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부부의 날/ 정종배
5월 21일 부부의 날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부문화를 만들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 매년 5월 21이다. 1995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표어를 내걸고 관련 행사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어, 2001년 청원을 제출하면서 마침내 200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5월 21일은 가정의 달 5월에 두 사람(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화수분
망우리공원 인물 중 부부의 연을 맺어
가정적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분들은 제외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나 열애의 이야기와 고단한 삶의 배경이
사색의 길을 찾는 이들의 흥미를 배가 하고 지혜를 얻는다.
몇 분은 한 여인이 아니고 몇 번째 손가락셈으로 헬 수 있다.
남편을 헬 수 있는 여장부도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계신다.
소천(小泉) 강용율(姜龍律, 1915~1963) 아동문학가
동요작사 어린의 영원한 벗은
1954년 최수정(1919~1988) 여사에게 늦장가 들어 복된 내조를 받다
소천 사후 생명보험 판매원 최우수상을 연3년 차지했다
2녀 1남 잘 기르고
남편과 함께 망우리 구리시 딸기원 마을 뒤편 남향받이 능선에 누워있다
끝뫼 김말봉(말봉(末鳳), 보옥(步玉), 1901~1960) 소설가
여장부 '찔레꽃'의 대중소설가
동지사대 1년 후배 시인 정지용 청혼을 거절했다
부산 경제계 기린아 뭇 여성 선망의 남자 전상명
두 여인 김경순 여운영에게 양보하고
끝도 없는 구애를 한 은행원 이석현과 결혼했다
혼인신고 하지 않은 채 갈라선 뒤
수주 변영로 귀띔으로 엇갈린 기차를 되짚어 서울로 돌아와 불같은 동거에
절망한 여운영 만주로 떠난 뒤 정식 부부가 되었다
전상명 과로와 장티푸스 걸려 5명 자식 두고 40세 사망
전상명의 친구로 2명의 자식을 둔 상처한 이종하의 구애에 정식 두 번째 남편을 맞이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연재 의뢰 신문 지가를 드높인
'찔레꽃' 전상범이 좋아했던 꽃이었다
이은상의 씨앗 아들 문제를 말봉이 응원했다
찔레꽃이 흐드러진 망우리공원 말봉 묘역 옆에는
두 번째 남편 아나키스크 이종하 선생이다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
1950년대 대표 시인 명동의 미남은
마리서사 서점 손님인 이정숙 여사와 화려하게 결혼하여
2남 1녀들 두고 서른 살에 생을 마감했다
유품 하나 남기지 않았다
1950년대 한국전쟁 후 문단의 모더니스트 그룹을 이끌며
도시풍의 시를 쓰고 숱한 일화를 뿌린 댄디보이에 대한
지어미의 마음 졸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김영랑(金永郞, 1903~1950) 시인 독립운동가
16세 꼬마 신랑으로 어린 신부를 잃고
강진과 해남 경계 선영 맨 아래 예쁜 묘를 쓰고
2년 뒤 집에 하숙하는 보통학교 여교사와 열애하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관동대지진으로 돌아와 서울을 오르내리며 친구 최승일의 여동생
숙명여중 최승희를 보고 반해 결혼하려 애를 쓰다 두 집안 반대하여
강진 생가 뒤안 동백나무 가지에 목을 매다는 자살 소동을.......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 김귀연 선생님과 결혼하여 7남 3녀 두었다
1954년 남산에서 망우리공원으로 1990년 용인천주교묘원으로 이장했다
강진 생가 세계모란공원에 이장이 미뤄져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할 보훈처 제안보다는
망우리공원으로 다시 모실 계획과 법을 찾고 있다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4~1948) 민속학자
관동대지진 유학 중 충격으로 상과대에서 방향은 틀어 민속학의 태두
경남 언양 만석꾼 집안 아내는 전북 정읍 만석꾼 집안 결혼
삼성그룹과 대상그룹의 혼사의 모델
부부 묘역은 태안군 근흥면 서풍농원에 이장했다
춘파(春波) 서동일(서동일(徐東日, 1893~1965) 독립운동가 다물단 단원은
부인 최옥경 여사의 유택에 이장하여 묘비에 이름을 새겨져 있지 않다
우측 능선 삼형제 바위와 계곡의 은사시나무와 왕버들나무의 연리지가 세 번이 굳게 만나
독립운동 뒤끝의 안타까운 현실을 위로하고 있는 듯 싶어 참배하며 눈여겨 되새긴다
대향(大鄕) 이중섭(李重燮, 1916~1956) 국민화가
도쿄문화학원 두 살 아래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18~ )
- (한국명 이남덕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와 연애할 때 우편엽서그림과
6.25한국전쟁 중 혼자 남고 일본으로 보내고 난 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우편엽서그림은
은지화와 함께 대향 이중섭 화업 세계적으로 길이 남을
우리나라 토속성과 가족애의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권진규(權鎭圭, 1922~1973) 근대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
일본의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 개교 80주년 ‘졸업생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선정해 그의 회고전(2009.10.19.~12.5)을 열었던 한국 근대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 화단의 냉대 속에 자살한 테라코타 작가
권진규는 ‘자소상’을 유난히 많이 제작했다. 일본인 부인 가사이 도모의 ‘도모’ 상도 제작했다. 그가 사랑한 여인 도모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리즈는 몇 점 되지 않지만, 신라의 석공의 혼과 조형의 본질을 담은 불상을 연상시키며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본 대학생 시절에 결혼한 일본인 도모를 평생 못 잊어했다. 여인상에서 얻은 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여인'으로 여러 점 제작했다.
부르델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말년에 외로워 누구나 오면 반가워했다.
항상 마음속에 도모가 있어 도모 그림을 붙여 놓고 보았다. 뒤에 도모가 재혼한 것을 알고 상심이 컸다.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73년까지 15년 정도의 짧은 기간 많은 작품으로 자기 셰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성신여대 담장 아래 동선동 작업실 자살 자체도 자기 관리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권진규 아틀리에는 (재)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여 문화 사업 활동의 장소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 1901~1932) 빈궁문학 소설가
네 번째 아내 조분녀를 맞이하는 결혼식은
《조선문단》 잡지 편집 인정받은 무골호인 귀재와
간도에서 떠돌 때 만나 의기투합 곳곳을 함께 여행한
전남 영광 조운(曺雲, 1898∼?) 시조시인 누이로 두 아들을 두었다
이영민(李榮敏, 1905~1954) 체육인 야구인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부동의 1위
7살 때 이혼으로 상처받아 아버지를 증오하여 삐뚤어진 셋째 아들
불량배 친구들 불러들여 귀중 물건 훔치려 필운동 자택에 들어와 다투다
권총 오발로 만능 스포츠맨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만송(晩松) 이기붕(李起鵬, 1896~1960) 국회의장
박마리아(朴瑪利亞, 1906~1960) 이화여대 부총장
1공화국 지아비 독재 권력의 2인자와 지어미 제2 국모?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지아비의 바람을
지어미가 두 번에 걸쳐 '~고려해 보겠다'로 고쳐
4.19혁명 민주의 불섶에 기름을 끼얹어
비운의 가족 모두 자살로
권총을 쏜 이강석의 애인 망우리공원 찾아와 한참을 보냈고
사설공원묘지로 이장한 묘역 관리비와 새로 단장한 비용을
시집가는 대신 퇴역 장성 아버지한테 타내어 내놓고
몇 년 전까지 4월 28일 추모제에 미국에서 귀국하여 참석했다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1959년) 정치인 진보당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네 명의 여인 그 중에 김조이(金祚伊, 1904년 ~ ?)는 독립운동가
대장부 연설을 잘하여 초대농림부장관 발탁되듯 여인들과 사랑을 나눴다
만해(萬海) 한용운(한용운(韓龍雲, 1897~1944)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출가 전 결혼 아들 보국 친일에 월북
노년 병 간호 유(兪)여사
묘지 오른쪽에 함께 했다.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 한다.
첫 아내는 그의 첫 직장인 동진(東進)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한다. 첫 부인 지정덕(池貞德)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남 2녀를 낳고 금슬 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타계했다.
입 하나 덜자고 딸 하나 친구집에 양녀로 보냈다
42세에 김동명은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梨大)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李福順)이었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로 있었는데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李福順)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에 써 놓았다. 그는 이(李) 부인의 몸에서 난 첫딸 월정(月汀)을 가장 사랑해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어떤 글에서 월정(月汀)의 이름 풀이를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李)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결실이라 더 귀중, 소중했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이(李) 부인도 둘째딸 월령을 낳고 59년 대학 수련회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첫날 입수하다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간신히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김동명의 일생은 곡절이 너무 많고 가슴 아픈 참변도 여러 번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갔다. 강원도 명주군 노동리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장부 어머니 덕분에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68세 되던 1968년 1월 그가 중풍으로 타계할 무렵, 그는 직업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없는 빨간 맨손이었다. 살던 집을 줄이고 줄여서 약값 대다가 마지막은 '서울의 시골 지역' 남가좌동 모래내의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빈수래빈수거(貧手來貧手去)라고나 할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난 그날 신산스런 삶을 마감했다.
망우리공원 서울이 훤히 보이는 능선에 두 번째 부인 곁에 본인 묘비없이 묻혔다 강릉 사천 문중 납골당에 안치됐다
소파(小派)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어린이 어린이동무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의 셋째 딸 용화와 결혼
33살 땅딸보 단 음식 좋아해 당뇨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
연인 줄리아 S 신준려 망우리공원 소파 쑥돌 묘비 맴돌았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 난석(蘭石) 박은혜(朴恩惠, 1904~1963)
난석 박은혜는 설산 장덕수의 두 번째 아내이고 경기여중고의 교장이었다
박은혜는 그 용모와 체격은 미스코리아 경연대회도 나가면 진이 될 만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성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김활란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덕수를 박은혜에게 소개하였다. 장덕수의 청혼을 거절한 뒤였다.
장덕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다닐 적에도 유학생들을 모아 학생운동을 한 중심인물이었고 뉴욕에 와서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명실공히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장덕수와 박은혜는 1937년 결혼식을 올리고 그 슬하에 딸 둘, 아들 둘을 두었다
고한경의 뒤를 이어 취임한 경기여고 교장자리는 15년을 계속 지켰는데 그가 교장으로 있으면서 어린학생들에게 심어준 정신은 하나이다.
“경기여고 학생들은 뒤에서 보아도 경기여고 학생인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그 시절에 경기에 다녀 오늘도 졸업생들은 그 시절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한다.
김활란은 박은혜를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이 되게 하여 뒤를 이어주기를 바랐지만 난석은 완강히 거절하고 1963년 회갑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화가
1998년 2월 《월간미술》 미술평론가들의 투표
‘근대유화베스트10’ 선정에 「경주의 산곡에서」와 「가을 어느 날」
각각 공동 1위와 7위를 차지하고
대향 이중섭의 「흰 소」가 단독 2위였다
대구 유지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 중 만난 대구 의사 집안의 딸 김옥순과 결혼하고
병으로 죽자 음주벽 서울로 올라와 두 번 더 결혼하여
통행금지 시비로 북아현동 자택에서 초짜순경 권총 오발로 천재의 예술혼을 접었다
김사국(金思國, 1892~1926) 金解光, 독립운동가, 고려공산동맹책임비서
김사국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병행한다. 김사국은 보성학교가 설립된 이후인 1907~08년경, 그의 나이 16, 17세에 보성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대한흥학회 활동을 하다가 1910, 11년 무렵 한성중학에 입학하여 1913, 14년 한성중학을 졸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국민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1920년 출옥한다. 곧 1921년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그해 7월 박원희와 결혼한다.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에서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 간도총국을 결성한다.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폐병에 걸려 1924년 6월 귀국한다.
치열하게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지만, 운명의 화살은 애석하게도 김사국 김사민 형제를 피해가지 않았다. 폐병으로 귀국한 김사국은 귀국 2년이 못돼서, 그리고 그의 여식이 태어난 1년 뒤인 1926년 5월 8일 부인 박원희의 극진한 간호를 물리치고 사망하게 된다.
박원희(朴元熙, 1898~1928) 독립운동가. 경성여자청년회 대표, 근우회 창립준비위원회, 여성동우회 창립, 최초의 여성사회단체장례식
김사국의 부인 박원희 역시 초창기 여성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김사국과 박원희는 “우리는 굳센 용사가 되어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을 세다”라는 맹세와 함께 결혼을 하였으나 5년의 짧은 결혼 기간을 채우고 영원한 작별을 하게 된다. 둘의 결혼 생활 5년의 기간 동안 김사국은 반 이상을 해외에 있거나 병중의 상태였다.
박원희는 김사국 사망 이후 갓 돌을 지난 여식을 업고 김사국의 유업을 이루기 위한 여러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8년 1월 짧은 나이로 세상과의 인연을 다하게 된다.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 운동의 출발점이 된 두 명의 혁명가는 그렇게 짧고도 화려하게 불꽃처럼 산화해 갔다.
김사국 박원희 부부는 독립운동가로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망우리공원 김사국의 어머니 안국당 묘지 앞에 며느리 박원희 묘비는 세워져 있고 아들 김사국 묘비는 아내 박원희 묘비 앞에 묻혀 있다.
박진동(朴晉東, ~1946) 학병동맹 군사부장
삼학병 중 학병동맹 군사부장 남해군수 출신 아들이자 LG그룹 창업자 구인회의 맏사위
푸른 꿈 낙이망우 하늘과 아리수 강물소리 누워 보고 듣기를 75년 흘러간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입업시험소 고원 및 기사 민예연구가
1916년 2월 미쓰에[みつえ]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으나 부인 미쓰에는 1921년 9월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1923년 10월 사쿠[咲]와 재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1931년 2월부터 3월까지 식목 행사 준비를 앞두고 조선 각지를 돌며 양묘에 관한 강연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경성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대한민국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언대로 한국에 묻혔다. 그래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름 앞에는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 또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저서인 『조선의 소반』 서문에서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는 충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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