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내 고향 표산 언제 어디든 꽃봉오리 아니리

정종배 2017. 3. 2. 10:31

특별기고

최종편집일 : 201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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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정종배]고향은 언제 어디든 꽃봉오리 아니리

시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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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어릴 적 뛰놀던 뒷동산에 오르고 조상님께 성묘하려 마을 뒤 대밭 골목을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져야 할 그 좋던 붉은 소나무와 오솔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에 익은 산 능선과 골짜기는 흙더미로 판판하게 골라 놓아 흔적조차 없었다.

 전남도 내에서 가장 세수입이 적고 인구가 급감해 군 역사를 새로 쓸 산업단지를 고향 뒤에 조성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심신이 치유되는 고향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 컴퓨터 항공사진으로 몇 번이나 자세히 살펴봤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마 이렇게까지’!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리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어릴 적 아버지와 집안 어르신, 형제들과 오순도순 함께 걷던 성묘 길은 다시 찾을 수 없다. 친구들과 밤낮으로 뒹굴며 아로새긴 추억도 영원히 가슴에 묻어 둘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향을 지키는 집안 동생이 산업단지 조성 지역 발굴 작업을 도우며 직접 확인한 내용을 전했다. “예전에 우리가 뛰어놀던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옛 집단 취락구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저수지 너머 산 능선에는 오래된 무덤(고분)이 즐비했다. 읍내 가려고 넘던 고개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던 터가 나왔는데 공사기간을 맞추려는 관계자들에 의해 발굴을 뚝딱 끝내버리고 거침없이 뭉개지고 말았다”면서 탄식했다. 남의 일처럼 여겼던,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떠나는 수몰민이나 재개발에 수용돼 정든 땅에서 쫓겨나는 이주민들의 불안한 삶과 고단한 심정을 고향에 와서 생생하게 접한 것이다.

 동네 터를 잡을 때 200여년 지나면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무안공항고속도로가 동네 앞 들녘을 관통하고, 마을 뒤로 동함평나들목(IC)이 열렸다. 급기야 동함평 산업단지가 동네 뒷목을 바짝 잘라 30m 높이의 축대를 쌓아 공제선을 높여 놓았다. 내 고향은 이제 말 그대로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어 버렸다.

 산업화·도시화란 이름으로 개발과 편리를 우선시 하는 현대사회는 탈향, 망향의 시대가 아닌가 싶다. 조금 과장하자면 감았던 눈을 뜨면 자연과 우리 고유의 옛것을 찾아볼 수 없지 싶다. 그 좋았던 우리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정이 메말라 사람답게 살기가 각박한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고향은 언제 어디든 지금 여기 꽃봉오리 아니겠는가. 나에게 고향은 눈밭에서 뛰놀다 저녁밥 먹으러 방에 들어섰을 때 차가운 손을 잡아주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다. 한겨울 오일장에서 지물포를 펼친 아버지가 하루 내 꽁꽁 언 몸을 녹이는 저녁밥을 보온하는 아랫목이다. 이제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어 가슴에 묻어둔 불효와 추억은 벌써 옛이야기가 됐다.

 나에겐 이런 아련함을 대신할 또 다른 고향길이 있다. 10여년 전 갑작스레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불효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 사색의 길을 자주 걸었다. 그러다가 만해 한용운, 죽산 조봉암, 소파 방정환, 대향 이중섭, 시인 박인환, 서해 최학송,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송촌 지석영,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다수의 독립운동가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 최초와 당대 최고인 선구자의 유택(무덤)을 참배하게 됐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좋은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추모공원에서 과거를 통해 현재를 깨닫고 성장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멋진 미래, 즉 소통과 배려의 디딤돌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오늘도 난 아들과 함께 내 마음 속 또 하나의 새로운 고향 길로 펼쳐진 망우리 묘지공원 4.7㎞ 사색의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선인들의 묘지 앞에 서서 참배하며 지혜를 얻고, 저 남쪽 내 고향 오솔길과 부모님을 추억한다.



 ●정종배 시인은…

 전남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 표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 교육대학원 국어과 졸업. 한국문인협회·한국시인협회·가톨릭문인회 회원. 현재 서울 청량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제자들과 함께 망우추모공원에 안장된 소설가 서해 최학송 등 저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 활동을 지도. 시집 <산에는 작은 꽃도> <안개 속에 소리가 자란다> <그림자 흔들기> <숫눈길> <봄동>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