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정촌 손창환

정종배 2022. 2. 10. 23:29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정촌 손창환

제3대 보건사회부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의사이자 행정가
정촌(靜村) 손창환(孫昌煥, 1909.6.12.~1966.2.11.) 56주기

중랑구청이 발주하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에서 시행하는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두 번째 날이었다. 2021년 4월 18일 일요일 전수조사팀이 만나는 오전 10시보다 1시간 앞서 양원역에 내려 서울둘레길 제2코스를 올랐다. 전날 사진을 찍지 못한 독립운동가 김중석 목사 묘역을 가기 위해서였다.

신록이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숲 사이로 묘비와 망주석이 보였다. 극락사 맞은편 능선에 이장하고, 묘비와 상석과 망주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창환 의사의 이장 터를 찾아 들어갔다. 묘비를 읽어내려가다 필자의 고향 전남 함평 태생이라 새겨 있어 반가웠다. 비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묘비 앞면, 밀양손공창환지묘 배 밀양변씨부좌. 묘비 뒷면, (전략) 아버지는 휘 길수요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서 1909년 6월 12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유하고 재주가 뛰어났더니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32세에 경응대학 의학부를 마치고 연구를 거듭한 뒤 37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 의학과장과 동부속동대문병원장 등을 역임하고 47세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리고 이어 보건사회부장관에 취임하여 국내의 보건사회 행정을 바로잡는데 진력하는 한편,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 국제적으로 활약하여 서서국적십자평화훈장과 정말국적십자공로훈장 등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 뜻이 곧고 깨끗했으므로 1966년 2월 11일 58세로 세상을 여읜 뒤에도 벗들과 문중이 모두 그를 잊지 못하고 그의 무덤 앞에 비를 세우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그의 명복을 빌고 이어 행적을 대강 적어 뒷 자손들에게 길이 전하는 바다

묘비 옆면 사자 영재 함재 녀 경재 손 종규 1966년 6월 일 립, 또 다른 옆면 노산 이은상 찬 소전 손재형 제 해관 손경식 서 *서서국: 스위스, 정말국: 덴마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나무위키에 수록된 손창환 의사의 약력에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나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에 정정 신고를 하였다. 나무위키에는 경남 사천과 서거한 날 2월 13일을 전남 함평과 2월 11일로 바로잡았다.

정촌 손창환은 어린 시절을 여수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여수 종포 종화동 돌다리 부근에서 고물상을 하였다. 그는 15세 늦은 나이에 여수공립보통학교(여수서초교)에 입학한다. 줄곧 급장을 지낼 정도로 성적이 우수하였다. 일본에서 생활기반을 잡게 된 형 창식 덕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40년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의학부를 졸업, 외과학·정형외과학을 전공하였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 의학부 교수로 부임하여 의학과장과 이사를 거쳐 1947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학과 과장 겸 부속병원 원장을 맡았다. 이어 1949년 안국동에 덕수병원을 개업하였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급성외과질환시의 균혈증(菌血症)에 관한 연구」 외 8편의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망우리공원 오긍선 세브란스 의전 2대 교장의 아들인 오한영 박사에 이어 1957년 제3대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었다. 오긍선 박사는 이승박 대통령의 배재학당 2년 후배로 제1공화국 제1대 사회부 장관을 부탁받았으나 거절했다.
손창환은 이때 여수에 적십자병원을 유치하였다. 현재 그 병원은 철수되고 없다. 그는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 보통학교 동창인 조종수 야구협회장에게 보사부장관기를 기증하기도 하였다. 여수 야구의 저변확대와 진흥에 힘썼다. 두 달간 쥐 2,700만 마리를 잡았고, 구서(쥐잡기) 성적이 우량한 도에 표창하였다는 신문 기사에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그동안 4~6대에 걸쳐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 손창환 보건사회부장관(3대 재임 1957.06.~1960.04.) 4.19 입원자 위문하였다는 사진이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이었던 김무성 집안의 혼맥은 정계, 재계, 법조계 등을 가히 지배세력 혼맥의 축소판이다. 손창환은 김무성의 5촌 조카의 장인이다.

하지만 1960년, 4.19혁명 이후 사임하고 연이어 부정선거의 공범으로 구속된 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정화법 대상자가 되었다. 1961년 12월 21일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된 내무부장관 최인규, 경무대 서장 곽영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 정치 깡패 임화수 등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6대 사건 73명에 대해 일괄 확인 조치를 발표하였다. 사형이 확정된 이들은 바로 그날 집행하여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은 선산으로 가고 다른 분은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때 손창환 보사부장관은 3년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금된 뒤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1962년 12월 24일 가석방되었다.

“1948년 73세 때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아버지였지만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시아버지는 여든세 살 때인 1958년 9월 27일 북한산에 올라가 문수사를 찾아서 ‘문수사’란 휘호를 쓸 정도로 건강했다. 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만 해도 시아버지는 병원과 의사의 신세를 졌던 일은 별로 기억이 없다.

다만 시아버지는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이화장에서 이기붕 씨의 소개로 당시 이화대학부속병원의 의사였던 손창환(3대 보사부장관) 박사를 알게 됐다. 손 박사는 이기붕 씨의 위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줬던 훌륭한 의사였다.

시아버지보다는 시어머니가 손 박사의 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1953년 11월 27일 대만 장개석 총통의 초청으로 시아버지가 자유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1954년 7월 25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시부모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80세가 다됐던 시아버지는 주치의 없이 공식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셨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혜로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이승만 박사 양며느리 조혜자 여사의 「프란체스카 여사의 살아온 이야기」 중에서)

정촌 손창환은 초대 대통령 주치의였다. 대한민국 대통령 주치의 제도가 정식으로 확정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초대 주치의는 망우리공원 지석영 의학원 초대 교장의 종손인 지홍창 의사였다. 지홍창 의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군의관 시절 인연으로 주치의를 맡았다고 알려졌다.

정촌 손창환 비문을 지은 분은 노산 이은상, 비문 앞면 제자를 쓴 분은 소전 손재형 그리고 비문 글씨를 쓴 분은 해관 손경식이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에서 비문을 읽다 보면 대한민국 서예사를 파악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 비문 제자인 ‘광개토왕비문체’만 2년여 쓰다 서예를 그만둔 또랑시인 망우리공원 비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찬찬히 소개한다.

비석에 찬(撰)이나 지(識)는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전(篆)은 서체의 하나인 전서체를 말하며 비석의 앞 큰 글씨 즉 제자(題字)를 쓴 분을 말한다. 그리고 서(書)는 비문의 글씨를 쓴 이를 말한다. 글을 새긴 석공의 이름은 없다.

망우리고개 동서로 즐비했던 석물 공장은 거의 다 사라졌다. 장의업 사무실은 몇 군데 남아 이장 및 합장 일로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묘지가 2만여 기에 이르러 상당히 많은 분들이 묘지에 관련해 일을 하며 생업을 꾸렸다. 현재 남아 있는 묘지가 7천여 기이다. 사설 묘지 관리하는 분들이 한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현재 생업으로 꾸려가는 분들이 30여 명이다. 그분들이 맡아 관리하는 묘지는 많게는 수백 기, 적게는 2~30기 정도이다. 1년 두 번 벌초 기준 한 기당 20만원 정도이다. 일하시는 분들과 대화 중에 받고 있는 가장 많은 비용은 40만원, 가장 적은 금액은 2만 5천원이었다.

또랑시인 묘지 관리인으로 등록된 서해 최학송 묘지 관리비는 10만원이다. 아무런 연고 없는데 세 번에 걸쳐 봉분을 단장하며 관리한다며 관리비를 반으로 깎아주었다.

현재 망우리공원 묘지 관리는 후손들의 몫이다. 손자나 증손자 대로 내려가 묘지 관리가 어려워 윤달이면 이장을 많이 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도 이장하는 비용을 대주며 권장을 하고 있다.

2021년 7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초대 과장 신은실)가 개설되어 올 1월부터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올 4월 개관하는 ‘중랑망우공간’이 사무는 물론이고 여러 일을 펼치리라 기대한다.

만해 한용운 묘비는 ‘만해사상연구회’에서 짓고 여초 김응현 서예가 글씨를 새겼다. 묘비 제자는 ‘광개토왕비문체’이다. 광개토왕 비문을 탁본해 일제가 왜곡한 사실을 밝힌 역사학자 이진희 선생의 부인인 재일한국인 에세이스트 오문자(동인지 《봉선화》 편집장) 선생이 2017년 9월 5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묘역을 답사하기 전 먼저 이중섭 화가와 한용운 선생 유택을 참배하며 ‘광개토왕비문체’를 금방 알아봤다. 묘비 앞면 ‘夫人兪氏在右’는 부인 유숙원씨 묘소가 만해의 유택 우측에 있다는 뜻이다.

여초의 제자인 황재국(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서예가는 망우리공원 최학송 문학비와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의 어머니 묘비를 썼다.

망우리공원 묘비에 새긴 서예가들은 대한민국 서예계를 잇는 대표 작가들이다. 소개하면 위창 오세창의 전(오촌 설태희, 소파 묘비 동심여선,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해강 김규진, 일본에서 서도라 일컫는 것을 서예라 명명한 소전 손재형의 전(위창 오세창, 도산 안창호 묘비, 정촌 손창환), 창애 김순동의 서(오촌 설태희 비문), 1937년 세운 추사 김정희의 묘비에 고예서체로 비문을 새긴 죽하 김승렬의 서(호암 문일평 묘갈), 윤희화(지석영), 석산 김흡(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일중 김충현(죽산 조봉암, 소천 강용율), 여초 김응현(위창 오세창, 만해 한용운), 원곡 김기승(도산 안창호, 장덕수 박은혜 부부, 오한영), 시암 배길기(김말봉, 김이석), 학남 정환섭(계산 김승민), 어천 최중길(남파 박찬익), 월정 정주상(소파 방정환), 원당 김제운(소아 김진성), 해관 손경식(정촌 손창환), 중관 황재국(서해 최학송 문학비, 김준엽 모친) 등이다.

이외도 신확(신경진 묘비), 박태유(신경진 신도비), 현봉학(막내동생 현요한), 해공 신익희(현포 이병홍), 소설가 송지영(시인 박인환), 이중섭의 친구이며 화가인 한묵(화가 이중섭), 차중락의 맏형 차중경(가수 차중락) 등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고 문일평 새 묘비는 아쉽게도 컴퓨터로 새겼다.

또한, 신완(신경진 묘비), 송시열(신경진 신도비),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연천 홍석주(명온공주 김현근 묘비), 위당 정인보(오촌 설태희, 호암 문일평 묘갈), 흥사단 단우 춘원 이광수(도산 안창호, 태허 유상규의 연보비), 조완구(남파 박찬익 옛 비문), 월탄 박종화(숙부인 양천허씨), 우월 김활란(장덕수 박은혜 부부), 노산 이은상(정촌 손창환), 흥사단 단우 주요한(오한영), 동탁 조지훈(남파 박찬익), 독립운동가 이현익(계산 김승민), 백낙운(지석영), 윤보선(행농 이영준) 목사 강신명(송암 서병호), 호수돈여고 은사 성천 유달영(이경숙), 소설가 송지영(박인환), 이규태(호암 문일평 비문), 중앙고 은사 이병도(국채표), 아동문학가 이재철(방정환), 조병화(가수 차중락 비석 시 ‘낙엽의 뜻’), 숙명여대 교수 김남조(임숙제), 음악평론가 한상우(채동선), 산림청 임업연구원 원장 조재명(아사카와 다쿠미 표지석), 우리문학기림회 곽근(최학송 문학비) 등 지은 글 즉 비문 및 문학비와 표지석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