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동짓날 최백근 조용수 곽영주 임화수 김석영

정종배 2020. 12. 20. 15:18






망우리공원 동짓날 최백근 조용수 곽영주 임화수 김석영/정종배



12월 21일 24절기 중 22 번째 절기로 동지입니다
음력 초순이라 애동지입니다 애동지 때 아기가 있는 집은 아기에게 좋지 않다고 해서 팥죽 대신 떡을 해먹는 풍습이었다
예로부터 10세까지는 삼신할머니가 돌봐준다 믿어 팥죽은 액운을 쫓는 팥죽을 쑤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팥떡을 먹었다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모셨다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 여겼다
팥죽 단자 새알심 관련 낱말과
동지가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팥의 붉은 색은 양색으로 음귀를 쫓는다
요즘처럼 역병이 창궐하면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여
수인성 전염병이 자주 발생했다는 증거이다
또 상가집에 팥죽을 쑤어 보내는 관습도 악귀를 쫓기 위한 샤먼 민속이었다
관상감에서 새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동문지보라는 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망우리공원 최백근 조용수 곽영주 임화수 같은 날 교수형에 처해 생을 마감 당하고 묻혔다

전남 동광양시 태인도 출신으로 일제에 저항했고 해방공간 이승만 단정에 반대해 싸웠고 4월혁명 공간에서는 진보적 시각에서 투쟁하였던 양심적인 민족통일운동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구호를 만들었다는 최백근 사회당준비위원회 조직부 부위원장과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출신으로 박정희 군부의 언론 탄압의 희생양으로 민족통일과 사회 민주화 그리고 민중생존권의 뜻을 펼치고자 했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두 분은

1961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 세력 박정희 대통령이 혁신계를 탄압할 목적으로 같은 해 6월 22 일 제정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그 해 동짓날 12월 21일 교수형에 사법살인을 당했다

그날 두 분의 사형 집행보다 먼저 4.19혁명의 기폭제인 3.15 부정선거 지휘자 최인규 내무부장관 경무대 앞 발포책임자 곽영주 경무대경찰서장 경무관 그리고 영화계의 황태자 정치 깡패 임화수 특수 밀수범 한필국 등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수암 최백근 선생은 고향 광양시민추진위원회 중심으로 복권을 추진 중이다 2018년 4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이장했다 또한 최선생의 가묘가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다
망우리공원 이장지에 남은 비석 어느 누가 깨트려 이름만 읽을 수 있다 함세덕 묘비 사진과 이제 70년 넘은 민족분단과 이념대립 극복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신고가 들어가 24시간 정지된 적이 있었다

1963년 남한산성 동문 밖 검복리로 이장한 조용수 민족일보사장은 2008년 1월 16일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오재영 연보비 아래 30여m 지점 이중섭 묘역 가는 지름길 개나리 수풀에 싸여 있다 올 가을 주변 잡목을 제거했다
폭정 12년 경무대의 비밀 5권 시리즈 펴내려다 제1권 내고 만다 석영이 질병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제1권 안에 내용 중 조봉암 초대농림부장관 낙점 이기붕 박마리아 경무대 입성 그리고 부통령이라 부르는 권세 4.19혁명까지 세밀한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 1공화국 전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컸다

묘비 앞면
청주김공석영(두봉)지묘
묘비 뒷면
석영 김두봉 평론가 1929년 함남 이원군 차호읍 용황리 김오종 5남으로 태어나다
석영은 청소년기에 왕성한 기백으로 필봉을 가다듬어 사회평론에 두각을 나타내다 1966년 12월 20일 홀로 가다 아까운 재기와 함께 여기 묻히다
1989년 4월 5일 재건
일여 오제도
조카 김세국

1966. 12.21. 조선일보 3면 사회 기사(뉴스)

부음 김석영씨 평론가 20일 새벽 서울 중림동 성요셉병원에 입원 중 작고 22일 동병원에서 발인, 장지 망우리묘지 연락처 서린동 151 오제도법률사무소



1961년 12월 22일 경향신문(제4931호) 3면 사회 기사(뉴스)

첫 시체는 임화수
22일 상오 11시 45분 인도

21일 하오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 최인규, 곽영주,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등 5명의 시체는 22일 상오 11시 45분 임화수를 필두로 이날 하오 4시 24분까지 모두 연고자들에게 인도되었다.

서울형무소에서 시체를 인수받은 사형수의 연고자들은 제각기 장의사에서 대절한 영구차에 싣고 귀가하거나 곧장 망우리 공동묘지에 즉일장(卽日葬)으로 매장을 끝내곤 하였다.

형장에서 첫째번로 외계에 나온 임화수는 임의 생전의 친우 7⸳8명이 몰고온 『경동장의사』 소속 서울영2485호에 실리어 그의 본가인 시내 종로구 연건동 198에 운구 되었다.

뒤이어 하오 2시 최인규의 시체가 최의 처삼촌이 몰고온 「정안장의사」소속 서울영1742호로 역시 최의 본집인 신당동 427의 6으로 각각 운구 되었다

임화수=3일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

최인규=오는 26일 경기도 광주 선산에 매장

조용수=망우리공동묘지에 매장 또는 선산인 함안에 매장할 것이라고

곽영주=시체 인수 즉시 망우리공동묘지에 매장

최백근=상동



조용수는 집행직전 「바오로」로 대세
사형이 확인되어 21일 하오 교수형을 받은 민족일보사장 조용수는 사형직전에「바오로」의 성명(聖名)으로 「가톨릭」 예식에 따라 영세(代洗)를 받았다 조의 장례도 「가톨릭」 예식으로 베풀어진다

입회한 윤형중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로 귀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