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충청매일]김소월과 관동대지진
김소월과 관동대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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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의 시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의 한 사람인 김소월(金素月·본명은 정식·1902~1934). 김소월은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했던 1923년 9월 도쿄에 있었다. 그는 이해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쿄상대 예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대지진을 겪었다. 평북 정주군 곽산의 고향집에서는 소월의 소식을 몰라 애를 태웠다. 소월이 어렵게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이러한 대재앙의 소식이 전해졌으니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김정식이란 이름이 신문에 실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사망자 명단 속에 있었다. 김정식은 소월의 본명이다. 가족들이 받은 충격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월의 집은 갑자기 초상집으로 변했다. 소월의 숙모인 계희영씨는 그의 저서 ‘내가 기른 소월’(1969)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지진의 피해란 너무 막심했다. 과장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나 인명피해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며 바다는 불바다로 변했다고 들었다. 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끓어 올랐으며 온 천지가 진동하였다.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육지의 불을 피하려고 물로 뛰어들었다가 끓는 바닷물에 그만 온 몸이 익어서 그대로 죽어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식구들은 안절부절 동경에 간 소월로부터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문에 사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혹시 잘못 되었으면 어떻게 하나 하여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그 사망자 명단에 김정식 이름 석자가 실려있었다. --- 정식(소월)이 죽었다는 보도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 소월의 어머니는 아들 잃은 슬픔과 아픔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일본에 소월을 보내 놓고 줄곧 불만이 많았는데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보니 할아버지의 후회와 원망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 소월의 부고는 이렇게 할아버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집안 식구들을 슬픔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일본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소월이 쓴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저는 무사하오니 안심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신문 보도속의 김정식은 동명이인이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안도했으나 소월에게 속히 돌아오라고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소월은 가벼운 행장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을 안심시킨 후 도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소월이 돌아오자 고향집은 잔치집 분위기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다. 소월은 가족들과 얼마간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족들의 만류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소월의 어머니는 “죽어 이별도 서러운데 왜 생이별을 하려고 그러느냐?”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마침내 소월은 일본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소월의 일본 유학은 이처럼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초기에 중단되고 말았다. 소월은 일본 유학을 계속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고향에 남았으나 식민지하에서 그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지식인이란 이유로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소월은 이후 줄곧 세월을 한탄하다가 이로부터 11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에 발생했다. 사망자가 약 10만명, 행방불명이 약 4만명에 달한 최악의 참사였다. 지진 발생 다음날부터 불안한 민심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무고한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의 관헌과 자경단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학살 당했다. 학살된 조선인 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233명 뿐이었으나,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의 수는 6천여명이었으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시 경제적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이 지진으로 인해 한층 악화된 민심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재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분석한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88년이 지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지역 인근 해저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했다. 또 지진의 영향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태평양 연안 지역을 초토화했다. 관동대지진을 초월하는 대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제일 먼저 일본에 구조대를 보내고 참혹한 불행에 빠진 일본을 돕자고 전국민이 나서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서 일본에 최대한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앙금은 잠시 잊고 그들의 상처를 먼저 치유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그럼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까운 이웃으로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 한층 성숙해진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
ㅁ[레이디경향]김은숙씨가 털어놓은 할아버지 김소월과 불운한 우리 가족사
미디어다음
김은숙씨가 털어놓은 할아버지 김소월과 불운한 우리 가족사
레이디경향 | 입력 2010.09.02 16:54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온 국민이 자다 깨서도 읖조릴 정도로 입에 붙은 '진달래 꽃'의 시인 김소월의 자손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소월에겐 4남 2녀의 자손이 있지만 이중 한국에 살고 있는 이는 3남 김정호씨뿐이다. 나머지 가족은 북한에 있는 것.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온 김소월의 가족들은 현재 김소월을 위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김소월의 손녀인 김은숙씨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이 한창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전국의 국토는 잘 깔린 초록색 융단도 같았다.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 있는 '송일정'이라는 식당을 지나치는 순간,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고 읊조리는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씨(45)는 뜨락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세월을 음미하는 듯 보였다. 첫 대면에서도 그녀가 김소월의 손녀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김소월의 초상화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런 말을 하면서 뚫어지게 쳐다볼 때가 많아요. 책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불쑥 찾아오는 학생들도 많구요. 하지만 할아버지 초상화는 제 아버지와 동생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컴퓨터 작품이에요. 아버지조차도 할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확인할 길이 없죠. 이 소나무 아래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이곳에 자그마한 기념관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예전에 한번 시도하다가 주춤했어요.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외지인이라서…."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깊은 생각에 빠지면 묻지도 않는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그녀가 소월의 기념관에 대해 혼잣말을 한다. 그녀가 연고지 없는 충남에서 정착하게 된 건 힘겹게 살아온 과거와 연결돼 있다.
김은숙씨는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김소월의 손녀'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그녀는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무척 시달렸다. 학교뿐 아니라 온 동네에서 그녀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학교에서 국어 시간만 되면 두렵기까지 했다. 독후감이나 시를 발표해야 할 때, 그녀는 어김없이 지목되기 때문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감도 없었죠. 하지만 모든 생활은 모범적이어야 했어요. '소월의 손녀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죠. 아버진 제게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그녀의 아버지인 김정호씨는(72) 현재 김포에 있는 아들 부부, 두 손자와 살고 있다. 김은숙씨를 만나기 전, 취재진은 김정호씨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언론에 노출되는 걸 무척 꺼려하는 눈치였다. 말로는 '건강상에 문제가 생겨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김소월 추모사업에 관련된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선다던 소문과는 달리 무척 소극적인 자세였다. 그에게 자세한 사연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추모사업이 몇 차례 진행되다가 번번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의기소침해진 눈치라고 한다. 게다가 김소월 시인의 유작을 소유한 한 수집가를 우연히 만나났는데, 1억원을 달라는 제안에 난감했다고.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유작을 갖고 싶어하셨지만 우리에게 1억원이 어딨어요. 그저 돈 없는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죠. 결국 복사본만 챙길 수 있었어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죠."
김은숙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내려온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아버지에게 늘상 들어온 탓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눈으로 만난 듯 생생하다.
평생 '소월'이란 두 글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그중 3남 김정호씨(72)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 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딸인 김은숙씨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고.
"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은 괜찮았어요. 아버지는 까다로워 보이긴 해도 당신 어머니한테만큼은 극진했어요.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어요. 원래 할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할아버지께서 '여자 이름으로 안 좋다'며 '실단'으로 바꾸셨대요."
김정호씨는 1932년, 소월이 서른 살일 때 태어났다. 그는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9세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그후 반공 포로로 남한에 잔류하다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휴전을 맞은 그는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1955년 만기 제대를 했다.
사글셋방에서 근근히 사는 김정호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지난 58년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자신이 소월의 친자식임을 밝혔다.
김정호씨,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 만나는 것이 소원!
시인 이명수씨는 지난 97년 김소월 자손들과 처음 만났다. 천안에 살고 있는 한 고등학교 선생의 제보를 받고 나서였다. 평소 김소월의 시를 흠모하던 그는 한걸음에 김정호씨와 연락을 취했고 그의 어려운 사연을 듣고는 지금은 작고한 시인 서정주 선생을 찾아가 '소월의 아들을 찾았다'고 알렸다.
"미당(서정주의 시호) 선생이 소월의 자손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셨더라구요. 살기 힘들다며 찾아온 소월의 아들을 보고는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정호씨도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미당 선생을 찾아갔겠어요. 레코드 외판원 등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는 정호씨의 형편을 알고는 미당 선생이 가슴 아파했죠. 그리고는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당시 미당은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김정호씨는 지난 67년 8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됐다.
이명수 시인은 김소월의 후손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그는 "소월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며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소월의 기념사업회 하나 없으니 말이 됩니까? 생가를 복원하고 건축물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작품을 다시 숨쉬게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념사업회가 꼭 있어야죠."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도움으로 반듯한 직장을 갖게 된 김정호씨는 8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러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엄청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아내를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는데 그에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퇴직금을 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홍익회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어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죠. 아버지는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타고난 성품이 순하세요.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많죠. 아버지는 특히 예술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세요.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자주 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셨어요. 생활이 여유 있었다면 예술계로 진출하셨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일기를 쓰시는걸요. 언젠가 할아버지 필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 필체와 너무 똑같거든요."
김정호씨의 고단한 삶은 어느새 일흔을 넘겼다. 지금 그가 가장 바라는 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죽기 전에 자북에 남겨진 형제와 자손들을 만나고 싶단다. 김소월은 지난 8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북한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신문을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김정호씨의 둘째 형 은호씨는 중공업청의 간부로, 동생인 낙호씨는 설계기사로 살고 있다는 것.
김정호씨는 4년 전, 가족들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고령의 아버지를 볼 때면 김은숙씨의 마음도 아파온다고.
"아버지 생전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게 해드려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답답해요. 아버지는 자꾸 늙어가시는데… 이러다가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요."
김정호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은숙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읖조리는 '진달래꽃'을 들으며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칼보다 강한 것이 펜'이라고 했다. 김소월의 시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다. 그러나 한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은 마음속에만 있을 뿐 현실에선 흔적조차 없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이것이 비단 가족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이명수(시인)·지호영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view.html?cateid=1011&newsid=20100902165420259&p=ladykh
ㅁ[스크랩] 소월과 숙모
소월과 숙모
밭에 있는 나무에 새집을 여러 개 걸어 놓았더니 작년에는 파랑새가 와서 새끼를 키우고 가더니 올해에는 소쩍새가 와서 둥지를 틀었다
야행성인 소쩍새는 낮에는 새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번식철이 지나서인지 밭에서 하루 밤을 머물러 보았는데 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쩍새를 평안도 지방에서는 접동새로 불렀다
소월의 시 중에 <접동새>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소쩍새를 가리킨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소월이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숙모인 계희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소월은 아버지가 일본인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하여 정신이상을 일으킨데다 어머니는 문맹이라 어릴 때부터 숙모를 많이 따랐다고 한다
숙모는 글을 배웠기 때문에 이야기책을 많이 읽었고 어린 소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소월의 문학적 재능을 키워 준 셈이고 나중에 월남한 후 '내가 키운 소월'이라는 글을 통하여 소월의 일화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접동새 이야기도 소월의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 오며 소월 또래의 외삼촌(장경삼)을 시가에 데리고 온 사이에 숙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옛날 박천 진두강 가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딸 하나와 아들 아홉을 두었다. 그런데 그만 선비 아내가 그 많은 아이들을 두고 병으로 죽자, 하나 뿐인 누이는 아홉이나 되는 오빠 동생들을 위하여 엄마 노릇을 하였는데 새로 계모가 들어오자 누이만 괴롭혔다. 결국 계모 학대에 죽은 누이는 접동새가 되었는데 아홉이나 되는 오빠 동생을 못잊어 밤이면 진두강 가에 와서 울게 되었다...'
소월은 이 이야기를 <접동새>로 나중에 시를 쓰게 된다
소월의 외삼촌 장경삼은 나중에 소월의 대표작이라 할 <진달래꽃>을 쓰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장경삼은 아홉 살 때에 일곱 살이나 많은 여자와 혼인을 하였다. 장경삼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동안 부인은 묵묵히 농사일을 하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온 장경삼은 교사가 된 후 젊은 여인을 맞아 딴 살림을 차렸다가 이윽고 일찍 죽고 만다.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슬피 울었다 한다
소월은 외숙모의 그 원망도 미움도 모르는 착한 심성을 떠올리며 불후의 명작 <진달래꽃>을 지었다
<진달래꽃>의 화자話者가 여자로 설정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소월의 시에는 <옛 이야기>, <님의 노래>처럼 '이야기나 노래를 들려 주는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숙모를 가리킨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 때엔 지난 날의 옛 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로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로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옛 이야기> 중에서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내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무도록 귀에 들려요/ 밤 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그러나 자다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 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님의 노래> 중에서
소월이 나중에 이런 시들을 지을 무렵에는 숙모는 숙부를 따라 평양에 가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과정에는 이렇게 수면 아래의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의 행로를 결정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승 한 사람이 나의 인생행로를 결정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오다가다 스친 인연때문에 인생행로가 크게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읽는 소월의 시는 소월의 숙모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한다
소월은 그간 제대로 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을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다 멀리 평안북도에 살았던 사람이고 게다가 사람이 죽으면 사진까지 몽땅 태워 버리는 전래의 관습때문에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꾸준히 자료를 찾던 사람이 소월의 오산학교 졸업 사진을 찾아 내었고 그것을 남한에 내려와 있던 소월의 아들이 직접 확인한 것이 바로 아래 사진이다
출처 :57 정유회 원문보기▶ 글쓴이 : 은행나무
ㅁ[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입력 : 2010.06.26 02:59 / 수정 : 2010.06.27 07:51
詩人의눈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 대중가요에
누구나 하나쯤은 외우는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南으로 온 시인의 아들은
가난과 싸우다 쓸쓸히
꿈 못 이루고 하늘로
"아… 할아버지, 아버지"
시인의 손녀도 의지할 곳 없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피자 회사에서 받은
단어 사용료 몇푼이
할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서만, 노래로만
작은 기념관 하나 없는
-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의 오른쪽 뺨에 비둘기가 흘린 분비물이 눈물처럼 남아 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 ▲ 서울 정동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소장중인‘진달래꽃’초 판본(1925).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 ▲ 소월의 손녀 김은숙은 식당 일을 하고 있다. / 문갑식 기자
나는 시인의 손녀다
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리어 운다.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미스터리-소월의 얼굴
소월 초상화<사진>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ㅁ[여성동아]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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