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석정과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신문 자료 뒤지다 부안 출신 도쿄 유학생 소식을 찾게 됐다.
부안문화원 김국장님께서 일단 자료를 찾아 보내주셨다.
향토사학 연구가 빛의 속도로 닿았다.
신석정 시인의 형님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다.
신석정 시인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익상 소설가는 신석정 시인의 은사이며 사촌 매부로서 파스큘라 카프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활동을 하였다.
1935년 40살에 운명하며 내 일찍 죽은 이유는 서해 최학송한테 헌혈을 많이한 이유라 하였다
정우홍 소설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활동가로 식민지 시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진재 체험을 소설화하였다.
조선일보 1923.9.26.
동경유학생 소식
전북 부안군 읍내 거주자로서 동경에 유학는 학생들은 진재 후 소식이 적연하야 부형들은 우려가 극심하던 차 5,6일 전부터 전보 혹은 서찰로써 각자 부형에게 통지가 내도하였다는데 5명 중 사명만 통지가 유하고 신영연(辛泳煉)이란 학생만이 아직 통지가 무함으로 그 부형은 초조불기(焦燥不己)하며 소식이 내도한 씨명은 여좌하더라
신기형(辛基炯), 이익상(李益相), 신석갑(辛錫甲), 정우홍(鄭宇洪)
신석갑辛錫鉀 1904(광무 8)~ ?
한의사. 호는 호민胡民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간재艮齋 선생의 제자 유산酉山 신기온辛基溫의 아들로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자인 조부 소암素菴 신제하辛濟夏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동생인 시인 신석정辛夕汀, 석우錫禹와 더불어 신학문도 익혀 높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갖추었으며 문필 또한 훌륭하였다.
그는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읍내에서 5리길인 선은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 혼정신성昏定晨省과 양지감봉養志甘奉의 효도를 다한 효자였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깊으니 사람들이 효우孝友의 집안이라 칭송하였다.
후에 부친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우고 스스로 궁구窮究하며 익혀 옥성당약방玉成堂藥房을 차리니 명의名醫로 이름이 높아 전라북도 한의원자격시험의 출제위원으로 위촉되곤 하였다.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은 진료비를 불문하고 인술仁術로 치료하여 주었으며 약재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제하여 조제하고 값은 다른 약방에 비하여 헐하니 약방 앞길이 항시 붐볐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철저한 배일사상으로 불복종하며 살면서 창씨를 거부하고 자녀질子女姪도 모두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29년에 조선민족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목적으로 조직된 월남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홍명희洪命熹, 조병옥趙炳玉 등이 조직한 신간회新幹會 부안지회扶安支會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총무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광복 후 혼란한 해방공간에도 조용히 살았으나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 있다 하여 좌경적인 인물로 지목되어 한때 핍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끝내 독재정권에 굽힘 없이 일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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