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命齋 이탁李鐸
묘비 앞면
命齋慶州李鐸先生之墓
묘비 뒷면
여기 젊음을 독립군에 불사르고 남은 생을 오로지 교육과 연구에 바치신 지사적 학자가 고이 누워 계시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용문산의 정기를 받아 한말의 풍운 속에 소년 시절을 보내시고 잃은 나라 되찾으러 온 겨레 일어선 기미의 해 약관의 몸으로 북로군정서의 사관생도가 되사 청산리 전역에 참가 이년여의 옥고를 겪으시고 이후 한글학회, 정주 오산학교, 서울사대에서 국어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몸 바치시다가 뜻하신 바 다 이루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시었다. 고고하신 생애에 빙탄불용의 엉하심이 있으시고 독창성에 차신 학풍은 후지자운後之子雲을 기약하시던 뜻 길이 받잡고자 오늘 이 주기를 맞이하여 여기 조찰히 몇 자를 새기어 삼가 세우다.
서기 1969년 4월 24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문하생 일동
독립군 출신으로 서울대학 국어교육학과 국어학 교수로 후학을 길러냈다
1992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비석과 상석이 남아 있다
사가정공원에서 구리쪽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용마산 깔딱고개 전 쉼터 바로 아래 묘터메에 비석이 서 있다
아차산토성과 입수맥이 닿아 있다
정서향으로 벚나무와 잣나무가 묘터를 덥고 있다
어릴적부터 한문을 주경야독
1916년 경신학교 입학 장지연 선생의 조선어문법 수업을 들었다
교재는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년 간행)
3.1혁명 후 만주로 가서 전전하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에서 3개월 간부훈련 마친 후
1920년 4월 각지에서 응모한 300여 명 훈련 특무반장
그 해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
어떤 작전 중 본대와 연락 두절 이탁이 속한 부대가 해산되고 본대가 시베리아로 가버려 복귀를 단념하고 수습요원으로 활동
1922년 무송현 흥업단(윤세복)의 군사교관 초빙받아 전성호와 함께 갔으나 곧 그만두고
1923년 8월 화순현 화림학교 1년간 교사
1924년 9월 돈화현 이흥래의 부탁으로 신민단사 보급 판매 위해 용정에서 불신검문 불온자료 소지로 20일 구류처분 독립군 전력 발각되어
3년형 복역
1926년 12월 가출옥 귀향 농사 지으며 국어학 연구
1928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
1932년 조선어학회 가입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 사정위원 역임
1936년 부친 중병으로 귀향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국어학 교수
1961년 정년퇴임
1968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 추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