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柳寬順, 1902. 12. 16 ~ 1920. 9. 28) - 열사(烈士)의 고혼(孤魂)
정종배(시인, 교사)
지금도 망우리공원을 공동묘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망우리, 왠지 으스스하고 음산한 분위기로 밝고 환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다. 허나 그 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알고 나면, 왜 그런 분이 공동묘지에 유택이 있지? 의문과 관심을 갖는다.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 아차산 코스, 12.6Km)는 8개 코스 중 가장 전망이 좋은 길로 알려졌다. 코스 곳곳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남한산성, 검단산, 예봉산, 한강과 서울 시내,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안산, 남산 등 다양하게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망우산 제2보루에서 시계가 좋은 날은 인천 앞 서해까지 볼 수 있다. 그 곳에 “낙이망우” 전망대를 세워 망우리공원 인물 탐구 및 답사 관련 교육과 행사를 치르면 서울 자치구에서 가장 낮은 중랑구 학생들의 교육지표가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망우리공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면 세계적인 명소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명시되어 있다. 3.1운동하면 유관순 열사가 상징적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집안으로 부모님, 숙부, 이웃 아저씨들이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의롭고 심지가 곧은 성격으로 당시 170Cm(5척尺 6촌寸)로 대단히 큰 키였다. 인물도 훤칠했고 씩씩하며 활달하여 뚝심도 남달랐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발행 『이화백년사(梨花百年史)』에 - 유관순은 1916년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유관순 열사 어록’에 “나는 학교에서 청소를 해서라도 도움을 받은 것을 갚겠다.” - 는 말을 싣고 있다. 정동교회 손정도와 이필주 목사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면 /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하면서 부르는 이 노랫말을 지은 분은 강소천 아동 문학가이다. 강소천 유택은 망우리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와 마주하고 있다.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해를 인수하여 수의를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태원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지와 주택지 개발로, 3대 9명의 독립유공자 가족들이 삶에 쫓겨 관심을 두지 못하는 사이, 유관순 열사의 묘지가 무연고 묘로 소실되어(1935년에 추진하여 1936년 4월에 이장이 끝남) 이곳 망우리공원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묘비는 소화 11년, 1936년 12월) 안에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추석과 설 명절에 이태원묘지무연분묘비와 노고산취장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2017년은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었다. 필자는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활동으로 작년 2월 릿쿄대학 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제10회 윤동주 시낭송회에 학생과 함께 참석하였다. 일본인들의 행사 치르는 열정과 몰입은 놀라웠다. 피식민지 한 청년 시인의 순수·양심·부끄러움의 미학에 대한 거침없는 울림의 거센 물결이었다. 행사 뒤풀이에서 재일한국인 오충공(吳充功) 다큐감독을 만났다. 오감독은 관동대지진 관련 『감춰진 손톱자국(1983)』과 『불하된 조선인(1986)』 두 작품을 제작하였다. 일본과 한국을 드나들며 그 참상과 묻혀버린 재일한국인 역사를 알리는데 30여년에 걸쳐 고군분투하며, 제3의 작품 『1923년 제노사이드 93년의 침묵』을 제작하고 있다.
2017년 8월 30일 부산항 수미르공원에서 94년만에 관동대진재 조선인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발족했다. 단체 카톡에 시를 지어 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올렸다. 윤중목 시인이 행사장에서 낭독하였다. 오감독도 제3작품 안에 사용한다고 알려왔다.
관동대지진 조선인대학살 희생자 추도식 - 축문을 대신하여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 탁한 발음으로 생사가 갈린 /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희생자 영혼들이시여 //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 저 파도 넘어 //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 저 바다 건너 //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 저 하늘 아래 / 이제 이제는 그만 / 그만 외우시고 // 산을 넘어 / 숲을 지나 / 강을 건너 / 얽매이지 마시고 // 고개 넘어 / 들을 지나 / 내를 건너 / 미련두지 마시고 // 씨줄 날줄 손잡아 / 시나브로 일으켜 / 오시라 / 오시라 / 피맺힌 영혼들이시여 // 모두모두 더불어 / 아름답고 향기롭게 / 거침없이 걸어오시어 // 이제는 / 그 깊고 깊은 한 / 원한을 풀어 놓으시라 // 지금여기 / 저 높은 가을하늘 아래에 / 이 파도와 / 파도 소리에 / 한 맺힌 후손들의 마음 / 마음 안에 //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 피 터지게 / 시원스레 외치십시오 // 15엔 50전 / 쥬고엔 고짓센
94년만에 관동대지진 희생자 유족들이 모여 갖는 추도식과 관동대지진 조선인대학살 희생자 유족회와 그 유족들과 함께하는 시민모임 발족식 그리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발족의 기틀을 35년 동안 발로 뛰신 오충공 감독님과 그 뜻으로 인연이 되어 함께하신 모든 분들과 단체의 정성으로 뜻깊고 의미 있는 계기와 장이 되어 피와 한의 역사를 올곧게 정립하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민족성을 이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종배 합장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진재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살아 귀국하였다. 일본 경찰과 군인 및 자경단들이, 15엔 50전(쥬고엔 고짓센)을 발음하여 탁음이 나오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간주하여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부분 배우지 못한 하층민 재일한국인이었다. 또한 3.1운동이라는 조선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기억하던 관료 및 군인들은 의도적으로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다. 조선인을 폭동과 사회주의자로 엮어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잡아 죽었다. 그 때 자경단 단원들은 동학혁명 당시 조선에 진압군으로 들어와 동학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동학군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였다. 동학군을 때려죽인 퇴역군인들이 자경단의 주축이 되어, 일본 경찰 군인과 함께 6600여명 많게는 2만 명 넘는 조선인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상하였다.
망우리공원 인물 중 조봉암, 유상규, 최신복, 송석하, 김영랑 등이 관동대지진 당시 유학생으로 제노사이드 참혹한 학살 현장을 보고 귀국하여 저항시를 쓰고, 민속학 기틀을 다지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여기 한국의 흙이 되어 망우리공원에 묻힌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는 일기에 “절대 조선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일을 당한 일본인을 도와주는 민족”이라고 썼다. 그는 식민지 말단 관료로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았다. 김동환, 김소월, 이상화, 이육사, 이기영, 염상섭, 함석헌 등 문화예술인 30여 분이 당시 일본에서 관동대진재를 경험하였다. 그와 관련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활동하려면 관동대진재에 대한 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싶다. 오감독은 작년 8월, 김동환의 장편 시 『승천하는 청춘』을 파인의 따님인 김채원 소설가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인사동 화봉문고 전시관에서 촬영하였다.
오감독과 망우리공원을 답사하며 이태원분묘합장묘와 유관순의 관계를 이야기하였다. 합장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매우 분개하였다. 어떻게 유관순 열사에 관한 자료나 묘지가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다큐제작 주제와 범위를 넓히고 더 깊게 촬영하였다. 두 번에 걸쳐 망우리공원 영상작업을 하였다. 올 9월 제작을 마무리 짓고자 대한해협을 오가고 있다.
만해 한용운의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 중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정신을 유관순 열사는 순국하기 전까지 실천하여 우리 독립운동사에 영원한 ‘자유의 반석’으로 남았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세 분이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그 외 방정환, 문일평, 조봉암, 유상규, 김영랑, 문명훤, 이병홍, 설의식, 채동선 등이 3.1운동에 참가했다.
망우동 금란동산의 김활란[본명 기득(己得), 아호 우월(又月), ‘헬렌’(Helen)이라는 세례명을 활란(活蘭)이라 개명]박사는 이화학당 대학교 대표학생으로 활동하여 유관순 열사의 모델이었다. 김활란 박사는 유관순 열사 선양하는데 유열사의 고향 첫 미국 유학생인 조병옥 박사, 이화학당 선생님이신 박인덕 인덕학원 설립자와 많은 후원과 힘을 썼다. 친일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유관순 열사를 이용하였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현재 금란동산에는 김활란 박사 묘지를 이장하고,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와 중랑숲리가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금란교회는 세계 유수의 감리교 교회로 성장하였다. 미국 유학 시절 설산 장덕수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올해는 망우리공원 사무소 자리에 망우역사문화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독립운동과 문화 예술에 관련된 인물들의 관련 영상 자료 및 책자 등을 수집하여 전문도서관이길 희망한다. 문화관을 이용하여 선인들의 정신과 활동을 종합적으로 기리고 입체적으로 이어받길 바란다. 사잇길을 걷는 모든 이가 스스로 깨달아 실천하는 능동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의 시공간이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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