윗동네 항구 도시로 이사 간 그 일이 바로 김동명을 오늘의 김동명으로 만든 계기였다. 산골 가난한 농군으로 늙어 죽을 아들을 시인으로, 대학교수로, 사업가로, 정치가로 만든 것은 바로 여장부 어머니 신씨의 넓은 식견 덕분이었다.

사실상 김동명의 야단스럽고 요란한 인생도 자기의 뜻에 의한 인생이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살아진' 인생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학생 시절에는 어머니에 얹혀서 살아졌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선배 동료의 도움으로 혹은 능력 있는 아내들(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모두 처복이 있었다)의 뒷바라지 덕에 적토마 같은 한평생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김동명은 시집 6권에 총 370편의 시를 발표했다. 시집은 『나의 거문고』(1930년), 『파초』(1938년), 『3.8선』(1947년), 『하늘』(1948년), 『진주만』(1954년), 『목격자』(1957년) 등이다. 시화집은 『내마음』(1964년)이고 수필집은 3권 『적과 동지』(1955년), 『역사의 배후에서』(1958년), 『나는 증언한다』(1964년) 등이며 수기집은 2권 『암흑의 장』, 『어둠의 비탈길』 등이다.

그의 대표작 「내 마음」에는 청순가련형의 '수동적 마음'만 나타나 있을 뿐이다.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이 모두가 연약하고 피동적인 상징물들이다. 흰 그림자, 비단 옷자락, 피리, 뜰은 모두 여성의 상징물이다. 김동명에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상징어이자 아내들의 상징어라 보아도 좋다.

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여성을 사랑했고 모든 여성적인 것에 대해 다소곳이 포용하는 마음 자세를 평생 지니고 살았다. 그런 그의 마음 상태가 「내 마음」과 같은 절창絶唱을 낳게 했다고 보아서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주로 여학생들이 김동명의 시들을 줄줄 잘 외운다.

그는 어떤 글 속에서, '세상에 여자를 있게 해 주신 신의 은총이 한량없이 가슴 벅차고 감격스럽다고 했으며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어느새 버릇으로 되었다'고 쓴 일도 있다.

지금도 낭송하거나 읊조리면 마음이 가라앉는 초허의 대표작 「내 마음」을 소개한다.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시 「내마음」

시인 김동명은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경주 김씨 수은공파 납골당에 계신다. 시인 김동명 유택이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당시 서울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는 옛 묘지 터에 다시 모시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문화예술인들의 유택이 자리 잡아 세계적인 명소가 되길 거듭 기도하고 노력하길 다짐한다.

2019년 9월 옆지기 김희옥 화가 오죽헌 입구 ‘청풍갤러리’ 초대전 열리는데 오가는 운전하며 김동명 문학관을 답사하였다. 김동명 시인의 경주 김씨 수은공파 종친회 김순정 총무께서 벼 논에서 피가 꽃 피기 전 피를 뽑아내는 피살이를 하다가 달려와 3시간 정도 김동명 시인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김동명 문학관 최은미 학예사가 김동명 시인의 자료를 한 아름 챙겨주었다. 김동명 문학관 입구 텃밭에서 문학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초허의 시를 낭송하는 소리를 새겨듣고 잘 익은 호박을 집사람이 동네 아낙과 흥정하여 호박죽을 써 식구들이 별미로 먹었다.

천년 예향 강릉 문향/ 신사임당 신(인선)씨 율곡 이이/ 허난설 허(초희)씨 교산 허균 뒤를 잇는/ 초허 김동명/ 내 마음과 파초와 수선화로/ 일제와 독재에 강직한 서정과 저항의/ 임영臨瀛 햇볕 별빛 달빛 비바람 눈보라와/ 강릉김씨 수은공파 사천종중 집안 식구/ 발걸음 소리로 자라 익은 호박으로/ 가을볕에 드러나 반긴다 – 시 「초허 김동명 문학관에서」, 정종배

2010.10.10. 망우리묘지공원 김동명 이복순 부부 이장한 날 묘지

2017.1.17. 망우역사문화공원 김동명 묘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