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박동완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민족대표 33인 만주와 하와이 민족의 의식 북돋운 목사 및 교육자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1885.12.27.~1941.2.23.) 82주기
박동완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다. 박동완의 본적은 경기도 포천시 신읍리(일명 호병굴)이고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함양박씨 박형순의 차남으로 태어나 1941년 2월 23일 하와이에서 향년 56세로 선종했다.
근곡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관료 가문이었다. 아버지는 통훈감목관을 역임하였다. 통훈벼슬은 정3품 당하관의 품계로 문관·종친·의빈을 맡는 자리이다. 형 박동원(朴東元)은 1894년 식년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할아버지 박사규(朴思圭)는 광양현감을 지냈다. 근곡의 어릴 적 이름은 고봉(高峯)이고 다섯 살 때부터 집안에 독선생을 모셔 한문을 배웠다. 민족의식이 움트면서 자호를 근곡이라 지었다. 자호 근곡은 무궁화동산, 즉 삼천리 우리 강토를 상징한다.
1897년 12세 때 포천의 명문가인 현석운의 딸 현미리양과 결혼하였다. 10세 이전에 부친을 따라온 식구가 서울 종로구 누하동 214번지 통인오거리길로 이사하였다. 박동완은 한성 참선방 양사동에 세운 관립 양사동소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심상과에 입학 수업연한 3년 과정을 마치고 1894년 7월 황실의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고자 정부에서 세운 황실학교가 이듬해 관립 한성사범학교 부속학교로 개편되면서 관립고등소학교(현 교동초등학교)가 문을 열면서 입학하였다. 종로구 화동 한성중학교 1년을 마치고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3년을 수학한 후, 그는 1906년 1월 농상공부기수 6품으로 임용되었다. 첫 직장이었다.
그러나 치솟는 학구열로 1년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22세이던 1907년 다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박동완의 생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으며 비록 외국인이 세운 학당이지만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역사의식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배재학당은 처음 출발부터 "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운 배재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그것을 실천함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민족공동체와 인류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天國)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으로 건학이념과 목표를 삼았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일생의 목표와 방향이 정해지거나 달라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동완은 배재학당에서 '민족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하나같이 향후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다.
박동완은 배재학당 시절, 정동제일교회에 나가면서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 이필주 목사를 만났다. 이들은 1910년대 정동제일교회를 이끌었다. 뒤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이필주 목사와 기미년 독립선언에 서명하고 함께 옥고를 치뤘다. 현순·손정도 목사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었고 이후 박동완은 은밀히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동완은 23세이던 1908년 감리고 정동제일교회 장로목사 존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배재학당 대학부가 폐쇄되면서 1913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2년간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1915부터 1928년 하와이로 망명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에만 출석하며 본처 전도사로 근무하며 《기독신보)》 창간에 참여하여 창간사를 썼고 3ㆍ1혁명에 참여하기 전, 그러니까 국치 이후 10여 년 동안 《기독신보》사 편집위원 및 서기와 실질적 주필과 편집인으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당시 《기독신보》는 일제강점기 초기 한국인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민족 언론이었다. 그는 같은 매체에 동일 명의로 쓰기 어려울 때이면 근(槿)·근생(槿生)·근곡생(槿谷生)·ㅂ ㄷ ㅇ 싱·ㅂ ㅅ·ㅂ ㄷ ㅇ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무궁화를 아끼는 마음은 필명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청년》, 《별건곤》 등 일제의 간섭이 극심한 매체에 시, 시조, 산문, 감상록 등의 문학작품과 취재기사 및 사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박동완이 젊은 나이 33세에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닌 처지에서 자진하여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것은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위상 때문이었다. 언론인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이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은 16명이다. 그 16명의 기독교인의 구성은 장로교인 7명, 감리교인 9명의 비례로 되어 있다. 그중에 YMCA 관계 인사는 9명이다. 즉 정춘수·최성모·오화영·박희도·박동완·이필주·양전백·이승훈 등 9명이다. 이 9명의 관계 인사들을 다시 분석하면, 박희도는 그 당시 YMCA회우부 간사인 동시에 학생 책임자였으며, 이필주는 본래 구한국 정부 때 군인으로서 초창기 YMCA 체육부 간사였으며, 오화영은 YMCA이사 종교부 위원장이었으며, 정춘수·최성모 양 씨는 YMCA이사 종교부 위원장이었으며, 정춘수·최성모 양 씨는 YMCA이사 위원을 거쳐 일요 강화·학생 하령회의 명강사였으며, 이갑성·박동완 양씨도 YMCA에 무시로 드나드는 열성 회원 또는 위원이었으며, 양전백은 선천신성학교 창설자로서 그 학교 학생 기독교청년회의 창시자 특히 전국 학생 하령회의 명강사였으며, 이승훈 역시 오산학교 창설자로서 그 학교 학생 기독교청년회의 창시자이며, 특히 그 학교를 창설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서울YMCA의 박승봉, 이상재와는 오래 전부터 동지 관계에 있었다.
그는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던 1919년 2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로부터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찬동하였다. 천도교 측은 이미 손병희 등 15인이 선정되었고, 기독교 측은 2월 27일 이승훈의 주도로 박희도·이갑성·오화영·최성모·이필주·함태영·김창준·신석구·박동완 등 10인이 정동제일교회 이필주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 중 함태영은 서명자들이 구속될 것에 대비,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제외하고, 신흥식· 양전백·이명룡·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등 7인을 다시 교섭하여 모두 16인의 민족대표가 선정되었다. 박동완이 35세로 세 번째 연소자였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일부터 각지의 승려들에게 독립선언 준비 사실을 극비리에 알리면서 서명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나 해인사의 백용성만이 서명했을 뿐이었다.
유림측은 향리 성주에 있는 김창숙에게 전갈이 갔으나 마침 모친의 병환으로 2월 27일경 상경했을 때는 서명자가 이미 결정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에 들어감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겼다. 김창숙은 이후 유림을 동원하여
<파리장서> 등 별도의 독립운동을 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 중 박동완 등 29명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였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국치 9년만에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길선주ㆍ유여대ㆍ정춘수 3인은 지방에서 서울에 늦게 도착해서 이날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하고 서명자 외에 함태영이 참석했다.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일경에 끌려간 민족대표들은 즉시 남산 왜성대의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지방에서 뒤늦게 상경한 길선주ㆍ유여대ㆍ정춘수 세 사람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했다. 33인의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김병조는 독립운동의 경위를 해외에 알리기 위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구속자에서 제외되었다.
태화관은 중국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으로, 한때 이완용이 살았던 집을 수리하여 음식점으로 변용한 곳이다. 이곳은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늑약을 밀의하던 장소이며, 1907년 7월 17일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그리고 매국노들의 병탄조약 준비도 바로 이 집에서 모의 되었던 얄궂은 장소이다.
태화관의 비극적인 운명은 계속되어서 3ㆍ1 독립선언 후인 5월 23일 새벽 원인모를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그해 6월 28일 밤 소실된 것과 함께 3ㆍ1 항쟁과 관련된 두 곳의 역사적인 장소가 일제의 흉계로 회진되고 만 것이다.
천도교의 독립선언 3대원칙은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이었다. 이 뜻은 최남선에게도 전달돼 독립선언서의 기본원칙으로 삼아 작성하였다.
독립운동사 연구 일각에서는 '비폭력 방법'과 관련 '투항주의적' 등 여러 가지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피면 비폭력주의를 내세울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 주둔 일본 정규군 2만3천여 명, 일제 헌병경찰 1만3천3백80명, 조선총독부 관리 2만1천3백12명, 34만 명의 일본인 이주민 중 무장 일본이주민 2만3천3백84명 등 약 8만1천76명이 있었다. 일제는 이밖에도 언제든지 한국에 증파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완벽하게 통치하고자 전국에 수 천개의 일본군주둔소와 헌병ㆍ경찰관주재소와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을 거미줄 같이 늘어놓아 총검으로 식민지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주석 5)
일제는 1907년 9월 3일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총기 소지나 운반을 철저히 탄압하고, 병탄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인은 철저히 무장해제된 상태이어서 산짐승이 날뛰어도 이를 처치할 총기 하나도 없었다. 박은식은 이를 두고 "한국인은 일제의 탄압으로 '촌철(寸鐵)'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개된 시위 상황을(박은식의 <한국통사>)보면 다음과 같다.
집회 총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 불탄 교회당 47동, 불탄 학교 2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일제는 이보다 훨씬 축소하여 통계를 조작하였다.
3ㆍ1독립시위는 국내 뿐만 아니었다. 한인이 모여사는 해외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본토 여러 지역, 러시아 연해주, 미주ㆍ하와이, 일본 등지에 살던 교포들이 참여하였다.
기미년 만세시위는 어느날 갑자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거사가 아니었다. 동학혁명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의병투쟁ㆍ신민회 등 국내의 민족운동과 1917년 7월 해외독립운동가 14인의 '대동단결선언', 1919년 초 해외독립운동가 39인의 '대한독립선언', 같은 무렵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국내 파견,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 그리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역사의 맥락과 조직 그리고 국제환경을 포착하여 이루어진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역사는 정명(正名)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동학난→동학혁명, 4ㆍ19의거→4ㆍ19혁명,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이 사례이다. 기미년 민족적인 항쟁을 일제는 폭동·소우 등으로 깎아내렸지만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 대혁명 등으로 부르고 중국의 신문 잡지도 그렇게 썼다.
제헌국회가 헌법초안을 만들 때 한민당 계열 일부 의원들이 초안의 3ㆍ1혁명을 이승만 국회의장에게 '과격용어'라 주장, 받아들여서 오늘에 이른다. 청교도혁명, 프랑스대혁명, 신해혁명, 러시아혁명 등 외국의 변혁운동은 혁명이라 부르고, 심지어 4차산업혁명, 1968년 5월 프랑스 등 유럽의 시위에는 68혁명이라 호칭한다. 3.1운동이 아닌 혁명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경찰 취조와 재판과정에서 그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연행 당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 때 일본인 순사가 '일본의 시정이 싫어서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일본의 정치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답했다. 또 5월 2일 열린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재판장이 '정치에 대해 불평불만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 불평도 없지만 단지 민족자결이라는 것이 제창되었으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고 답했다.
그러나 3월 18일 취조 때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히 '물론 그렇다'고 답했다. 8월 26일 고등법원 재판 때는 민족자결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동완 가족의 궁핍이 이어졌다. 가장이 투옥되고 얼마 후 부인은 이제껏 살았던 경성부 누하동 214번지에서 종로구 체부동 121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생활비를 줄이고자 더 작은 집으로 옮긴 것이다.
근곡은 1921년 11월 4일 마포경성감옥 출옥 후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신간회 상임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만기 석방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서 남궁억은 1912년 배화학당 교사 시절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여 무궁화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한반도를 우리나라의 13도를 상징하는 무궁화 13송이와 백두대간을 상징하는 무궁화 가지를 수놓은 것이다. 울릉도와 제주도는 무궁화 꽃잎으로 수놓았다. 남궁억은 가사시간에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는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하는 길이 생활 속의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56년 망우리공원에 묻힌 함이영 작곡가의 동요 <우리나라 꽃>이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무궁화 보급 및 국화에 대한 의미를 널리 알렸다.
선생은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감된 뒤 일제의 감시와 협박, 회유를 견디면서 1923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여름 국내 최초로 여름성경학교 개최(정동제일교회 기록상 최초의 주일학교장)하였다. 1924년 국내 유일의 민족자본 창문사의 잡지『신생명』주간을 맡았다. 1025년 4월 3일 《신생명》 폐간 이후 10년간 절필했다.
1927년 '민족반일당 민족협동전선'의 기치 아래 발족한 신간회 창립과 초창기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는 최대 민족운동의 대표적 단체로 강령에서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ㆍ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이라고 내세울 만큼 국내에서 공공연히 항일투쟁을 표방한 단체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합법적인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를 창립했다.
처음에는 신한회(新韓會)라는 명칭을 썼으나 등록과정에서 총독부가 한(韓) 자 표기를 거부하여 같은 뜻의 간(幹) 자를 쓰게 되었다. 박동완은 여기에 참여하여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7년 신간회 본부 발기인 및 상임 총무간사, 주요 지회(개성, 광주, 평양) 설립시 본부 대표, 경성지회 정기대회 임시집행부 부의장 및 전형위원 등을 맡았다.
1920년대 후반기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이에 연합 또는 통합하라는 국민의 여론이 빗발치는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존속기간은 4년여에 불과했으나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와 해외지회를 두었으며, 회원수만 2만~4만여 명에 이르렀다.
민족운동 대표기관의 설립이라는 연례의 염원과 모색은 드디어 결실할 날이 왔다.
1927년 1월 돌연히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신간회' 조직계획이 발표되고, 동년 2월 15일 그 창립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ㆍ사회 양주의자가 제휴한 공동전선이었고, 합법적인 결사운동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감행하는 민족운동의 대표적 단체였다.(조지훈, <한국민족운동사>)
신간회 발기인은 34명이었다. 홍명희ㆍ안재홍ㆍ신석우 등이 주도하고 기독교의 박동완, 불교의 한용운, 유교의 최익환, 천도교의 권동진, 여기에 중국 베이징에 있던 신채호도 홍명희의 서신 연락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는 이상재가 선임되었다.
다음은 신간회 발기인 명단이다.
신간회 발기인
권동진ㆍ김명동ㆍ김준연ㆍ김탁ㆍ문일평ㆍ박동완ㆍ박내홍ㆍ백관수ㆍ신석우ㆍ신채호ㆍ안재홍ㆍ유억겸ㆍ이갑성ㆍ이관용ㆍ이상재ㆍ이순탁ㆍ이승복ㆍ이승훈ㆍ이정ㆍ이정섭ㆍ이종린ㆍ이종목ㆍ장길상ㆍ장지영ㆍ정재룡ㆍ정태석ㆍ조만식ㆍ최신익ㆍ최원순ㆍ한기악ㆍ한용운ㆍ한원건ㆍ홍명희(가나다순)
신간회는 1927년 1월 19일 발기인 대회에서 3대 강령을 채택했다.
신간회 강령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1927년 12월,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백만 재만동포들이 중국 관헌들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만주군벌과 일제의 2중탄압으로 박해받는 일이 벌어지자 각 사회단체의 주요인사들이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설립하였는데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근곡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썼던 육당 최남선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면서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하고, 1925년에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되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에 동참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곡의 동서였다. 그는 이어 신간회 활동이 총독부의 탄압과 내부갈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언론활동·신앙운동 역시 극심한 압제의 대상이 되자 40이 넘은 나이에 망명길에 오른다. 1928년 8월 25일 경성역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여 선편으로 45일이 지난 10월 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떠난 길이다. 미주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다.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고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하와이는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제3의 독립운동 전진기지가 되었다. 3ㆍ1혁명에 이어 신간회운동 등 국내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해외 한인의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하와이에서 활동하다 1931년 6월 4일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하였다. 3년여 만이다.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고, 병세가 깊어져서 쉬고 싶고, 더불어 고국산천과 동포ㆍ동지들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속내와는 상관없이 오랜만에 만난 동지들은 여기저기서 불러냈다. 강연 요청이었다. YMCA(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재류 재국동포의 근황>이란 연재로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목요강좌와 일요강좌를 잇따라 맡았다. 주제는 <재국조선인의 신앙생활>등이었다.
국내에서 소속이었던 정동교회의 일요강좌도 하였는데, 주제는 <인생생활의 3요소>였다. 이런 일정이 국내 신문에 빠짐없이 보도되면서 그의 일정은 더욱 바빠졌다. 자신이 주필로 일했던 <기독신보>에는 1931년 6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하와이는 낙원이란다>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다.
연재한 글에서는 하와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단체 등도 비교적 소상히 전하였다. 연재 마무리 부문에서 한인 2세들이 우리말과 글을 모르는 것을 안타까와하면서 동포들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글에는 이런 내용도 담겼다.
"조선 사람의 피를 가지고 조선 말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박동완의 이같은 헌신이 바탕이 되어 와히아와 교회 출신 중에 의사와 변호사, 판사가 많이 배출되고, 하와이주 대법원장까지 나왔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뉘어 분열상이 심화되자 이를 통합하고 치유하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미처 해방을 맞기 전 1941년에 이역에서 56세에 소천한다.
그의 유해는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1941년 4월 우편물 취급으로 고국에 돌아와 3.1혁명 동지인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6년 5월 18일 묘소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하단 23번으로 안장됐다.
3.1혁명 이후로 그는 한복을 입었으나 바지에 대님을 매지 않았다.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는 대님을 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평소 시계를 항상 30분을 늦춰 놓았다. 이는 일제가 정한 표준시각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신념의 표시였다고 한다. 그는 비타협적 자세로 민족 구원의 외길을 걸은 종교인, 언론인이자 불굴의 독립지사였다.
3.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해인 2019년 박동완의 손자인 정신과 의사이며 목사 박재상(서울중앙의원 원장, 참빛침례교회 목사)과 그의 아내 임미선은 부부 목사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정한책방) 책을 펴내 조부의 뜻을 계승하는데 힘 쓰고 있다. 또한 2022년 8.15 광복절에 맞춰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상웅 선생은 『근곡 박동완 평전』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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