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 / 정종배

정종배 2023. 7. 12. 11:21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1891.1.15.~1931.4.2.)

 

-칸트 인간의 가치는 진정 그 인간에게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증명하였다. 나는 진심으로 인간 아사카와 다쿠미 앞에 머리를 숙인다.’ 아베 요시시게(安倍 能成)인간의 가치’(1934~1947) - 고등학교 시절 이 문장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아사카와 다쿠미의 인간미를 동경하게 되었고 이후 나의 삶의 방식은 재일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인생관을 배우고 청량한 생활을 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정웅(메세나 정신) -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장. 영암하정웅미술관장. 전 한인문화교류협회장. 전 수림문화재단이사장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에게 항상 자신과 같은 눈높이로 대한 태도가 훌륭하다. - 다카사키 소지(高岐宗司)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의 삶

 

1792 증조부 오비 효노신 출생

1827 조부 오비 덴에몬 출생

1830 외조부 치노 마미치 출생

1859 부친 오비 사뇨쿠(후에 아사카와 가문을 잇다) 출생
1865 모친 치노 게이 출생
1884. 8  형 노리타카 출생
1887. 12 누나 고미야마 사카에 출생
1889. 3  야나기 무네요시 출생
1890. 7  부친 사망


1991. 1  야마나시현 기타고마군 가부토촌(현 호쿠토시 다카네정)에서 다쿠미 출생 옛 이름 가이쿠니(甲裴國) 전국시대 맹장 타케타 신겐의 영지. 오래 전 영화 카케무샤한국엔 신겐으로 소개. 최인호 소설 원작 해신에도 타케타 신겐선조 얽힌 역사 소개. 중국 유학 일본 스님 풍랑 만남 신라 명신이 명한다 풍랑을 가라앉혀 줄 테니 일본에 돌아가면 나의 초상을 그리고 절에 보관하라최인호 해신에서 신라명신을 장보고 현현으로 봄. 일본 절을 세운 가문은 신라명신 초상을 모시고 이름을 신라사부로라 바꿈. 일본 사무라이 시조라 일컬음. 그가 바로 타케타 신겐의 선조임

고향 코마옛 고구려 유민들이 하사받은 영지 고구려의 옛 이름. 후지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3대 조망지.

1894. 8 청일전쟁 개전

1895, 4 시모노세키 청일 강화 조약 조인, 일본에 타이완 할양
1897. 4  무라야마니시 심상소학교(村山西尋常小學校) 입학

1901. 1 조부 사망
1901. 4  아키타 심상고등소학교 입학- 산수 작문 60리길 걸어 기차 통학
1903. 4  노리타카 야마나시 현립 사범학교 입학

1904. 2 러일전쟁 개전

1905. 7 가쓰라 테프트 밀약(미국 필리핀, 일본 대한제국 지배권 상호 승인)

9 포츠머 러일강화조약 체결

11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조인, 대한제국 외교권 상실)

12 조선통감부 설치
1907. 4  야마나시 현립 농림학교 입학 아사카와 마사토시를 알게 됨. 산림 임학
      6  고후감리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 기도와 명상 마음 다스리기. 무교회주의 우찌무라간조 김교신

8 야마나시현 벌채로 하천 범람 232명 사망. 치수의 근원인 조림의 중요성 통감

3차 한일협약 조인, 대한민구 군대 해산.

1909. 4 아카타현 오다테 영림서(秋田縣大館營林署)에 취직
1910. 8  일본이 한국 국권 침탈(병탄) 이 무렵 아사카와 노리타카 조선 도자기를 만남

1911 호소이 하지메가 조선문화사론을 출간

1912 가을 버나드 리치, 우에노 척식박람회에서 조선의 미에 경탄


1913. 5  노리타카 한국에 옴(남대문소학교 미술교사 조각, 부인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강사, 숙명여학교 영어교사)- 새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온 일본인(일본 서부)과 달리 오직 조선 미술 공예에 이끌려 조선 땅을 밟았다. 이왕직 박물관 고려청차 보려 다님. ‘당시 나는 우울했다. 좋은 물건은 많았지만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었기에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성의 고물상 앞을 지나가는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물 사이 전등불 아래 하얀 항아리가 있었다. 그 둥근 자태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5엔으로 비싸지 않아서 매우 기뻐하며 항아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려청자는 차가운 과거의 아름다움이지만 이 백자항아리는 지금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친구다. 이것은 틀림없다.” 드디어 나의 눈이 열렸다.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조선 백자 항아리 만남. 조선 초기 분청사기. 중기 견고한 백자. 후기는 청화백자.

조선 도자기(백자)의 신, 광복 후 미군정 부탁으로 도자기 정리 후 1년 늦게 귀국. 조선 백자(도자기) 아름다움 가치 탐구와 도자기 및 민예의 미학을 체계적 학술적 추구. 고려청자 연구하며 하이쿠 80여 수 번역 출판 준비.
1914. 5  다쿠미 한국에 옴. 나는 처음 조선에 왔을 무렵 조선에 사는 것에 주눅이 들고 조선인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일본에 돌아가는 것을 계획했다. 조선에 가면 조선어를 알아야 하고, 조선인들과 사귀어야 한다. 조선에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조선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언젠가는 조선을 위해 무엇인가에 도움을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노력함.

7 1차 세계대전 발발

8 일본 참전
      9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임업 시험소, 1922년 임험시험장, 1987년 임업연구원, 2004년 국립산림과학원) 고원(雇員)으로 취직. (노리타카 결혼. 야나기 무네요시 방문. 야나기 청화백자 추초무늬모따기항아리(노리타카 선물. 조선미술사 집필과 한국 방문 계기. 일본 민예관 전시)와 청화백자 연꽃무늬항아리(조선민족미술관설립 계기)에 감동함. 도미모토 겐키치와 교류 시작) 노리타카는 전국 도요지 탐구 답사는 통해 무속신앙 영향 항상 낙천적임 신명난 농악 풍자 해학 가면극. 야나기 선생은 조선인의 흰 색 백의 민족 비애의 역사 비애의 미. 신윤복 그림 조선인의 자연스러운 자태를 주시하여 탄생한 그림으로 중국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감각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조선의 전후무후한 독자적 풍속화가로 평가함.
1915. 12 노리타카와 함께 아비코(我孫子)의 야나기를 방문 1915년에서 1931년 사이 양묘 시험 조림한 광릉시험림 현존 주요 수종 13(잣나무 낙엽송 전나무 리기다소나무 상수리나무 잎갈나무 밤나무 방쿠스소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가래나무 신나무 꽃개오동나무) 579,021본 면적 193,08ha
1916. 2  아사카와 미쓰에와 결혼

임업시험소 북아현리 일본식 집으로 이사
      9  야나기가 한국에 와 다쿠미 집에 머뭄 일본 중학교 교과서 조선의 미수필 수록 - 한국의 미 비애의 미, 다쿠미 형제 멋 흥취 가락으로 봄. 누님 인천 총영사 누이 내무국장
1917. 3  장녀 소노에 출생(경성부립제일여학교 졸업 일본민예관 근무)
      6  조선 잎갈나무의 양묘 성공을 보고함발표. 조선에 있어서 꽃개오동나무(청량고)
      10 <조선에서 미국산 교목의 양묘 및 조림 성적을 보고함> 발표

11 러시아 혁명 발발

1918. 5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새로운 마을운동 제창, 7월부터 운동을 시작.
1919. 3  3.1독립운동
      4  조선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출판 53여점. 천연기념물 지정 기준 노리타카 조각 여행을 위해 도쿄에 감.

6 베르사이유 조약 조인

8 수묘 양성 지침(樹苗養成指針) 1출판
1920. 5  야나기 무네요시 가네코와 조선에 와 음악회 개최.

야나기가 한국으로 와서 청화백자진사연꽃무늬항아리와 만남
      6  인도인 싱(1896~1995, 델리 블루 인도 도자기 부흥 유명 도예가)이 방문 일기일회(一期一會)

10 노리타카 조각 제국미술전람회 입선 - 조선인상 나막신의 사람입선 신문 인터뷰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선은 정치와 정략으로는 안 된다. 예술에 의해 통해야만 한다.’


     12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운동 시작
1921. 1 야나기,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관하여발표

아카바네 오로가 한국으로 이주
      6  야나기 부부 한국 방문
      7  아루가 가지에몬(有賀喜左衛門)이 방문

수묘 양성 지침(樹苗養成指針) 1출판
      8  야나기 일행과 후쿠나가 마사지로 방문
      9  아내 미쓰에 사망(30). 장녀 소노에를 고향의 처남 아사카와 마사토시에게 맡김
     11  야나기와 서양회화 전람회 개최. 임엄시험장 청량리로 이전. 다쿠미가 기념 식수(반송 130)


1922. 1  일기를 쓰기 시작. 사방식재를 둘러싼 장장(場長)과 대립(일기) 점쇠 일가, 윤씨
         야나기와 관악산 옛 가마터 조사. 브레이크 전람회개최. 야나기와 남궁벽 성묘 - 페허 동인과 교류 청량사 정릉천 피서 차 한 잔. 염상섭 김일엽(청춘을 불 사르고. 오다 세이조-일당 김태신 나혜석 송춘희 수덕사의 여승) 김유방(김득영 김찬영-김병기 화백) 오상순 철학자 김만수 나혜석 등

당시 천장산 청량사 차 마시기 최고 피서 교류 풍정. 청량산방의 송헌 정조의 부마 홍현주의 별서 초의선사 1831년 정월 동다송 . 정릉천 달밤 걷기. 천렵 등. 청량사 밥 두부 두포사. 만해 한용운 회갑연 벽초 홍명희 주선 박광 권동진 오세창(壽者相) 안종원 이경희 김관호. 만해스님수연첩 2억 예상 2012. 1939721일 불교 학자 박한영 기거 청량사 현판 글씨 씀. 청량사는 현 국립산림과학원 안 홍릉(명성황후 릉 조성)으로 현 위치로 옮김. 다쿠미 장례식 때 비구니승 3명 독경.
      2  청량리로 이사 - 90년대 초까지 관사가 도로 확장으로 없어짐
      4  노리타카 한국으로 돌아옴
      6  하마구치 요시미쓰 한국으로 이주. 조선신궁(중앙청) 건설. 광화문 철거 비판(일기) - 동아일보 김성수 정원수 장덕수 주필

92264일자 일기에는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후일 조선신궁)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어내 가면서 까지 굳이 숭경을 강제하는 신사 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 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산 정상에서 경복궁안의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백악,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사이에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뻔뻔하다. 게다가 기존 건축의 조화를 완전히 깨뜨려 정말이지 볼썽사나와 보인다. 백악산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일본인의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8  고원(雇員)에서 기수(技手)로 승진. 오우지(王子) 제지를 비판(일기)
      9  가마터 순례의 어느 하루발표. 야나기와 분원 가마터 조사 - 전국 도요지 700여 곳 답사 정리, 도자기업계서는 중시조로 여김(지순탁). 노리타카 <조선 도기의 가치 및 변천에 관하여> 발표
     10  조선시대 도자기 전람회개최


1923. 9  관동대지진. 도쿄 등 계엄령. 조선인 학살을 비판(일기) 재일한국인 오충공감독 제노사이드 불하된 조선인 숨겨진 손톱자국 석남 송석하 태허 유상규 죽산 조봉암 영랑 김윤식 소파 방정환. 김소월 초혼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 저항시 김영랑 저항시 등

 

'나는 믿는다. 이 불시의 천변을 이용하여 계획을 조선인 혼자 세우지는 않았을 거라고, 오히려 일본인 사회주의자 패거리가 주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해서 저지른 일이 아닐까?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대우하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조선인에 대해 이해가 지나치게 빈약한 탓이다. (중략)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도쿄에 사는 조선인들이 지진으로 고생하는 일본인과 그들의 집이 불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조선인들이 그렇게 했을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일본인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도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 (관동대지진후 조선인의 살인방화에 자경단이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도미모토 겐키치 다쿠미 집에 머뭄. ‘조선 소녀집필.
     10  부업품공진회비판
     11  야나기 한국 방문. 간토 대지진 조선인 구제 음악회 개최
     12  창작소설 집필 노리타카 조선 도자사 연구 본격화. <저녁놀> 조선미술전 입상
1924. 1  야나기와 고후 여행. 모쿠지키불상(木喰仏)과 만남
      2  창작소설 뇌산소과(雷山小過집필


      3  묘포 담당의 벗에게 보내다발표
         노천매장법(露天埋贓法 - 종자를 24시간 동안 맑은 물에 담갔다가 종자용적의 1~3배의 습한 모래와 혼합하여 지하 50cm 내외에 매장) 발견 잣나무 37%(1962-1977년 조림 낙엽송 30%, 잣나무 12%) 산림녹화 - 한국인 노동자들의 대화(조선말 사용 능력)를 듣고 실시함. 세계적 임업 잡지 게재. 미국에서는 지금도 이 방식을 사용함.
      4  조선민족미술관 설립(경복궁 집경당) 민족 고집, 야나기 부인(가네코 그 분은 정말 조선 사람이었어요) 최초 소프라노 음악회 개최. 다쿠미 월급 및 결혼식 예복 살 돈까지 기부. 평복 입고 식사 한 걸로 결혼식을 끝냄.

1925. 1  계룡산 · 강진 가마터 조사

싸리나무의 종류발표- 싸리 참싸리 광대싸리 조록싸리 댑싸리 괭이싸리 왕좀싸리 사방식재 1907년 백운동(청운동) 처음
      4  모쿠지키불상사진전 개최
      5  가마터 순례여행을 마치고발표
      7  단바의 모쿠지키 불상 조사.

10 오키타 사키와 재혼(일본민예관 다도 및 도기와 도자기 보자기 만들기 꽃꽂이)
1926. 6  주요 임목 종자의 발아 촉진에 관한 시험 제2회 보고발표
     10  조선산 주요 수목 분포 및 적지(適地)」 「묘포 비료로서의 퇴비에 관해서발표
     11  차녀 태어났으나 곧 사망. 이 해에 아베 요시시게 만남.
1927. 4  분원가마터 조사
      7  독산(禿山)-민둥산(赤茶色-무주공산)의 이용 문제에 관해서발표
     12  분원 가마터 고찰발표. 이 해 노리타카 지순탁(1912~1993. 9~16세 이웃임)을 만남. 1만여 곳 통역 겸 지리 안내. 자네 손으로 청자의 기법을 부활시켜 보지 않겠는가? 1994년 고려청자 재현. 청자 향로 20엔 사줌.


1928. 3 야나기 무네요시를 찾아 감.

5 조부 비석 건립. 이 무렵 조선 시대 도자기출판 계획 좌절.

조선의 그릇 및 그 용도에 관한 강연. 계명회가 노리타카 원조. 도이 하마이치 만남. 다쿠미 집에서 새로운 마을회원 모집. 이 무렵 조선 취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임성립
      8  계룡산 가마터 조사
1929. 2 노리타카 가마터 조사 본격화

조선의 선(소반)출판 기차에서 본 찢어질 듯 가난한 농부 일가가 정든 가정도 팔고 농사에서 유일한 힘이자 희망인 소도 타인에게 보내고, 친척 지인도 헤어져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도 손때 묻은 소반을 버릴 수 없다고 손 짐 안에 넣는 것에 주목한다. 순수서정의 모습을 가지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친숙하고, 시간과 함께 맛을 더하는 것이며 물건으로써 소반은 그 주인에 따른 바른 쓰임, 사용자의 인격을 증명한다. 실용성과 미학적 가치를 두루 지녔고 널리 쓰이는 물건이면서 동시 조형예술 작품으로 평가함. ‘사랑과 지혜의 서라 평가. 사방탁자, 책상, 문고, 장롱, 경대, 작은 목함, 벽에 거는 편지통

피곤한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흉내 내기보다 체득하고 있는 것을 잘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자신감 넘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공예의 길만이 아니다.’ 친구인 아베 요시시게 교수가 총독부가 아사카와 다쿠미를 반일 사상범으로 문제 삼을까봐 전전긍긍 함.
      4  야나기와 마지막으로 만남

11 아사카와 사키에게 편지를 씀.
1930. 2  조선의 선반과 장롱류에 대하여발표

7 노리타카 부산요와 대주요출판
         이 무렵 조선 고가마터 유적 조사 경과보고집필
     12  조선공예회 개최

1931. 1 도노무라 기치노스케 방문

 

다쿠미 사망/장례식/

연초부터 전국 각지 돌려 묘목 기르는 법 보급 격무 과로 315일 경성으로 돌아 올 때 독감 걸림. 326일 임엄시험장에서 각지의 산림을 찍은 활동사진(영화) 시사회 열림. 327일 급성 폐렴 자리 누움. 40도 고열. 29일 야나기 무네요시 부탁 조선의 다완탈고. 41일 친척 친구들에게 전보 침(병세가 위독하다). 2일 밤 야나기 무네요시가 경성행 열차가 대구를 지날 무렵 다쿠미 2일 오후 여섯 시(557) 사망 전보를 받음. 다쿠미 책임이 있다........’ 함축적 의미의 중얼거림. 44일 경성감리교회 다나카 목사 주재 기독교식 장례

신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은 요절한다.”
아베 요시시게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하다발표 - 문부상, 전후 일본 중학교 교과서 15년 동안 '인간의 가치'로 수록

인간의 가치 - ‘다쿠미처럼 올바르고 의무를 존중하는 사람,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두려워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 게다가 머리도 좋은데다가 감상력까지 풍부한 이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인간을 경외하지 않는 다쿠미씨는 곧 자유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 지위에도 학력에도 권세에도 부귀에도 의지하지 않고, 사람됨만으로 끝까지 당당하게 살았다. 이러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 뿐 아니라,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의 존재는 인간의 생활을 믿음직하게 한다. 이런 사람을 잃은 것은 조선의 큰 손실임은 말할 것도 없비만, 더 나아가서 주저 없이 인류의 손실이다. 인간의 길을 올바르고 용감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잃은 것만큼 인류에게 큰 손실은 없기 때문이다

수필 어느 날의 만찬’ - 세리 창부 기생과도 친구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동강 하정웅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및 세계시민학교 기틀).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

 

야나기 무네요시 한국을 내면으로부터 알고 있는 사람. 아사카와는 죽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그렇게 조선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사람을 나는 그 사람 외에는 모른다. 정말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조선인으로부터 사랑받았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조선인으로부터 봉헌된 열정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선옷 입고 염)을 서로 메겠다고 나온 상여꾼들에 의해 메어져 조선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강요되지 않은 내선 융화의 미담

그레고리 핸더슨 그는 끊임없이, 한국에서 죽고 그 땅에 묻히고 싶어 했다.

추모의 글 300여 편.

료마가 간다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15대 심수관에게 준 편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문화 공유 개체에 지나지 않는 종족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 중국인의 마음을 이해난 것입니다. 낯간지럽습니다만 나는 스스로를 하나의 인류로 완성하도록 유의해 왔습니다.

조선옷(한복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입고, 조선말을 배움. 고무신 신고, 한식과 장죽 담배를 즐김. 온돌 사용. 조선 사람으로 오해. 과자 아이들에게 나눠 줌. 동료 자녀 장학금. 걸인(여자 주머니 돈 다 털어 줌. 남자 취직) 영세상인 온정과 취직에 정성. 동네 사람들 서로 상여를 메려하여 나눠 이동. 비가 억수로 내림.

 

유고조선 고가마터 유적 조사 경과보고
      5  유고 조선다완발표
         야나기가 편자후기」 「편집여록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를 추도(공예)
      7  유고 조선 요업 진흥에 관한 의견발표
      9  유저 조선도자명고출판 중판 명저. 머리말에서 태어날 때 붙여진 이름으로 그릇들을 부른다면 더욱 친근함을 느끼고 나아가서는 그 그릇들을 사용하던 조선 민족의 생활상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된다면 분명하게 자신이 조선도자명고를 쓴 목적을 밝힘.

민예운동을 골동품수집 같은 취미 차원이 아니라 좋은 시대를 만드는 운동으로 여겨 민중이 각성하여 스스로 생각해내고 스스로 키워나가는전인적 운동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함.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어 민중을 인도하는 목표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좋은 의미에서유행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대중성 치밀성 실용성 실무자 등 탁월한 식견. 도자기 연구 한국전통 예술 문화에 대한 관심은 목공예 민요 민화 등 민속까지 이르렀다. 고려청자 전남 강진 대구면, 분청사기 충남 공주군 반포면(계룡산), 백자 경기 광주 남종면(분원)

만주사변 발발

10 홍순혁 아사카와 다쿠미 지음 조선의 소반을 읽고> 발표
1932. 1 도이 하마이치가 추도문 발표

  유저 주요 수묘에 관한 비료 3요소 실험출판

4 1주기 기념 강연회 열림

6 야나기, 돗토리 민예점을 다쿠미이라 이름짓다

9 아베 요시시게 청구잡지출판

이 해에 묘비 건립
1934. 4  와쓰지 데쓰로 청구잡지를 읽다 발표

고게이-공예가 아사카와 다쿠미 추도(기념)호를 간행

유고 김해, 조선의 절임(김치 등)발표

다쿠미 편지 발표
         아사카와 노리타카 고향과 할아버지
         아사카와 마사토시 고인이 된(가고 없는) 다쿠미형()에 대해서
         하마구치 요시미쓰 다쿠미 씨와 나
         도이 하마이치 다쿠미 씨와 여승
         나카이 모노신 아사카와 다무미군에게
         최복현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추억- 아들 이름을 지어 줌. 항렬 돌림자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카와에 대해서」 「동인잡록


      8  아베 요시시게 인간의 가치가 교과서에 게재

10 아베 요시시게 정야집출판

이 무렵 아사카와 마사토시 아사카와 다쿠미 형의 회상을 제작
1937. 4  7주기

중일전쟁 발발
      8  모친 케이 씨 사망

1941 가을 다쿠미 모따기 항아리가 화제가 되다

 

1942. 7 묘 망우리로 이장. 부인 사키 중심. 도로 개설로 이장. 유명 지관이 70년 후 발복 예언 한국 유명인사 반열에 오름. 해방 후 일본인 묘지 일부 파손 훼손되었으나, 다쿠미 묘지는 이장 어르신이 이 분은 한국인으로 모셔야 할 분이고 보호해야 할 분이라고 하여 훼손을 면함

12 태평양 전쟁 발발
1945. 8 일본 패전. 아사카와 노리타카 소장품 한국에 기증

노리타카 다쿠미의 일기 김성진 씨에게 맡김

10 야나기, 묘코닌을 알게 됨
      12 사키와 소노에 일본으로 귀국


1946. 11 노리타카 일본으로 귀국. 전국 88권 구사기점적(舊沙器店跡) 687개소 도요지 조사 도편 30 상자. 도자기 3,000여점 국립민속박물관(석남 송석하 관장)(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에 기증.
1947. 3  사쿠와 소노에가 일본민예관에 취직

1948. 8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50. 6 한국전쟁 발발

9 야나기, 묘코닌 이나바노 겐자출간
1955. 11 ‘사랑과 성실을 한국에 바친 일본인에게 감사하는 모임개최

1961. 5  야나기 무네요시 사망


1964. 1  노리타카 사망, 민게이추도호 발간

6. 24 아사카와 다쿠미 묘가 복원하여 수복제를 지냄

7 가토 쇼린진 아사카와 다쿠미 씨의 묘발표

8. 25 한글 묘비 세움 한국이 좋아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의 산과 민예에 바친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1966. 6  淺川巧 功德之墓건립(망우리 묘지)-제안 김이만 이승윤 장장 조재명 과장 정인구 연구관 등

9 이완석 서울 동쪽 근교에 잠든 아사카와 다쿠미 씨의 묘발표

1974. 5 박병래 야나기와 와사카와 형제 비판. 감상과 동정 및 우월 의식으로 조선인을 더욱 비하하고 우월의식 드러냄.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최하림 한국 현대동양화의 복고 성 검토에서 아첨하는 논조로 일축. 1920~1930년대 고대미술 붐은 충실한 생활을이라는 일본인 식민지 특권계급의 취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세 분이 처음 불을 붙인 것일 뿐이다. 김정희 오경석 민영익 민영환 오세창 김세진 등의 수준 높은 감식안에 의해 이미 확인되었다.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들에게는 발견에 불과한 것이다. 총독의 하수인 공범자. 식민지 지배론(식민사관) - 민족사관
1976. 10 사쿠 사망
      11 소노에 사망
1977. 3  야마나시현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에 묘지 건립

1978. 3 쓰루미케, 이진희가 아사카와 다쿠미 평가. 에비나 노리 엮음 아사카와 다쿠미 저작집출판

1980. 5 다카사키 소지 외 조선과 일본 사이출판

1981. 1 야나기 무네요시 전집 제6권 출간
1982. 7  다카사키 소지가 평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소후칸) 출판
1984. 8  한국임업시험장 유지(홍림회-아사카와 다쿠미 기념사업위원회-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들이 망우리 다쿠미 묘지 앞에 기념비 설립

1986. 6 이바라가 노리코 한글로의 여행출판. 아사카와 다쿠미 묘에 성묘한 내용 수록

1988. 8 야마나시 현립미술관 아사카와 노리타카 자료관 건립

1990. 교토 고려미술관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특별전시회
1991. 3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탄생의 땅비석을 세움
1994. 5  망우리 산소 기념비를 새로 세움.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이 마음속ㅇ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523일 서울시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장묘시설사용허가를 받음(사용자-조재명, 임업연구원장, 사용기간: 1993.2.1.~2008.1.13. 면적 13. 묘적 N203363. 한상배 국립산림과학원 근무-조재명 법정 관리인을 대신하여 상시관리인(다쿠미 생전 절친한 동료직원 한수업 선생 4)

에미야 다카유키 백자같은 사람출간(일본 고교 필독서 100만명 독서)

정양모 박물관장: 청자는 기품 있고 아름답기 때문에 보는 쪽도 여성을 대하듯 소중하게 다룹니다. 그것에 비해, 백자는 고요하고 대범하여 자가 주장을 하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는다. 백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소중한 벗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1995. 11 아사카와 다쿠미선생기념사업회 창립


1996. 2  김성진 씨가 다쿠미 일기를 다카네정(현 호쿠토시 다카네정)에 기증

4 세이도 구니히로 임업 기술자로서의 아사카와 다쿠미를 발표

한국에서 조선의 소반’, ‘ 조선도자명고번역 출간 심우성 학고재

      6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를 그리워하는 모임결성

김영복 망우리 묘지를 찾아서발표

9 한국에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번역 출간

한국에서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하여세미나 개최

10 김영범 아사카와 다쿠미 진실된 조선 사랑발표

이병진 다이쇼 시대의 어떤 시대 정신발표
     11 아사카와 다쿠미 전집(소후칸) 출판
1997. 5  예술신조(藝術新潮)에 아사카와 형제 특집 기사

7 망우리 묘지 정비(한국 홍림회 다카네정-오른쪽으로 1M 옮김. 병풍제 수복. 진입로 계단 개설. 한국식 상석. 석향로. 석화병 건립. 상석 비문 삼가 유덕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니다새겨 넣음.

9 ‘월간 미술아사카와 다쿠미 특집 기사

10 이데 마고로쿠 여행자들의 기록-아사카와 다쿠미연재
     11 아사카와 다쿠미 한일합동추모제 개최. NHK 교육텔레비전 아사카와 다쿠미 방영

1998. 3 간다 켄지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기독교 신자발표

전원자 우호의 가교발표

5 야마나시 텔레비전 형제에게 바치는 진혼가방영

6 다카사키 소지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개정증보판 출판

11 다카네정과 포천군 자매결연 맺음

한국에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방영

1999. 2 기무라 가쓰아키 전람회 시대의 기억-아사카와 다쿠미가 간다개최

4 ‘1999 자료 현대사회가 아사카와 다쿠미 소개

5 김병종 한국인의 예술혼에 살다간 일본인발표

2000. 3 극단 코메디 오프 예스터데이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 조선의 산을 푸르게-아사카와 다쿠미상연

2001. 2 다카사키 소지 등 한국 민예 여행출판

3. 31 한국에 70주기 개최. 고향 다카네정 꽃나무 만텐쇼(滿天星)철쭉 2주 기념식수.

8. 25  야마나시현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에 아사카와 노리타가 다쿠미 형제 자료관 개관 김병윤 도유 정호연 사장 참석

11 미즈키 료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출판

12 임영철 미오쓰쿠시의 연꽃전국 투어

2002. 3 하정웅 한국과 일본, 두 조국에 산다, 출판
2003. 7  아사카와 다쿠미 저 다카사키 소지 편 조선민예론집(이와나미문고) 출판
2005. 11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조선의 흙이 되다다카사키 소지 저 | 김순희 역 한국어판 출판

2006. 하정웅 실업가 및 메세나(그림 및 사진 1만 여점 수집 기도미술관 건립 계획) 청리은하숙 가족과 함께 추모제

2008. 10. 3 개천절 한일합동음악회(나카가와 시게토시씨의 알폰클럽과 한국 요델클럽 추모 음악회 알폰 다쿠미 고향 나무로 깎아 만듬)

2009. 3. 28 아사카와 다쿠미 자료 인수(서울국제친선협회)

10 고바야시 후지오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흙이 된, 임업기술자이며 조선민예연구자(산림 제1505) 1882년 발간 월간지 다쿠미도 2회 논문 기재함.
2011. 9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학술대회 개최(프레스센터) 주최 서울국제친선협회 협찬 일본국제교류기금 재단법인 수림문화재단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포천시 야마시현 호쿠토시 국립산림과학원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한국 아사카와 현창회 일본 아사카와 사모회 해강고려청자연구소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부키) 출판- 헌정식(42일 묘소, 백조종 부회장 청담고 및 체험 봉사 방과후학교)

2010. 6.12~8.15 고려미술관 개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가 사랑한 조선 미술전

2011. 탄생 120주년 기념 미술관 연락 협의회 주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의 마음과 눈-조선시대의 미49일부터 3개 회장 순회 개최
2012. 7  영화 백자의 사람-한국의 흙이 되다상영
2014. 3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와 서간한국어판 출판
2014. 10 아사카와 다쿠미 묘 재정비
2015. 4.2  아사카와 다쿠미 84주기 추모제

 

한국 : 홍림회(산림과학원 퇴직자 중심모임-김병윤 부회장). 서울시국제문화교류회(서울시공무원 모임). 기요사토 긴자쥬쿠(靑里銀河塾) 운영(201512회 일본에서 운영. 하정웅 수림문화 재단 이사장-홍릉 산림과학원 앞 리모델링 후 한국청리은하숙을 운영할 예정).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고 조재명, 현 회장 조만제), 서울국제친선협회(회장 이순주). 망우리묘지공원 저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교사 정종배), 중랑문화연구소(소장 남화창), 이수현의인문화재단설립위원회(노치환 기자, 회장 강지원변호사)

일본측 :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기리는 모임(시노부카아-아사카와형제들 고향사람들) 회보 발행. 후지모토 다쿠미 사진작가(화구상 아버지 바람 김해 농촌 1970년대 인사동 거리)

2015.4. 2 정종배

 

2015.10 1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설- 주최 수림문화재단 주관 중랑문화연구원

일한국교정상화50주년기념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2016.4 아사카와 다쿠미 85주기 추모제 및 제2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학식 

2016.6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참가(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학생 5 교사 4) 빨간 신호등도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일본인의 양면성). 묘지에서 만난 일본인 헌화 값 일본 추모제엔 참석하지 않음)

2016.9 대향 이중섭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 사생대회 개최

2016.11 2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종업식 및 윤동주 탄생 100주년 시낭송대회 개최

2017. 2 일본 릿쿄대학교 윤동주 시낭송회 참가(학생 2 교사 2)

2017.4  아사카와 다쿠미 86주기 추모식(서울친선협회,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및 제3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학식

2017.6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참가(학생 5명 교사 5)

2017.9  재일한국인 영화감독 오충공 제노사이드 촬영(1923년 관동대진재 - 아사카와 다쿠미, 송석하, 조봉암, 유상규, 김영랑, 방정환)

2017.11 3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종업식 및 윤동주 시낭대회 개최 

2019.4.2. 코로나19로 꽃바구니 헌화(국민신탁 김종규 수림문화재단 유진룡 형제추모회 등)  -정종배 정리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1891-1931)

-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정종배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은 인물이 있다. 주된 추모객은 유택의 주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과 고원과 기사로서 원조 한류 팬이라 일컬을 정도로 한국에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그의 한국생활 17(19141931)1934년 아베 요시시게阿倍能成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947년까지 게재하였다.

  광주시립 및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하정웅 명예관장은 중학교 때  ‘인간의 가치글을 읽고, 20살 전후 어려운 상황을 다쿠미 고향 기요사토淸里에서 성공회 선교사 폴 러쉬와 만남 이후 사업을 일으켜 25살부터 크게 성공했다. 청리고원에 별장 은하숙銀河塾을 짓고 사업장과 가정을 오갔다. 재일한국인 화가 전화황과의 만남을 통해 재일동포 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림, 사진, 영화 등 10,000여점을 수집하여, 전부 국내에 기증하여 메세나 정신을 실천하였다. 재일한국인 화가들의 고향인 부산 포항 대전 전주 등에 기증하였다. 이우환 화가의 프랑스 파리 유학도 전폭적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무용인 최승희 관련 사진 및 자료를 수집하여 국립 고궁박물관과 숙명여자대학에 기증하였다. 다쿠미의 형님 노리타카에게 1945년 다쿠미의 일기를 받은 김성진씨가 일본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추모회에 일기 기증을 계기로 2001, 다쿠미가 태어난 다카네정高根町 생애학습센터 내에 아사카와형제자료관을 개관할 때도 도자기 사진 등 많은 자료를 기증하여 한일교류의 장을 열고 있다. 일본 제일의 유기농과 낙농지역으로 성장하는데 기틀을 다진 폴 러쉬 선교사를 기리는 축제는 대대적으로 개최하는데, 다쿠미를 추모하는 모임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하명예관장은 사비로 2006년부터 다쿠미의 고향에서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를 개최하였다. 11회째부터 다쿠미의 고향 호쿠토시에서 인적 물적 지원을 하기 시작하여 올해 18회째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다쿠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를 ()수림문화재단 주최로 2015년 설립하였다. 필자는 망우리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추모식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며 하명예관장과 인연을 맺어 숙장대행을 맡았다. 일본 청리은하숙에 학생들과 2016, 20176월에 참가하였다.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를 후원하는 수림문화재단.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21(1987~2008) 동안 교육과 문화입국에 헌신한 재일한국인 김희수 선생의 수와 부인 이재림 여사의 림자를 집자하여 2009년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다쿠미 선생이 1922년 이전하며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이끌어간 청량리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수목원) 앞 옛 영화진흥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김희수기념수림아트센터를 마련하였다.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개인과 단체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후원하며, 서울 동북지역 문화예술 분야 진흥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의 아버지는 화구상으로, 아들이 다쿠미 선생만큼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다쿠미라 지었다. 작가는 20대부터 한국에 50여 차례 들어와 고대 한일 교류 관련 유적과 자료 및 1970년대 농촌, 5일장, 인사동 거리와 인물 등을 작업하여 민속박물관에 전부 기증하였다. 아사카와 형제도 수집한 민예품 도자기 등을 전부 한국에 기증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아사카와 형제와 인연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미를 의 미라 규정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수집한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건립하였다. 아사카와 형제는 전국 도요지를 답사하며 경험한 무속신앙 농악 탈춤 등을 통해 한국의 미를 해학과 풍자 멋 흥취 등으로 보았다.

  필자는 20004월 첫 토요일에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을 알았다. 전날 밤 수필집 약손의 저자 박문하 선생의 수필 또 한 권의 책을 읽고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었다. 조화가 두 줄로 늘어서 있어 유명 인사거나 후손들이 돈을 많이 번 분인가? 유택에 올라가 확인하였다. 박문하 수필가가 일본에 사는 지인에게 조선의 선(소반)과 유작인 조선도자명고두 권의 책을 구입하여 보내달라는 도서의 저자였다. 조선인은 만주로 이주 유랑하면서도 이삿짐 맨 위에 밥상이 실려 있다. 온돌방에 가장 적합한 밥상은 실용성, 조형미, 예술성 등 쓰면 쓸수록 빛나는 동양 최고 민예품이라 극찬하였다.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인지하고 조선인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솔직하게 드러냈다. 주변 일본인조차 요시찰 인물로 경찰의 감시를 당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경복궁 집경당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민족이란 말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192391일 관동대지진 때 무고한 조선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식민지 관료로서 조선 사람들의 유언비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민족이라 일기에 기록할 만큼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았다.

 

'나는 믿는다. 이 불시의 천변을 이용하여 계획을 조선인 혼자 세우지는 않았을 거라고, 오히려 일본인 사회주의자 패거리가 주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해서 저지른 일이 아닐까?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대우하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조선인에 대해 이해가 지나치게 빈약한 탓이다.(중략)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도쿄에 사는 조선인들이 지진으로 고생하는 일본인과 그들의 집이 불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조선인들이 그렇게 했을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일본인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도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 (관동대지진후 조선인의 살인방화에 자경단이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20034월 다쿠미 유택에서 아사카와 다쿠미현창회 조재명 회장을 만났다. 그 뒤로 현창회 활동을 하였다. 백자의 사람영화 제작후원회에서 레슬링선수 출신인 안토니오 이노키 중의원과 일본 대사 등을 비롯하여 한국 일본 추모회 관련 인물들이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2012년 일본 후원회 기금으로 영화 백자의 사람이 촬영하고 국내에서도 상영했다. 학교축제 및 재량과 창체 수업시간에 영화를 학생들에게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학교 전일제 봉사활동 및 체험활동을 망우리공원에서 실시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하이쿠 유파인 가부라안(燕庵)6대이고 증조부도 인도속설변의(人道俗說弁義)라는 책을 낸 학자였다. 다쿠미의 타고난 필력에다 피나는 메모와 정리 습관이 민예와 도자기 및 수목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과 소설을 쓰며, 책을 펴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일 년 먼저 남대문소학교 미술교사(조각 전공)로 부임한 형님 노리타카() 뒤를 이어 191424세 다쿠미는 식민지 조선에 왔다. 당시 대부분 일본인들은 한 몫 잡으려고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두 형제는 달랐다. 조선도자기의 신이라 일컫는 형님과 전국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하고 정리하였다. 도자기업계에서는 두 형제를 중시조로 기리고 있다. 고려청자만 알고 있던 조선의 도자기를, 조선백자(달항아리)의 뛰어난 미를 발견하며, 탐구와 조사는 형님이 동생은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펴냈다. 노리타카는 8.15 광복 후 미군정 당국이 조선총독부 건물 수장고에 뒹굴고 있는 도자기와 민예품 정리를 부탁받아 해결하고, 이듬해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9년 공저인 조선거수노수명목지는 지금의 천연기념물 지정과 나무 관련 연구의 지침서이다. 사방공사에 적합한 싸리나무 이름을 손수 지었다. 북아현동 중앙여고 자리인 국내 첫 수목원인 의령원에서 1922년 청량리 홍릉수목원과 포천 광릉수목원으로 이전하는데, 수목원 기사였던 다쿠미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정리하여 현재 산림정책과 운영의 주춧돌을 놓았다. 또한 잣나무 씨앗 발아를 2년에서 1년으로 앞당긴 노천매장법, 한국 노동자들이 주고받은 말을 이해하고 발견하였다. 지금도 이 발아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산림의 37%가 잣나무다.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청량사에서 다쿠미와 차 한 잔 마시고 한여름 밤 달빛 아래 정릉천을 걷는 피서법이 당시 최고 인기였다. 폐허동인 오상순, 염상섭, 번영로, 남궁벽, 김찬영, 김일엽, 나혜석, 황석우, 민태원 등과 교유하였다. 광화문 해체의 부당성을 알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을 동아일보에 전달하였다.

 

그의 192264일자 일기에는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후일 조선신궁)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어내 가면서 까지 굳이 숭경을 강제하는 신사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 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산정상에서 경복궁안의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백악,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사이에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뻔뻔하다. 게다가 기존 건축의 조화를 완전히 깨뜨려 정말이지 볼썽사나와 보인다. 백악산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일본인의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192223년 사이 일기를 보면 지금의 월곡동 이문동 석관동 회기동 중랑천 정릉천 등에서 씨앗을 넣고 종묘를 길러 민둥산 녹화사업에 매진하였다. 당시 종묘장(서울시립대 전신인 서울농업학교)이었던 청량고등학교 교정에 일본식 탑과 속성수로 심은 꽃개오동나무 한 그루가 남아있다. 필자는 5년 동안 근무하며 다쿠미의 체취와 열정을 느끼고 그 정신을 이어가려 학생들과 더불어 노력했다.

  아사카와 다쿠미 묘지는 이문동 공동묘지에서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이장하며 풍수가 “70년 후면 명성을 얻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명당에 쓴 묘는 점점 커진다는 말이 있다. 다쿠미 묘역도 1960년대 중반부터 조재명 회장의 헌신에 의해 조금씩 넓혀졌다.  2014년 다쿠미 고향 호쿠도시 의회에서 4,300만원 금액이 다쿠미 묘역 정비 사업으로 책정되어 그 104일 재단장한 묘역에서 성대하게 추모식 행사를 치렀다. 지금은 망우리공원 묘역 중 둘레석을 둘러친 호화분묘(?)가 되었다. 다쿠미 선생과 제반 현황을 잘 모르는 사람은 독립지사 묘는 초라한데 쪽바리(?) 묘는 이렇게 크게 모시는가?”라며 불만을 터트리는 분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필자는 학생들과 추모식에 참여하며 2010년 이후 추모시를 낭송했다한국내셔널 트러스트 망우분과가 주관하여 망우인문학 게임형 도전 러닝맨 행사를 치르고 있다가장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는 묘역이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이다.  1960년대 중반 광릉수목원장 조재명 현창회 회장 중심으로 수목원 퇴임공무원 모임인 홍림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추모 열기가 활성화 되었다. 공덕비와 상석 그리고 오석의 현창비 등을 세웠다. 일본에서도 소설과 평전 그리고 르포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1966년 김성진씨의 다쿠미 일기 원본을 다쿠미 고향 다카네정에 기증을 계기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가 조직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일간 민간교류 활성화에 공헌하고 있다. 매년 아사카와 다쿠미 기일인 42일 전후로 망우리공원 추모식에 참여하고 있다. 2008년 조재명 회장의 급서로 인해 현창회가 재편됐다. 다쿠미와 직접 함께 일하던 분들의 자제도 이제는 세상을 떴다. 도자기와 공예 관련 분야 뜻있는 분들이 현창회에 함께 했다. 대학 일본어학과 일본인 교수들이 다쿠미 관련 글을 발표하고 학생들과 함께 추모식에 참여했다. 현재는 조만제 회장님을 중심으로 아카사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로 확대 조직하여 오는 4289주기 추모식 망우리묘역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한복을 입고 온돌방에서 한국식 생활을 했다. 주변 어려운 사람을 돌봐 주었다. 장례식 때 비가 억수로 내렸지만,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실현하였다.

  망우리공원에서 종종 다쿠미 유택을 참배하는 다쿠미 고향의 일본인을 만난다. 밤새 술을 마시다 아침 일찍 술집 여인들과 참배하는 일본인이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행사 때 조화를 자기 이름으로 세워달라고 10만원을 나에게 줘, 85주기 추모식 때 사용했다. 일본 청리은하숙에 참석하여 전화를 하였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올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인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다쿠미는 식목일 준비 과로와 감기로 인해 급성폐렴으로 운명하였다. 식목일을 제정하고 조선에 미루나무(포풀러)와 아까시나무를 도입한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1866~1936) 묘지도 망우리공원에 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장, 영림창장으로 식민지 임업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조선총독부가 내걸었던 식민지문명화론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비판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