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우월 김활란
이화학당 대학부 제1회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 1899.1.18.~1970.2.10.) 52주기
우월 김활란은 1899년 1월 18일 아버지 김진연 어머니 박도라 사이
3남 5녀 막내로 인천시 동구 창영동 배다리마을에서 출생하여
1970년 2월 10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85번지 1번지 자택에서
과로와 당뇨병·뇌출혈·심장질환·부정맥 등의 합병증으로 선종했다.
생전의 유언에 따라 한국 최초로 장례식을 음악회로 대신했으며,
현재 망우본동 ‘중랑숲리가아파트’ 단지인 망우리 ‘금란동산’에 안장됐다 이장하여
가평 이화여자대학 수목원에 이화학당 금란지교 우정의 이정애와 나란히 잠들었다.
우월은 사망 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일생동안 관련된 단체가 50여개로 활동이 쉼 없었다.
저서로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1965) 등이 있다.
초명은 '기득(己得)', 아호는 우월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모친의 영향으로 7세 때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학교에 입학하며 쓰기 시작한 이름 '활란(活蘭)'은 세례명인 ‘헬렌(Helen)’을 한자어로 가차했다.
외국에서는 그의 세례명이자 영문명인 ‘헬렌 킴(Hellen Kim)’으로 널리 알려졌다.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이었다.
부친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중농으로 개항 후 제물포로 이주해 창고업자였다.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하였다. 1908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서울로 이사해 이화학당에서 초등·중등·고등과를 졸업했다.
1916년 입학한 이화학당 대학부 시절 제3대 메이퀸으로 뽑혔다.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 제1회로 졸업해,
바로 이화학당 고등보통과 영어 교사가 되었으며,
재직 중인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0년 6월 7일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감리교회를 전파했다.
1922년 3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발기인으로, 1923년 일시 귀국하여 김필례·유각경 등과 함께 각지의 여자기독교청년회 대표들을 모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1922년 조선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치(H. Welch)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교에 편입, 철학·교육학·웅변학 등을 공부했다.
1924년 6월 졸업, 10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 1925년 6월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바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겸 학감이 되어,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융희황제)가 붕어하자, 이화학당의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전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학당의 전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해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望哭)을 하게 하였다.
1927년 2월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 여성대표 간사로 참석했으며, 5월 근우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앞과 뒤에 중국 베이징, 워싱턴, 하와이, 예루살렘, 캔자스시, 애틀랜타시 등 각종 회의에 조선 기독교 단체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 중 "무지와 구습의 타파"를 이유로 공개 트레머리를 잘라 버린 최초의 단발머리 여성,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으로 상징되는 그를 신문화, 신교육, 신여성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1930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철학연구과에 입학, 1931년 10월 학위논문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1년 12월 12일 귀국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전 학감 및 부교장직도 겸했다.
1931년 6월에는 덴마크인의 경제부흥에 관한 「정말인(丁抹人)」의 경제부흥론'을 저술하였다.
1932년 3월 월간지 《여론(女論)》을 창간했다. 잡지《여론》의 창간 취지로 그는 '여성이여 어서 앞으로 나가자!'라고 하였고, 《여론》지는 주로 기독교 관련 여성의 입장, 혹은 여성의 정치적 견해 등이 실렸다.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 여성의 발언이 실리게 되었다.
한편 브나로드 운동에도 동참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그는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자립, 봉건적 인습 타파, 의복개량 등을 지원하였다. 농한기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각 지방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 교회에 다닐 것을 권고하는 전도 강연을 열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가지 재정적 문제로 곤란을 겪던 안산 샘골의 농촌아동교육시설과 여성학교의 교사로 봉사하던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의 모델이던 최용신 등을 재정적, 정신적, 금전적으로 지원하여 시설을 구비하도록 도와주었다. 한편으로 YWCA 여성 기독교 청년회의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직접 회원 모집과 기독교 선교 사업에 직접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하였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서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서 적십자사 일을 보았고 이어서 공보처장직을 수행하였다. 언론인으로는 영자(英字)신문사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을 맡았다.
1961년 9월 30일 김옥길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는데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여학사협회,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김활란 전도협회를 조직하여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64년 10월 16일 한국복음화운동의 기틀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어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년 동안 추진했다. 이것은 1968년의 새시대 복음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5월 미국 웨스팅 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의 교육 부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당시 김활란은 이화여전 학감 및 부교장이었다. 일제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차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간사를 맡았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1930∼40년대 《매일신보》, 《동양지광》, 《조광》, 《반도의 빛》, 《대동아》, 《신시대》 등의 각종 언론에 수많은 글을 남겼다.
1941년 창씨개명 때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으로 개명하고, 임전대책협력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이 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조선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결전 부인대회'를 개최했다. 연사로는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임숙재 등이었다. 이후 그는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 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등 교육 분야에 4.5쪽에 걸쳐 등재되었다.
김활란에 대해 악덕 친일여성 독재정권 앞장이, 이화를 위한 순교인가? 입신을 위한 친일인가?, 이화여대의 대부, 나 이대나온 여자야? 김활란 친일!, 김활란 아마기 가쓰란-변절자 등의 블로그 제목을 찾을 수 있다.
이화여대 학생모임 ‘이구동성’은 "김활란 초대 총장은 그동안 '여성박사 1호', '여성운동의 선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화여대 교정에 김활란의 동상을 철거하는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인물 중에 김활란 박사와 관련 있는 분은
이화학당 고등부 동기생으로 간호사 최초 유학생 서구식 간호사 1호이며 이화여전 간호학과 초대과장 이정애와 금란지교 우정을 나눴다. 이정애가 병사하자 망우리 금란동산에 묘지를 쓰고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현재의 금란교회 초석들 다졌다.
애국부인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여성운동 단체의 효시이자 최초의 독립운동 여성단체 근우회 대표 김활란은 애를 업은 박원희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태원무연분묘합장묘 및 비의 유관순 열사를 한국의 잔 다르크로 만들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 알리는 데 일조하였다. 자신과 학교 친일 문제를 상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와 3.1만세운동 전날 밤 이화학당 고등부 같은 반 학생들의 6인결사대 결성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분옥 여사도 이화여전 가사과 개설을 하였으나, 김활란 박사와 함께 한 교육 및 강연 등 친일행위로 ‘경찰의 인물’에 선정되지 못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김동명 시인은 까칠한 성격으로 예외로 남달랐다. 이화여자대학교 관련 김활란 박마리아 모윤숙 김상용 노천명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한국 최초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 초대 사장이자 부산 임시수도 전시대학 필승각에서 김활란 생일잔치 게장 먹고 식중독으로 운명하여 망우리공원에 묘지를 이장하여 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김상용 시인
4.19혁명의 도화선 이기붕의 부인이자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인 박마리아의 '이수회'
이화여전 후배로 이화여전 총장을 이어받기를 원했고 장덕수의 부인인 박은혜 망우리공원 부부 비문을 지었다.
3.15부정선거 여성계 대표 김활란 김말봉 두 분이 선거운동에 나섰다. 김활란 박사는 이화여대 배경으로 비판을 적게 받고 상대적으로 김말봉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해 애를 먹었다.
망우본동 이화여자대학교 병설미디어등학교, 영란여자중학교, 서울동원초등학교, 중랑숲리가아파트, 금란교회 등 이 일대가 금란동산에 포함되었다.
또랑시인 40년 모은 책을 집어넣은 방 한 칸도 금란동산이었다
특히 중랑숲리가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 부부싸움이 없어졌다고 두 번에 걸쳐 함께 답사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정도 풍수상 자리가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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