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스크랩] 그.립.습.니.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182 조운 曺雲(1900. 6. 26 ~ ), 서해 최학송 (1901~1932)

정종배 2018. 2. 26. 11:01

조운

요약 테이블
출생 전남 영광 ∼, 1900. 6. 26
사망?

요약 북한의 시인.

[개설]

 

본명은 조주현(曺柱鉉), 자(字)는 중빈(重彬).

 전라남도 영광(靈光) 출신. 소설가 최학송(崔鶴松)은 그의 매부이다.

 

18세가 되던 해에 뒤늦게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 목포상업학교 (지금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졸업했다.

1921년에는 중등학교 과정인 사립 영광학원에서 박화성(朴花城)과 함께 미술·작문 교사로 재직했다.

시조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자유예원 自由藝苑〉이라는 향토문예지를 발행했고, 시조 동우회인 추인회를 결성하여 매월 시조짓기대회를 가졌으며, 이병기(李秉岐)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열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주로 고향에 거주하면서 향토문화진흥에 힘을 썼다.

1922년 〈동아일보〉 독자란에 시 〈불살라주오〉를 처음 발표했으며, 1924년 11월 〈조선문단〉에 〈초승이 재 넘을 때〉 등 자유시 3편을 발표함으로써 공식 등단했다.

이후 1940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편을 꾸준하게 발표한 조운은 1920년대 중반 국민문학파에 의해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30년대 중엽에는 영광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갑술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른바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반 정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영광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47년에 가족과 상경하여 동국대학교에 출강하며 시조론을 강의했고, 이 무렵 유일한 시조집인 〈조운 시조집〉을 출간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가족과 함께 월북하여 황해도 대표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박태원과 함께 〈조선구전민요집〉과 〈조선창극집〉을 출간했으며 〈인민시인 신재효〉(1957), 〈아브로라의 포성〉(1957), 〈평양판관〉(1958)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단아한 정조가 돋보이며 시어를 섬세하게 조탁하여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담아냈다.   / Daum 백과사전



조운  曺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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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시대 근대
유형 인물
출생1898년
사망 미상
직업 시조시인
경력 영광중학교 교사
작품/저서 불살너주오, 초승달이 재 넘을 때, 조운시조집
성별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1898∼? 시조시인.

              

[생애와 활동사항]

1921년≪동아일보≫에 첫 작품 <불살너주오>를 발표하였다,

그뒤 1924년부터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위시하여 많은 시조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3년 영광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미술과 작문과목을 가르쳤으며, 8·15광복이 되자 조선문학가동맹 시분과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6·25를 전후해서 월북하였다.

 

작품집으로는 1947년 5월조선사(朝鮮社)에서 간행된 ≪조운시조집 曺雲時調集≫이 있다.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하였던 시조작가로, 최남선(崔南善) 이후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시조부흥운동의 후반기에 활약하였다.

 

그는 월북하기 전까지 줄곧 향리 영광에 살면서 중앙문단과 폭넓은 교분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작세계의 일관된 주제가 민족주의적인 이상과 연결되어 있음은 그가 시조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조에는 ‘조선혼(朝鮮魂)’이 깃들여 있다는 그의 주장과 초기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님’의 함의성(含意性), 곧 우리 언어가 가지는 민족적 감정이 수렴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신문학사조사』-현대편-(백철, 백양당, 1949)
  • 「운·조주현 시인론」(한춘섭, 『시조문학』, 1977.6.)
  • 「조운의 시세계」(김춘섭, 『금호문화』, 1988.9.) 

제공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664~675) [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6] 이념의 벽 앞에 잊힌 문인 함세덕·최학송 “인생은 운명의 장기판, 삶은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일” 연극 및 영화 ‘동승’의...

 

최서해崔曙海

요약 테이블
출생1901. 1. 21, 함북 성진
사망1932. 7. 9, 서울
국적 한국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빈궁소설을 주로 썼다.

본명은 학송. 일명 서해(曙海)·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 이명은 저곡(苧谷).

극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1911년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5학년 때 중퇴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방랑하며 하층민의 생활을 했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 〈우후정원(雨後庭園)의 월광(月光)〉·〈추교(秋郊)의 모색〉·〈반도청년에게〉를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이어 시 〈춘교(春郊)에서〉·〈자신 自信〉 등을 발표했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 吐血〉을 연재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같은 해 10월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입사하여 이 잡지에 간도 체험을 생생하게 그린 〈십삼원 拾參圓〉(1925. 2)·〈탈출기〉(1925. 3)·〈살려는 사람들〉(1925. 4) 등을 발표했다.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1929년까지 활동했으며, 1926년 KAPF 맹원이자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재혼했다.

 

현대평론〉·〈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 제공처  Daum 백과사전




[문화기획]
빈궁소설의 대가...서해 최학송 83주기 추모식 열려
망우리사색공원, 31세에 요절한 소설가...무연고 유족 대신 기념사업회가 기려
[문화=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기자  2015/07/10 [07:35] ⓒ 경기인터넷뉴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曙海=아침바다) 최학송 서거 83주기를 맞아 지난 8일 오후 망우리공원 유택(幽宅)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 추모식은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동국대 명예교수)가 주최하고, (사)중랑문화연구소(이사장 남화창)가 주관했으며,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명이 함께했다.
▲지난 8일 오후 망루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역에서 거행한 서거 83주기 추모식 © 경기인터넷뉴스

서해의 묘역은 정종배 시인과 동국대 곽근 교수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었다.

이듬해 우리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으며, 정종배 시인은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으며, 올해 처음으로 대외적인 추모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서해의 출생과 성장기 (1901~1917)

서해 최학송은 1901년에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소작농이다

혹은 작은 한약방을 했다는 등으로 알려졌으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의 가정사마저도 불확실하며, 다만 생모가 김소사 혹은 김능생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해 최학송의 문학비 © 경기인터넷뉴스

 


서해의 아명은 저곡이며 설봉, 설봉산인, 풍년이란 호도 쓴 적이 있다.

그의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이며, 어린시절 부친과 서당을 통해 한문 공부를 한 정도다.

5세에는 함경북도 숙부의 집에서 한동안 기거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간도로 떠나고 그 후 서해는 나무를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죽도록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치는 일을 했다.

15세부터 시장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를 구해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특히 춘원(이광수)을 존경해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그의 글재주를 예지했다.

-서해의 간도생활 (1910~1922)

1918년에 간도로 가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한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간도로 가기 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했다.

그는 부두 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 말단생활을 전전했으며, 이것이 후에 그의 소설에서 빈궁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21년 서간도에서 세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첫딸 백금이 태어났다.

서해가 간도로 온 후 같이 생활한 부친이 첫 딸 출생 1년 후 집을 나간다.

서해는 1918년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가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귀국 후의 생활 (1923~1924)

▲ 서헤 최학송 © 경기인터넷뉴스

 

1923년 봄. 간도에서 나와 국경지대인 회령에서 잡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시기가 그의 문학의 바탕이 됐으며, 비로서 '서해’의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생활이 일정치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경성, 성진을 떠돌다가 1924년 10월에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약 3개월 정도 불목하니로 기거하면서 그의 대표작 “탈출기”를 여기서 퇴고했으며, 일본어로 발간한 된 서구문학에 빠졌다.

그 해 11월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했다.

봉선사 주지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의 집으로 갔다가 상경했다.

이때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왕성한 작품 활동 (1925~1931)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자, “십 삼원, 탈출기,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므로 중견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 소설가 최서해(오른쪽)와 시조시인 조운(왼쪽) © 경기인터넷뉴스
이해 4월 6~13일 “향수를” 동아일보에, 6월 29일 “방황”을 시대일보에 “기아”를 여명에, “큰물이 진 뒤” 를 개벽에 연이어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시기에 첫 딸 백금이 병사했다.

 

그 후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6년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했다.

그 해 4월에는 시조시인 조운의 누이 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네 번째 혼인을 하고 명륜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6월에는 조선문단이 휴간되어, 현대평론 문예란 기자로 취업했으며,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다.

1927년 1월 장남 백이 출생했으며, 같은 달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으며,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했다.

1931년,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부친이 찾아오지만 몇 달 만에 다시 간도로 떠난다.

-기생들의 잡지 “장한” ...살기 위해 관여(1927)

1927년 서해는 대표작 “홍염”을 조선문단에 발표하고, 이 출판사의 편집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됐으나 4월에 다시 실직한다.

목구멍이 포도청, 서해는 1927년 1월 10일. 먹거 살기위해 기생들이 펴낸 잡지 "장한"에 관여한다.

이책의 편집·발행인은 김보패, 인쇄인은 노기정, 인쇄소는 한성도서며 발행소는 ‘장한사(長恨社)’다.

흥미를 더하는 것은 장한사의 주소가 ‘서울 관수(觀水)동 14-1’로, 당시 대표적 요리집이었던 ‘국일관’의 주소와 일치한다.

이는 국일관에서 자본을 대고, 발행인 김보패는 가명이거나 필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11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의 가격은 40전, 필진은 대부분 당시 이름을 떨쳤던 유명 기생이다.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한 여인이자 훗날 여류 판소리의 대가가 된 명창 박녹주(朴綠珠)는 물론 김월선(金月仙), 윤옥향(尹玉香), 김남수(金南洙), 백홍황(白紅黃) 등 소개된 40여 편의 글 대부분이 현직 기생들의 작품을 수록했다.

중견작가의 반열에 있으면서 가난을 늘 달고 다니던 서해에게는 장한의 출판은 흥미로웠고, 주머니 사정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라 편집 일을 맡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사들과 대중은 장한을 기생들이 낸 '도색 잡지'로 치부하고, 편집장이었던 궁핍한 서해는 지식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당시 사회의 핫-이슈였던 이 책은 2회 분을 발행하고 폐간된다.

-서해의 사망과 그 후

1932년부터 위문협착증으로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한 뒤, 7월 의전병원으로 옮겨 대수술을 받았으나 과다한 출혈로 수술 이틀 만에 31세로 사망했다.

 

그 후 23일에는 서울 백합원에서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가 결성됐다.

1933년에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추도식이 열었으며, 이듬 해 6월 미아리의 묘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 후 묘지는 1958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돼 오늘에 이른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도 않는다

그의 문학적 가치는 스스로 자평한 1925년 2월 24일자 일기를 살피면 서해의 문학적 고집을 알 수 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련다.

 

나에게는 고민이 있다.

내가 어째 글을 쓰며 쓰려고 하는가?

내 글이 과연 많은 노동자, 인쇄 직공의 수고를 빌려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 가.

있다 하면 있거니와 없다 하면 나는 백일청천(白日晴天)에 낯을 못 들 죄인이다.

죄인 되기를 누가 원하랴.

나는 양심의 부끄럽지 아니한 글을 쓰련다.

나는 나의 사사로운 감정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경험 없는 것은 쓰지 아니하련다."

그는 빈궁했던 자신의 경험을 글로 표현했으며, 우리나라 문단에 "빈궁문학" 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으며, 31년의 짧은 삶, 8년간 작가로서 6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망우리공원은 내일 인문학의 보고

서해 최학송의 83주기를 살피면서, 망우리공원의 9천여기 무덤 속으로 눈을 돌린다.

근현대의 파란만장했던, 1백여 년 세월을 함께한 문인, 사상가, 예술가, 독립운동가. 의사(醫師) 등 50여 명이 누워있으며, 그들이 지닌 인문학적 가치도 함께 품고 있다.

▲ 망우리공원 묻힌 근혀대 인물들...미래 인문학의 보고 © 경기인터넷뉴스

 


망우리공원 묻힌 문인은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 .

통속소설의 대모 김말봉,

“그냥 웃지요” 시인 김상용,

혼란했던 시기 남북작가 교류에 있어서 가교(架橋)였던 김이석

소설가, 영원한 “목마와 숙녀” 박인환,

어린이의 벗 방정환,

아동문학가이나 우리나라 수필문학 싹을 틔운 수필문학잡지 “박문”을 출판했던 최신복(영주),

“님의 침묵” 한용운,

명연극 “동승”을 창작한 함세덕 극작가 등의 무덤 앞의 비석이 값진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소설가 최서해(崔曙海.최학송.1901.1.21∼1932.7.9)

 

 

소설가. 본명 학송(鶴松), 서해는 호. 함북 성진(城津) 출생.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각지로 전전하며 품팔이ㆍ나무장수ㆍ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뼈저리게 체험, 그 귀중한 체험이 그의 문학의 바탕을 이루었다.

 

1924년 단편 <고국(故國)>이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 계속 <탈출기(脫出記)> <기아와 살육(殺戮)>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문학(新傾向派文學)의 기수로서 각광을 받았다.

 

특히 <탈출기>는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부부와 노모, 이 세 식구의 눈물겨운 참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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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兒名)은 저곡(苧谷).

함북 성진에서 한방의(漢方醫)의 외아들로 출생. 성진보통학교를 중퇴. 부친의 가출(家出)로 유년시절을 모친과 함께 궁핍하게 보내다가 1917년 간도(間島)로 이주, 나무바리장수, 두부장수, 노동판의 십장 등을 지내며, 유랑, 한때는 절망한 나머지 아편 중독에 걸린 일도 있었다.

1923년 귀국하여 이듬해 홍수로 가산(家産)마저 잃게 되자 가족을 해산, 상경했다.

 

그의 문학활동은 15세 때 [학지광(學之光)]에 투고한 산문시가 게재되고, 1923년 서해(曙海)라는 이름으로 시 <자신>을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에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고국(故國)>이 추천되면서부터였다.

 

이 해 이광수의 주선으로 양주(楊州) 봉선사(奉先寺)에 들어가 3개월간 승려생활을 하고,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 <십삼원>(1925) <탈출기>(1925) <박돌의 죽음>(1925) <기아와 살육>(1925) 등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신경향파의 유행작가로 각광을 받았다.

 

이들 일련의 작품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이른바 체험문학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장은 직설적이고 간결하며 박진력을 가지고 있다.

8년이라는 짧은 창작기간을 통해 발표한 30여 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몸소 체험한 것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탈출기>는 자전적 요소를 강하게 지닌 작품으로 꼽힌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갖지 않은 자’들이며, ‘가진 자’들에게 도전하는 반항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1925년 7월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의 발기인은 아니었으며, 스스로 프로문학을 한다고 자처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의 반항의 문학은 그의 생리였으며, 체험에서 나온 자연발생의 독자적 특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문단 진출은 이광수와 갚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후 3년간의 생활은 [조선문단] 최초의 발행인인 방인근(方仁根)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방인근의 집이자 잡지사인 [조선문단사]에서 방을 한 칸 얻어 살며 사원이자 작가가 된 그는, 그곳에서 김동인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접촉, 문단생활의 발판을 굳혔다.

 

[조선문단]이 경영난으로 휴간된 이후로는 여러 잡지사와 신문사를 전전,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방탕한 생활에 기울어 재차 발병, 악물 중독에 이르렀다.

 

1932년 3월 위문협착증으로 수술, 출혈이 심해 7월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사망했다.

【작품세계】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 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貧窮) 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ㆍ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 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自傳的) 사소설(私小說)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고 소름끼치는 암담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시】

<자신>(1923)

 

【소설】

<고국>(1924) <기아와 살육>(1925) *<탈출기>(1925.조선문단) <박돌(朴乭)의 죽음>(1925), <큰물 진 뒤>(1925) <폭군(暴君)>(1926) <의사(醫師)>(1926) (소살(笑殺)>(1926) *<홍염(紅焰)>(1927) <낙백불우(落魄不遇)>(1927)

 

【작품집】

<혈흔>(1926), <홍염>(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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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계-가난한 백성의 증언> - 김우종

 

최학송의 호는 서해(曙海), 아명은 저곡(苧谷)이다.

함북 성진에서 1901년에 태어나서 31세의 젊은 나이(1932년)에 요절할 때까지 그는 가난을 면치 못했었다.

 

성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의 가출로 유년 시절을 모친과 함께 궁핍하게 보내다가 1917년에 간도로 이주하여 그의 가난의 고통은 더욱 극한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해가 세상을 떠난 지 3주년이 되던 1935년 7월에 박상엽은 그의 소년 시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누님이 하나 있었는데 출가한 뒤 죽었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서해는 축복된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견묘(犬猫)의 사이와 같은 아버지의 미움과 어머니의 사랑 밑에서 자랐으니 어릴 때부터 음울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단편 소설 <박돌의 죽음>을 읽으면 돈밖에 모르고 인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한의가 나온다.

서해의 아버지도 한방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해가 몰인정한 이 한의의 심리를 폭로하기 위하여 <박돌의 죽음>을 쓴 동기는 이 소년 시절에 받았던 그의 아버지의 인상에 다소 원인되지 않았을는지…(중략)…

 

하여간 서해는 간도에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을 한 모양이다.--

어떤 때는 상투잡이가 되어 나뭇바리 장수도 하여 보고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뙤놈한테 붙들리어 죽을 고비도 넘겨 보고, 두부 장수도 하여 보고, 노동판에서 십장 노릇도 하여 보고, ××단에 따라다니노라고 총을 메고 눈 쌓인 얼음 벌판도 헤매이다가 총에 맞아 죽은 동지의 시체를 혼자서 얼음 벌판에서 밤을 세워 가며 지켜보기 등등--

 

이러한 실례를 보더라도 서해는 한 개의 '소설적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선문학’ 제4권 제4호 ‘서해의 극적 생활’에서)

 

이 같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서해야말로 한국적인 생활의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성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증언할 수 있는 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창조파', '폐허파', '백조파'들은 이런 생활을 대개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문학적 소재를 도시의 생활 주변이나 간접적인 체험에서만 얻었는데 반하여 서해의 빈궁은 직접적 체험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삶의 현장에 대한 산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문학이 그 이전의 예술 지상파들의 문학을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것 때문이다.

즉, 기존의 문학과 달리 유독 가난한 삶을 묘사했다는 데서가 아니라 그만큼 절실한 문제성의 토대 위에서 몸으로 부딪친 아픔을 실증하면서 작가로 출발했다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해가 이 같은 작품으로 문단에 나타난 것은 1924년이었다.

1917년에 간도로 이주했다가 1923년에 귀국하고, 홍수로 모든 가산을 잃어버린 후 가족을 버리고 상경하여 다음 해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어 작가로 출발한 것이다.

 

이 무렵에 그는 춘원에 소개로 양주 봉선사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그의 말에 의하면 '중놈들이 아니꼬와서 메다 꽂고' 나온 후 [조선문단]의 편집 심부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침식을 얻고, 여기서 원고를 써서 여기에 발표하고 추천 작가가 되었다.

이때는 방인근이 [조선문단] 10여 호 발간에 이미 파산의 궁경에 직면했던 때이니만큼 서해의 생활이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고국> <탈출기> <기아와 살육> 등을 발표하는 사이에 때마침 일어나기 시작한 프로 문학의 물결 속에서 가난을 대변했다는 것만으로 대번에 인기 작가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뼈저린 가난을 조금쯤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단에서의 교우관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자와의 성적 관계도 때때로 절제를 잃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위문협착증이 생겨 대수술을 받고 문단에 나선 지 10년도 못 된 1932년에 사망했다.

서해가 죽은 지 2주년이 되자 문단에서는 당시의 미아리 공동 묘지의 그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 주고 고인을 추모했다.

 

서해는 나무장수, 두부 장수, 물장수, 머슴살이 등으로 인생의 저변을 핥아 나갔다.

저변에 침전된 쓰디쓴 독소만을 핥으면서 젊은 가슴을 태웠기 때문에 그에겐 생존의 의미에 대한 절실하고 준엄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공포분노절망굴욕체념-이처럼 인생의 저변의 독소만이 그가 알고 있는 체험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는 이 저변을 박차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밝은 태양을 향해 목마르게 손을 뻗치는 향일성(向日性), 끊임없이 압력을 박차고 위로 솟구치려는 저항의 습성-이것이 그의 생리요, 사상이요, 문학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은 절망과 공포와 분오 등으로 충만된 빈궁의 문학이요 그 가난의 비애 속에서 해방되려는 저항의 문학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설의 기법으로는 뛰어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이론적 밑받침과 그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해 나갈 기본적 역량을 소유하려면 좀더 일찍부터 습작의 과정이 있었어야만 했다.

 

서해의 작품들은 대개가 가난한 삶에서 소재를 구한 것이다.

<고국> <탈출기> <그믐달> <아내의 자는 얼굴> <기아와 살육> <박돌의 죽음> <살려는 사람들> <큰물 진 뒤> <이역원혼> <전아사> <가난한 아내> <홍염> 등 대부분의 작품이 가난한 살의 고통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의 표현에 있어서 그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감정적 경향은 그 가난의 원인이 사회나 인간에 대한 반항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상적인 비판에 의한 어떤 투쟁도 의식도 아니고 일종의 본능적인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단 이 같은 반항은 사회 과학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비판적 반항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반항의 양상이 계급 관계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왜냐면 그의 가난과 그 고통 앞에는 항상 그보다 잘 사는 계층이 있었으며 거기서 경제적 대립 관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반항 의식은 사회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한 착취자로서의 유산 계급에 대한 사상적 도전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는 자에 대한 즉물적 본능적 반항으로서의 계급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믐달>(1925년「신민‘)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머슴에 대한 고용주의 잔인성으로 인한 머슴의 비극성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고용주 김좌수는 아들 만득의 연주창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잔인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머슴 삼돌은 주인 연주의 부탁으로 뱀을 잡으러 다니다가 물리기도 하고 잡아 온 뱀에다 손을 대고 물리도록 시험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대나무통 속에 뱀을 넣고 한쪽 끝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물리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득이의 연주창을 뱀이 물어 버리면 치유된다는 처방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머슴 삼돌이가 인간 이하의 학대를 주인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는 이같은 김좌수의 횡포를 계속시켜 나가거나 삼돌이의 이에 대한 보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과로 인해서 고민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김좌수의 인간적인 약점을 파헤치고 그 비극적 종말에 대해 동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김좌수는 삼돌의 목에서 살점을 떼내어 만득이의 연주창 치료에 쓰려고 한다.

그러나 삼돌이를 타누르고 살점을 떼내게 하다가 마침내 살인의 과오를 범하고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멕베드가 나약한 덩컨 왕을 죽인 후 그 환상에 쫓기어 고민하듯이 김좌수는 그같은 공포 속에서 영원히 평화의 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김좌수가 죽인 삼돌이의 시체는 암야의 빗줄기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지만 그로부터 그의 집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공포의 그림자만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웃들도 모두 웬일인지 흉가처럼 여기고 발을 끊는다.

이렇게 되자 김좌수의 공포증은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고 만다.

그리고 보신용으로 비수를 품고 자던 그는 어느 날 야반에 삼돌이의 환상 앞에서 떨다가 아들 만득이를 죽이는 실수 끝에 자기도 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작품 결말은 김좌수가 그의 머슴에게 끼친 죄과의 당연한 응보라고 여기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약점에 대해서 지극히 동정을 품도록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발표 시기가 프로 문학의 문학사적 시기와 일치한다 하더라도 그같은 계급적 투쟁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해는 결국 사회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계급의식이라기보다는 다만 학대받는 인간과 그 학대자를 인간 본연의 자세로 그려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만일 서해가 이 작품에서 계급적인 투쟁 의식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이 작품은 그보다 훨씬 앞부분에서 날카롭게 종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즉, 몸을 모로 뒤치면서 머리를 드는 삼돌이를 타 누르고 칼을 푹 찔러 버린 김좌수-살 한 점 떼어내려다가 동맥을 건드려서 피바다를 만드는 김좌수-죽어 버린 삼돌이를 둘러메고 캄캄한 빗속으로 사라져 버린 김좌수-김좌수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끝맺고 작품 전체의 결론을 내렸다면 이 작품은 분명히 계급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는 프로 문학의 방법과 일치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장면은 머슴을 부리는 상층 계급의 잔인성, 그 잔인성의 극치를 폭로한 부분이며 따라서 유산 계급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심을 선동하는 소재로서는 아주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해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의 대립 관계가 사회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분명한 계급의식이 아니었다는 점은 김좌수의 아내의 표현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서해가 사회주의자들이 지니는 그러한 계급의식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그는 김좌수의 아내도 압박자로 그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좌수가 머슴을 쓰러뜨리고 발길로 짓밟을 때 그 다리를 끌어안고 울 듯이 애원하며 폭행을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김좌수의 아내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유산 계급에 대한 반목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나 그 인물의 특정 사건에 있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 유산 계급 전체를 착취자압박자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때때로 나타낸 반목적인 저항 의식은 자연 발생적 본능적인 것이지 그가 당시의 김기진의 프로 문학론 같은 데서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같은 작품에서 그것이 사상적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제도의 심층적 구조를 유물 사관에 의해서 분석하고 그 모순성을 설명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체험의 좁은 한계 속에서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르포르타지의 성격이 강하며 그것은 특히 <탈출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간도의 생활 경험을 그려낸 1925년작 <탈출기>는 그의 처참한 빈궁의 체험의 보고 기록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아, 차라리 나의 고기가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내 눈앞에서 사랑하는 늙은 어머니와 아내가 배를 주리고 남의 멸시를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구나.

 

서해는 <탈출기>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것을 계급의식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보고 형식으로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큰물 진 뒤> <아내의 자는 얼굴> <전아사> <기아와 살육> 등에서도 그같은 형식은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렵에 김기진은 창작평에서 주요섭의 작품과 아울러 서해의 <기아와 살육>을 높이 평가(1925년 [개벽] 7월호)하며 당시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적 태도'를 나타낸 새로운 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

 

이렇게 평가한 김기진은 당시 프로 문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런데 문학 이론은 나왔지만 작품은 없었다.

작가들에게 하층 계급으로서의 체험도 없었고 사회 과학적ㆍ비판적 안목도 없었으며 또 대부분이 예술 지상파의 문학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고 고발하는 최서해야말로 그 방면의 문학을 성취시켜 나갈 유일한 후보자로 선택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사상성도 없이 그같은 작가로 추켜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사회주의적 사상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것은 벌써 그때부터 희미하게 움돋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이 사회주의 사상인지 무언지 모르고 다만 내 환경이 내게 가르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전아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사실로 남들에 의해서 사회주의자로 불리어졌을 뿐이지 자기 자신은 그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냐면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주의 서적을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못했고, 전연 이론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저 고용주의 대한 반항심만 가졌다는 것으로는 결코 사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반항이 지극히 단순하며 사상적 이론의 배경이 없었다는 것은 <큰물 진뒤>(1925년)에서는 이렇게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홍수의 참상을 겪는데 그 원인은 일제의 폭정에 있었다.

그들은 홍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견고한 방축을 쌓고, 물줄기를 산 아래로 돌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일본의 행정 당국은 이 마을 밖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물줄기를 방축 쪽으로 흐르게 해서 방축이 무너질 원인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참상의 원인은 일제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무조건 잘 사는 이주사에게 반항심을 터뜨리고 강도질을 해 낸다.

그만큼 이 작품 속의 반항은 무분별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아와 살육>(1925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

인공 경수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와 아내를 찌르고 자식을 찌르고 지나가는 행인을 찌르고 중국 경찰서와 파수 보는 순사를 찌른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반항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우리 민족이 왜 조국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쫓겨가서 그같은 고통을 겪었는지 원인적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식민지 수탈 정책이 빚은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암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상에 나타난 가난한 자로서의 반항은 그만큼 무분별한 것으로 끝나고 있다.

 

단 이처럼 작품 속에 반영된 반항이 무분별하고 본능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약점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가 당시 유행하던 프로 문학의 이론과 방법이라도 그대로 적용시켜 나갔다면 그의 작품 역시 문학으로서의 순수성을 다분히 손상받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같은 도식적 방법을 도입하여 예술성을 손상시키고 정치적 목적의식에 예속시키기 전에 체험 자체를 솔직하게 그대로 표현해 나간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특히 고통받던 사람들의 아픔을 가장 리얼하게 대변했다는 점에 있어서 문학사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고국을 등지고 간도로 쫓겨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박진감 있게 그려 나간 <탈출기>는 문학이 지녀야 할 역사의 증언으로서 훌륭한 것이다.

 

<박돌의 죽음>(1925년) 역시 가난 때문에 잃은 귀한 아들 '박돌'과 그 때문에 실성해 버린 그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의 어두운 시대상을 고발하고 있다.

 

<홍염>(1927년) 역시 그렇다. 서간도 근처의 가난한 촌락을 배경으로 그린 러시아 땅의 묘사도 뛰어나지만 중국인 지주에게 딸을 빼앗긴 문서방네 부부의 종말은 비극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런 뜻에서 그의 작품들은 그 시대 우리 민족의 가장 어두운 사람을 증언한 체험의 기록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최서해 연구>

【약전 및 작품경향】

1924년 <고국>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5년에 그의 대표작 <탈출기>가 발표되었고 이어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큰물 진 뒤>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거의 공통적으로 작자의 직접 체험의 반영인 듯한 극도의 빈궁과 그에 대한 격렬한 반항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신경향파적 경향의 작품들로 당시 문단의 조류에도 상응하는 것들이었다.

1925년에 카프에 가담하였다가 1929년에 카프를 탈퇴하여 이제까지의 경향파적 빈궁문학에서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해간다.

【문학적 특성】

(1) 빈궁의 고발 :

 

최서해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일생을 살아오며 직접 체험한 극단적인 빈궁의 참상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다.

 

빈궁을 작품의 제재로 삼는 것은 초기 프로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지만 당시 경향파의 작가들이 대부분 작가 자신의 사회 하층민으로서 직접적인 빈궁의 체험의 결여로 해서 불가피하게 관념적 성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데 반하여 그는 자신의 직접적이고 다양한 빈궁의 체험에 의해 작품에 직접성과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고 이것이 그가 문학활동 초기에 문단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된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사회 하층민의 빈궁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격렬한 항거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빈곤 없는 통합된 사회에 대한 갈망을 암시하고 있다.

 

<탈출기>는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자행된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조국을 떠나게 했던 간도 이주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폭로 고발하고 있는 점에서 사회사적인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빈궁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회의식, 빈궁의 문제를 구체적, 집단적 행동을 통해 해결하려는 적극적 태도 등으로서 식민지 시대 문학의 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그 후 초기시기를 지나며 최서해는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다수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크게 나누어보면

 

첫째, 농토를 잃은 도시 노동자와 실업자들 통해 식민지 치하의 국내의 암담한 현실을 폭로, 고발하고 있다.

 

둘째, 간도 배경의 작품에서는 가족이 주대상이 되었으나 국내 배경의 작품에서는 걸인, 기자, 매춘부, 노동자 등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있으며 따라서 전자에서는 가족애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나 후자에서는 빈민들끼리의 동류애로 발전되어 있다.

 

셋째는 간도의 배경의 작품에서 보이는 맹목적인 살인 행위가 없어지고 대신 의도적인 강도 행위나 테러 행위가 등장한다. 또한 전자에서는 반항의 대상이 비선택적이고 그 결과도 파멸로 끝나나 후자에서는 반항의 대상이 부자로 한정되어 있고 반항의 결과는 성공적이 된다.

 

넷째는 계급의식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계급의식이 작품에 전면적으로 취급되기 보다 경구적(警句的)인 문구로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2) 인도주의 :

 

최서해는 1929년 카프를 탈퇴하며 이 때를 전후로 그의 문학은 프로 문학적 색채가 감소되고 차츰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해 간다.

 

그의 인도주의적 경향을 나타내 주는 작품으로는 <인정(人情)>, <경계선>, <무명초(無名草)>, <호외시대(號外時代)> 등이 있고 이들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인적 도덕의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인도주의와 상관되어 있는 맥락에서 최서해의 작품에는 동포애에 입각, 민족적 고통과 궁핍의 원인인 일제에 대한 반항 의식과 민족 감정을 표명한 작품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오원칠십오전>, <해돋이>, <이중(二重)>, <폭풍우 시대>가 있다.

(3) 소재주의적 표현 :

 

최서해의 문학은 그의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 있는 소재주의 문학이다. 

그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절박성으로 인해 그의 문학에는 세련된 문체의 조작이나 미적 결과 등의 문제는 중요시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고심과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이와 더불어 그의 문체에는 의성어, 의태어와 방언의 적절한 사용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관념적인 진술과 감상적 표백으로 현실의 객관적 묘사에 약한 작가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절히 구사하여 사실적이고도 생동감이 넘치는 특유한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또한 그는 작품의 배경에 따라 방언을 적절히 사용하여 작품의 효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에서는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간도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방언을 사용하여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구성에 있어서도 대개 사건의 전개가 평면적이고 유형적인 흠을 보이고 있다.

갈등의 양상이 단순하고 사건 해결에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많은 작품이 극적 효과만을 노려, 빈궁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의외의 살인 혹은 강도 행위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법상의 결함은 후기 작품에서야 다소 극복된 면모를 보일 뿐이다.

출처 : 종로사랑-광화문 100번지
글쓴이 : blue horse 원글보기
메모 :

서해 최학송

소설가

조운

최학송 기념사업회

곽근

정종배

망우리공원

우리문학기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